말은 서툴고 선택은 과감하다
오랜만에 요즘 근황을 적어본다.
나는 ‘4개월 코스’라 불리지만 바캉스를 빼면 사실상 3개월짜리 어학코스를 무사히 마쳤다.
3과목, 총 2,700유로. 비. 싸. 다!
2월에 다시 등록하려고 했지만
주택 구입비와 여러 수수료, 리노베이션 비용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유명세답게 학교는 정말 잘 가르쳤다.
조금씩 들리고, 조금씩 말이 나왔다.
그래서 재등록을 더 간절히 고민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실은 무시할 수 없었다
대신 시청에서 운영하는 어학코스가 문득 떠올랐다.
내 수준은 이제 막 A1을 벗어나 A2로 가야 하는 단계.
그런데 시간표가 안 맞아 B1 반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담당자는 내 공부 기간과 수준을 체크하더니
“조금 어려울 거예요”라고 했다.
나도 안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도 아이들 케어 때문에 이 시간대 수업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저한텐 좀 어려울 것 같지만, 이 수업을 꼭 들어야 해요.”
다행히 통과.
게다가 시내 거주 할인까지 받아 100유로 절약했다.
이럴 땐 괜히 뿌듯하다.
2025년 2월 14일에 프랑스에 와서
이제 곧 1년이 된다.
요즘의 나는 번역기 없이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오류는 여전히 많지만 전화 예약도 하고, 병원 진료도 번역기 없이 본다.
사실은 번역기를 써서 정확히 말하고 싶은데
의사는 늘 말한다.
“괜찮아요, 그냥 말해보세요.”
그래서 병원 가기 전엔 아픈 곳들을 혼잣말로 연습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조금씩 늘었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번역기가 없었다면 내 언어는 더 빨리 늘었을까?
기술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라
내가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괜히 겁도 난다.
나는 기술력이 아니라
‘나’ 자체가 계속 자라고 싶다.
비싼 3개월 코스의 덕을 나는 조금씩 보고 있다.
오늘 아침엔 아이들 같은 반,
튀르키예 출신 마담들과
무려 20분이나 스몰토크를 했다.
- 어디 사니?
- 일하니?
- 프랑스어는 공부해?
- 온 지 얼마나 됐어?
- 남한에서 왔어? 북한?
- 서울은 여기서 얼마나 걸려?
사소하지만 끝이 없는 질문들.
그리고 나는 그 질문들에 다 대답했다.
“프랑스어로 대화는 하고 싶은데, 할 사람이 없어요.”
그랬더니
같이 커피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문제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정말 고마운 마음.
이번 주 토요일부터는 아이들 학교의 BTS 팬 보육 선생님과
한국과 프랑스 문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대화를 많이 해보고 싶다”는 내 말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꼭 어학코스가 아니어도 이렇게 방법이 생겨서
다행이고, 기쁘다.
8월에 계약했던 집은 1월 말이 되어서야 드디어 ‘완료?’가 되었다.
이제 진짜 우리 집이다.
지금 사는 집은 2월 23일까지라
그전까지 리노베이션을 끝내야 한다.
사실 프랑스에서 집을 고친다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여긴 인건비가 너무 비싸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다면
결국 내가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도배, 장판, 철거, 작은 수리 하나까지 사람을 부르면 금액이 상상을 넘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직접 고치며 산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래된 주방은 어쩔 수 없이 업체에 맡겼지만
도배와 장판, 가벽 철거,
그리고 멋있긴 했지만 쓰기엔 가성비가 떨어지는 벽난로 제거는 직접 하기로 했다.
한국 마담들의 배우자 중
주택을 오래 고쳐 살아온 포르투갈 므슈가 계셔서
남편은 조언을 듣고 거침없이 공사에 돌입했다.
이런 걸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걱정했는데,
작업복이라 말하며 헌 옷들을 입는 순간 테토 남으로 변신…
성큼성큼 집을 고친다.
예상치 못한 문제는 포르투갈 므슈가 영상통화로 해결해 준다.
아주 좋은 동네는 아니지만
(근처에 현지인들도 선호하지 않는 구역이 있다)
우리 주택 단지는 놀랄 만큼 조용하고 평화롭다.
게다가 근처에 나와 동갑인 한국 마담이 산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얼른 고쳐서 이사 가고 싶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프랑스에 온 지 1년도 안 되어 집을 샀고,
지금은 그 집을 고치고 있다.
1년 만에 ‘우리 집’으로 이사한다.
돌이켜보면 꽤 용기 있는 선택들의 연속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이제는 조금 기대가 된다.
나는 큰 딸 제니가 10살이니까
“10년만 살고 한국에 가면 되겠다”는 말을 무심코 자주 했었다.
그런데 제니에겐 그 말이 걱정이었고, 서운함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하교 길에 제니는
“엄마는 한국으로 간다면서?
그럼 나도 가야 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
나는 제니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엄마는 언제나 제니 편이고,
제니가 원하는 날까지 항상 엄마가 제니 옆에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