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컨트리 쇼퍼 Jun 05. 2023

스물아홉의 첫 자취 인생의 쓴맛을 보다

<첫 번째 리스트: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집>

대한민국 서울에서 내 집 구하기!

이 이야기는 내가 처음 자취를 했을 당시 2020년 스물아홉 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취는 어디서 하는 게 좋아?" 

"서울대입구역? 아니면, 조금 더 싼 가격을 원하면, 신림도 나쁘지 않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의 아홉은 첫 자취의 시작은 역시 관악구라고 답할 정도였다.


서울대입구역은 내가 처음 독립을 시작했던 장소였다. 

청년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젊은 층의 비율이 굉장히 높아 동네가 활기차다 못해 어수선했다. 

내가 처음 서울대입구역을 갔을 때의 첫인상은 뭐랄까? 

대학생, 직장인 너나 할 것 없이 관악구에 모두 모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3년간 이 동네에서 살았다. 애증의 동네다. 

지금은 다른 곳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일주일에 세 번은 서울대입구역을 찾는다.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음식점, 카페, 술집들이 이곳에 내 추억과 함께 묻어있기 때문이다.

힘든 일도 많았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시기를 함께 해준... 

나의 첫 원룸 집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눈이 펑펑 오는 그날, 관악구의 쑥고개로 어디쯤>


나는 당시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아늑한 아파트에서 10년간 살면서 독립을 꿈꿔오기만 했다. 

한 번도 독립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언젠간 꼭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한 대학원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 집을 찾기 위해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꼭 몇 달에 한 번씩 스멀스멀 그 마음이 올라와 혼자 살 집을 찾아보곤 했었다. 

그런데 월세 가격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당연히 돈벌이가 넉넉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당연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여러 번 무산되었다. 

항상 꿈만 가득해서 내 삶은 피곤했다. 


그런데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 우리 부모님께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실 날이 온 것이었다. 

30년 평생을 서울에서 생활하시다가, 정확히 말하자면 일터는 서울이었지만, 

수도권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은 오랫동안 서울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고, 귀촌을 하시기로 결심한 지 5년 차였다.

엄마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언제 가는 시골에 내려가서 살 거야."

하지만 아빠는 원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던 아빠는 벌써 지금 나이에 시골에 내려간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 엄마는 마음먹는 순간,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대장이었다. 


엄마는 곧이어 시골 생활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이어나갔다. 

"우리 집은 이제부터 미니멀 라이프야!"

우리 가족들은 슬슬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모두들 완전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말 그대로 정말 불안했다.  


엄마는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고급세단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이 차를 유지하기 위해서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설득하였지만, 가차 없었다. 

엄마, 아빠는 일평생 자영업을 하면서 이 생활에 너무 지쳐가고 몸도 망가지고 있었다. 

시골로 내려가면서 하고 있던 일도 다 정리할 참이었다. 

그래서 지금 버는 수입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엄마는 아빠에게 차를 파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노후는 더 힘들 거야. 포기할 수 있을 때 포기해야 해."

맞는 말이었다. 엄마 아빠는 서울에 살면서 항상 아등바등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며 살았다.

지금의 엄마, 아빠는 자주 웃기도 하고 행복해 보인다. 시골 생활에 너무도 만족하시면서 사신다. 나는 그런  엄마 아빠를 볼 때마다 서울에서 사셨을 때가 생각났다. 부모님은 항상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엄마가 나와 동생에게 가장 자주 했던 말이 있었다. 

"너희만 대학 가면 우리는 아주 편하게 살 거야."

하지만 내가 대학원까지 가버리고, 동생은 홀연히 외국으로 날라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엄마 아빠의 편안한 생활은 멀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1년만 도와줄 거야. 그 이후에는 국물도 없어." 

그때는 엄마가 이상할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타인에 의해서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것 같아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없는 투정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모님과 함께 캥거루족으로 살고 싶었다.      

월세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두려웠다.     

"돈은 대체 어떻게 벌어야 하는 거지?"

말로는 독립을 외치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풀아, 괜찮니?>


그렇게 부모님은 몸소 실천을 하셨고, 주말마다 시골로 내려가서 집을 지으셨다. 

그렇게 내 나이 스물아홉이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독립이라는 것을 하였다.      

자취방을 찾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지역에 살아야 할까 고민하였다. 

나는 당시 금호동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주변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주변의 원룸을 구하는 것은 힘들고, 거의 전세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나 감당할 수 없는 가격 때문에 나는 바로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도 내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그래도 신축 오피스텔에서 살고 싶었다.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로서는 빌라에서 사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웃기지도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내가 생활했던 삶이 아닌 새로운 생활환경에 사는 것이 더욱더 두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내 바람은 이마저도 불가능이었다.

결국, 내가 생각한 이 모든 것은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원룸 보러 왔는데요..."

"얼마 생각하세요?"
"월세 50만 원 이하요..."

"더 일찍 오지? 요즘 신입생들이 집 많이 보러 다녀서 원룸이 잘 없어. 보증금을 더 올리던가?"


내가 집을 구하러 다닐 때가 2월이었다. 다음 달이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달이었다.       

서울대입구역의 집을 스무 군데 정도 돌아보았을 때, 내가 원하는 원룸과 가격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합의점을 찾았다. 

아니, 포기해야만 했다. 

보증금을 올렸다. 다행히 몇 날 며칠을 돌아다닌 끝에 타협점을 찾은 오래된 오피스텔을 찾게 되었다. 

다른 곳보다는 가격이 비쌌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통창이 있었으면 좋겠고, 해가 잘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있었다. 

내 기준이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첫 독립>


그렇게 나는 이사를 했다. 

처음 원룸에 짐을 풀었을 때,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리고 이 좁디좁은 5평대의 원룸에서 과연 내가 바라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사는 내내 건강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년 간은 거의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당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나는 동기들을 집으로 불러 초대해서 술을 마시고, 

아니면 내가 동기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이런 생활이 반복되었다.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버텼다. 이 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취미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위가 뒤틀리는 위경련이 자주 오곤 했다.

잠을 잘 때마다 가위에 눌렸다.  


그래도 내 할 일을 해야 하니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그때는 마음이 불안정하여, 온 벽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그 벽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이 내 하루의 일과였다.  

그러다가도 답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아니, 햇빛을 보려고 문을 열면 건너편에는 옷 벗은 남자가 서 있어 황급히 블라인드를 내려야만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심장이 쉼 없이 두근거렸다.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다.

이제는 사람 만나는 것도 힘이 들었다.  

환한 대 낫에도 블라인드를 내리고 사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뜻밖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찾아왔다. 코로나가 찾아왔다. 

대학원의 모든 수업을 이제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었고,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그건 누구나 다 똑같았을 것이다. 


코로나를 계기로 나는 답답한 이 원룸에 있어야 할 날들이 더 많아졌다.  

인원제한과 알 수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 카페도 갈 수 없었다.   


홀로 작은 원룸방에 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처지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하고, 

나를 우울함의 동굴 속으로 끝없이 몰아갔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몰랐던 새로운 내 가치관이 형성되고 있었다. 


나는 나름 고학력의 석사생이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들다는 아웃풋의 예체능 전공을 선택했다. 

말 그대로 돈만 쏟아부어대고 제대로 된 돈벌이 하나 못할 것이라는 어른들의 저주의 말씀을 들으면서 굳건히 커왔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다.  

'정말 그 말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말들이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나 보다.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언제 가는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을 안고 살았지만, 애써 그 마음을 부정했다. 

그래서 나는 비싼 돈을 들여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결국에는 엄마 아빠를 서울에 더 묶어둔 셈이 되었다.


대학원 등록비. 그리고 단편 영화를 찍을 제작비, 용돈, 월세비 부모님이 정확하게 1년만 지원해 준다는 목록이었다. 그때는 이러한 것들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몰랐다.

왜 그렇게 부모님께서 서울에 사셨을 때, 힘들어하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1년이 지나자 모든 것을 내가 다 감당해야만 했다. 

벌이가 규칙적이지 않았던 나는 매달 50만 원씩 내야 하는 원룸비에 덜덜 떨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옆방에서 울리는 진동소리에 아침을 맞이하고, 

세수를 하러 화장실을 가면 환풍기 틈 사이로 위층에서 가래침을 뱉는 아저씨의 소리에 속이 울렁거리고, 

밤이 되면 잠을 좀 자보려고 하면, 새벽 4시까지 떠들어대는 이제 갓 스무 살 된 대학생들의 고성방가에 미칠 노릇이었다. 가끔 화를 못 이겨, 콘크리트 벽에 다가 주먹을 휘두른 적도 있다. 

내가 점점 분노 조절 장애가 되나 싶었다. 


정말 지겹다 싶어, 이 답답한 원룸에서 벗어나 보려 밖을 나가면, 

닭장처럼 모여있는 원룸촌 때문에 하수구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정말..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 내 머리를 울렸다.


하지만 1년 후, 코로나가 잠잠해졌을 때도 나는 스스로 이 원룸에 갇혀 살았다.

이제 이 삶에 익숙해진 거였다. 

아니 두려워진 것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함만 나를 가득 채웠다.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이 답답한 방에 있다 보니 내 마음과 뇌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이렇게 되는 일이 없고, 우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해에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도 서울대입구역에 살고 있었다. 그걸로 우리는 먼저 친구가 되었다. 

불행하고 우울하다고 생각했던 이 동네가 활기차게 느껴졌다. 

같이 어디든 돌아다니면서 동네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카페를 갔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이 동네에 공원이 있는 줄 몰랐어. 그래서 항상 멀리 있는 보라매 공원까지 갔었는데..."

"낙성대 공원이 얼마나 좋은데? 여기 봄 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펴. 정말 너무 아름다워." 

이 동네에 공원이 있다는 것도 남편을 통해서 알았다. 


함께 하니 모든 것이 좋았다. 

그리고 이 작은 원룸을 벗어나 움직이고 여러 가지 것들을 보니 내 마음이 서서히 괜찮아지고 있었다. 

그게 나의 마음이 열리는 첫 번째 동기였다. 

그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마음의 문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