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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컨트리 쇼퍼 Sep 24. 2023

호주에서 일자리 구하기

<호주 문화 적응기 2>

워킹홀리데이


말 그대로 일하면서 홀리데이도 즐기라고 만들어진 비자인데,

우리는 몇 개월째 일을 못 구하고 있었다.  

워킹은 하지 않고, 홀리데이만 몇 개월째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호주에 도착한 계절은 겨울.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새 봄이 되었다. 

카페에 가서 커피와 토스티를 매일 같이 먹었다. 카페 직원이 어느새 우리가 시켜 먹는 메뉴를 기억하고는 우리가 도착하면, 그 메뉴가 맞는지 확인하고는 바로 커피와 토스티를 만들어 준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하늘과 나무에 꽃봉오리가 피는 것을 바라본다. 

원치 않았던 여유다. 

일을 하면서 내가 만드는 여유는 좋지만, 일을 못 구해서 시간을 보내는 이런 여유는 싫다. 

어떻게든 일을 찾아야만 했다!



호주에서 삼 개월의 구직활동 


2023년 6월 24일 우리는 호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9월 13일이 되어서야 우리 둘 다 호주에서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일을 구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30군데 정도 이력서를 낸 것 같고, 그동안 내가 한 번도 해오지 않았던 일에 이력서를 내보았다. 호주에 와서 요가 일이 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연락온 곳은 딱 세 군데. 그리고 두 군데에서 면접을 보았다. 

그렇게 나는 7월 24일에 파트타임으로 인턴을 시작했다.

조건은 3개월이었지만, 나는 9월 4일에 정규직 풀타임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남편의 경우는 경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어서, 일을 구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합격을 두 번 했었지만, 결국, 두 번 해고를 당했다.  

그렇게 9월 13일이 되어서야 제대로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이력서 돌리기!


나는 호주에서 요가 사업 계획이 무너진 이후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매일 같이 생각을 해보았다. 

이십 대까지는 1년간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한 경험으로 영어에 자신감이 있었지만, 

이제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대폭 하락한 상태였고, 영어는 완전히 까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호주에 온 이후로 내가 과연 현지 사람들과 일을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혼자서 자신감 있게 뭐든 소통이 안 돼도 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남편이 있다 보니 집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누구에게 중요한 전화를 걸거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킬 때도 남편한테 의지하게 되었다. 

내 남편은 영어를 잘하니까...

그런데 그러다 보니 내가 지금 호주에 살고 있는 건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망각하는 순간이 왔다. 

어.. 이게 아닌데?

월세 218만 원을 내고, 정말 나는 이곳에서 글을 쓰고 싶어서 이러고 싶은 걸까? 

경제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뭘 하고 싶은 거지? 

그래서 나는 그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왔던 유튜브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력서를 내면 될 것을, 두려워서 그건 차마 시작하지 못했다.  

내 마음 깊은 곳 알게 모르게 호주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꺼려왔던 것 같다. 

그저 한국에서부터 내가 익숙하게 해 왔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유튜브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프리미어 프로 1년 치 결제를 질러버렸고, 

유튜브를 시작했다. 뭐... 대단한 유튜브는 아니었다. 

그저 뭐라도 해야지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영화 전공이어서 편집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쪽 일을 안 하지가 꽤 되어서 2분 정도의 영상을 편집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맙소사! 이건 좀 심각한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 때도 단편영화 20분짜리를 편집하는데도 몇 달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유튜브를 시작하겠다고 편집을 하자, 또 이런 습관이 나와버린 것이다.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하고서도 또다시, 영상을 확인하자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이렇게 하지 말걸. 조금 더 다르게 편집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영상을 삭제하고 재편집을 해서 업로드했다. 

그래도 영상은 아무리 다시 봐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 어떡하겠는가? 

되돌릴 수는 없다. 


일이라도 하지 못하니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서 일부로라도 일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때까지도 이력서는 제출하지 않았다. 

남편은 여러 군데 이력서를 돌렸지만, 어디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우리는 불안했다. 

이러다가 정말 모은 돈만 호주에서 까먹고 1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너무 불안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한다. 

결국, 늦은 밤. 나는 인터넷을 켜서 일자리를 검색해 보았다. 

집에서 하는 재택근무도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내 전공을 살려서 영화 회사에 들어가서 편집을 해볼까?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만 찾았다. 

그런데 몇 주 유튜브를 하면서, 그 마음은 접었다. 지금의 편집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다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들 위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우리가 주로 이용한 사이트는 Indeed, Jora, SEEK, gumtree, 썬브리즈번을 이용해서 이력서 제출을 시도했다. 일주일간 스무 군데의 이력서를 제출한다고 치면, 2곳 정도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연락이 오면, 날짜와 시간을 정한 뒤 면접 날짜를 조율했다. 



호주에서 면접


1차 서류에 통과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메일의 내용은 그룹면접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고, 

나는 당연히 참여하겠다고 답신했다. 

차라리 개인 면접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잠깐 스치듯 들었지만... 

태세전환은 빠르게! 나는 어떻게든 이 회사에 붙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제발 이 회사에 다닐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면접 준비를 했다.


사실, 회사를 한 번도 다니지 않았던 나로서는 매번 회사 면접이라는 것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 

그 회사에 대해서, 알아야 했고, 회사의 이력과 정보들을 알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습득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글로 쓰고, 외웠다. 

하지만 이렇게 외우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이 있다. 

외운 게 기억이 나지 않으면 고장 난 로봇처럼 아무 말이나 지껄이게 되면서, 면접은 망하게 된다. 


예전에 한국에서도 몇 번의 회사 면접을 본 적이 있었다. 

거의 그룹 면접이었다. 2차를 통과한 후에는 개인 면접을 봤다. 특히나 그룹 면접 때는 정말 많이 떨었고, 말도 많이 더듬었다. 생각은 뒤죽박죽 되어버렸고... 결국에는 낙방했다! 

그래서인지 그룹 면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의 트라우마처럼 엄청 긴장이 되었다. 

또다시 고장 난 로봇이 될까 봐 두려웠다. 



다음날, 회사에 도착하고 나니,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의 사람들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면접자들 중에서 두 번째로 도착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것 같은 앳된 남자가 내 앞에 앉아있었다.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호주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이제 2주 됐어요."

그는 호주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졸업을 하고, 한국에 돌아갔다가 6개월 만에 다시 호주로 왔다고 했다. 

"호주에서 대학 나오셨어요?"

"아니요. 저는 한국에서 대학 나왔어요."

내가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얘기를 하자, 그는 깜짝 놀랐다. 

"분명 요건에 에는 호주 대학 출신이라고 했는데? 신기하네요?"

"네. 저도 신기해요."

붙임성이 참 좋은 친구였다. 

"집은 구하셨어요?"

"네, 구했어요."

내가 일주일 만에 집을 구했다고 하니, 빨리 구했다고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구하셨어요?"

"집이 비쌌어요..."

"얼마?"

"주에 630달러요."

남자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마치 내가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는 셰어하우스에 산다고 했다. 자신은 주에 220불을 낸다고 했다. 

내가 남편과 산다고 하니, 그제야 이해하는 눈치면서도 630불은 너무 비싸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그렇다고 동의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고, 그 사람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이거 생각보다 면접자들이 많은데...'

여자 두 명은 누구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워홀 온 지 세 달이나 됐는데, 일을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요즘 들어 브리즈번에서는 일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라고 했다. 카페 일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내가 만약 세 달 동안 일을 못하고 있으면 나는 정말 불안하고 미칠 것 같았지만 그들은 태연해 보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서 티를 내지 않는 거겠지? 

그리고 면접관이 우리를 세미나실로 안내했다. 

인상 좋은 사람이 면접관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웃상이었다. 

사람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고, 포근한 이미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갑자기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긴장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면접관이 먼저 자기소개부터 시작하라고 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이 면접에 참여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떨리는 입술은 모두 다 매한가지였다. 

특히 내 옆에 있는 여자는 정말 열정적이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그 열정에 전염된 듯, 면접장은 마치 토론장으로 바뀌었다. 나도 질 수 없어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내 얘기를 했다. 

그런데 면접이 이어지면서도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이야기가 제일 와닿았다. 

내가 면접관이어도 이 여자를 뽑을 것 같았다. 

시간이 무르익을수록 면접관은 이 여자에게 가장 큰 호응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명의 지각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옷차림은 후줄근한 반팔에 반바지와 슈퍼마켓 쇼핑백을 들고 왔다. 

이럴 수가.... 꽤 인상 깊은 등장이었다! 

면접이 아니었으면 참으로 매력적인 사람일 수도 있었을 텐데... 

면접관은 애써 이해하는 척,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지만, 이미 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40분가량의 면접 시간이 끝났다. 

게임은 끝났다!  

면접관이 연락할 사람은 딱 한 명 정해져 있었다. 

내 느낌으로는 내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이 되면 연락을 준다고 했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밥을 먹는데도, 이미 알지만 결과가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이미 떨어질 것 같은 예감은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메일이 왔다!  

떨어졌다.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항상 회사 면접을 보면, 서류는 그래도 잘 통과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면접을 보면 무조건 떨어졌다. 

도대체 나는 이곳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안정되고 싶어서 온 호주에 더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트라이얼 


호주에서는 트라이얼이라는 기간이 있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거치는 ‘트라이얼 기간’은 이게 3일이 될 수도 있고, 몇 주, 몇 달이 될 수도 있다. 

고용주가 요구하는 스킬, 능력을 입증해야만 완벽하게 채용될 수 있다. 

처음에 남편은 드디어 일을 구했다고 생각해서, 출근을 시작했다. 주 5일의 정규직 풀타임이었다. 

나는 호주 와서 잘 풀리지 않아도, 남편은 나름 잘 풀린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남편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일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남편에게 일을 주지 않으며, 주변 동료들이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남편은 보스에게 전화를 걸었고, 보스와 길게 통화를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남편이 왠지 잘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보스는 남편에게 자신이 원했던 사람이 아니라고 하며, 남편은 2주 만에 잘렸다. 

우리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잠시 행복했었다. 하지만 결국, 2주 만에 잘리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남편은 이력서를 돌렸고, 몇 번의 트라이얼을 거쳤지만, 매번 트라이얼 기간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도 트라이얼을 하는 동안 돈은 받을 수 있었다. 네 번의 트라이얼을 겪으면서 남편은 스킬과 능력이 점점 향상되었다. 신기하게 트라이얼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트라이얼을 한 직장에서는 남편의 부족한 점을 보스와 매니저가 긴 장문의 편지로 알려주었다. 감동이었다! 

이로 인해, 남편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다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호주에서 일 시작!


그렇게 남편은 다음 직장에서 트라이얼 기간을 통과하게 되면서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호주에 온 지 세 달 만에 일을 구하게 된 것이었다. 

나 또한, 그룹 면접을 보고 난 후, 다른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다행히도 개인면접이었다. 그룹 면접때와는 달리, 긴장을 풀고, 욕심을 내려놓아서 인지 내 생각을 자세히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도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일을 하지 못하는 세 달 동안 정말 힘들고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나? 정말 심각하게 고민한 때도 있었고, 호주에 괜히 왔나 하는 후회도 있었다. 

일을 하지 못하니 안 좋은 생각만 계속 찾아왔다. 우리의 계획도 모두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았다. 

"내년에 캐나다는 못 갈 것 같아.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자..."

해외에 정착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영국에 있을 때야 부모님의 돈으로 공부를 해서 힘든 걸 몰랐던 것이었다.

그때 당시 부모님이 나를 뒷바라지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힘들고 나름 길다고 생각했던 세 달의 취업 준비의 기간을 견디고, 

지금은 둘 다 일을 하고 있다. 

일을 하지 못할 때는 호주가 싫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좋다.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일을 하지 못했을 때는 모든 게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호주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일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비로소 우리는 일을 통해서, 자존감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에 살든 일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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