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리스트: 사진첩>
나는 영화를 전공했고, 석사 학위가 있지만,
정작 그 석사 학위를 딱히 쓸 수 있는 곳은 없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요즘 생각으로는 그 등록금으로 영화를 더 찍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항상 시간이 지나고 후회한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도 영화를 많이 찍고 싶어서 대학원에 갔었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애석하게도 졸업한 순간, 영화와는 멀어졌다.
오히려 요즘 이 순간들이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요즘 취미는 한국을 떠나기 전 내가 살았던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일이다.
이제 출국하기 2주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왜 이렇게 애증의 이 동네가 영화처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걸까?
마치 영화를 찍는다는 생각으로 나의 과거와 현재의 기억 속 어딘가에서 나를 찾고 있다.
이 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를 가는 길이다.
유독 여름날이면, 이 언덕길은 하늘과 맞닿아 있어 태양이 작열하는 곳이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카페를 가기 위한 불굴의 의지로 걸어갔다.
집에서 무려 20분이나 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3년 간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지만, 한 번도 카페를 가는 길에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모든 것이 생소하게 와닿는다.
사진을 찍고, 색보정을 하면서 이 동네가 이런 동네였나 싶다.
나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나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쓰고 있는 글과 만든 영화는 모두 나의 과거에 머물러 있다.
나는 무언가를 창작하면서 동시에 내 과거를 놓아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항상 창작은 나에게 무거움을 주는 존재였지만,
지금은 창작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이 조금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더 자유롭게 멀리 날아가기 위해서...
옛날에는 무거워야 모든 게 잘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들이 너무 무거우면 날아가기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금 더 훌훌 털고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