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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urbet Aug 26. 2018

그 끝은 곧 시작이다

포르투갈, 로카곶

포르투갈 로카곶

그 끝은 곧 시작이다


페나 궁전에서 내려와 신트라 역에 도착하니, 어느새 점심 무렵이었다.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아침에는 고요한 전원 마을의 풍경이었는데, 오후가 되니 어느새 골목마다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한다. 이제서야 고요한 마을이 잠에서 깨어 활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무언가 분주하게 바쁘지만, 번잡스럽지는 않고, 분주함 속에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 옛날 왕족들이 지친 도시 생활을 피해 휴양했던 곳이라고 하니, 지금 시대의 사람들 역시 이 곳에서 지친 삶을 위로 받고자 하는 것은 옛 사람들의 마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곳, 신트라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쉼'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 '쉼'과 '여유'가 있기에 이 마을의 분위기가 분주하지만, 편안해보였던 것이 아닐까. 여행하면서 보이는 것은 건물이지만,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우리는 이 평화로운 마을 어귀의 담장에 걸터 앉아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그렇게 아무 곳에나 편히 앉아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신트라가 주는 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은 특별했다.  



마을은 이제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로카곶(Cabo da Roca)으로 가기 위해 신트라 역에서 버스를 탔다. 이 버스는 신트라를 출발하여 로카곶을 지나 리스본 서편의 해변 휴양지, 까스까이스로 향한다. 그리고, 까스까이스에서는 리스본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있다. 


이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여 로카곶에서는 약 1시간 정도 머물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 곳이 너무 아름답다면, 몇 시간이라도 더 머물러도 전혀 아깝지 않을테지만, 그 시절 젊은 나에게는 유럽 여행은 어쩌면 다시 못 올 인생의 단 한 번 기회라 여겨졌고, 그래서 더 많은 곳을 보기 위해 그만큼 바삐 움직여야 했었다. 


단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더 일찍, 더 빨리 움직이고, 그렇게 단지 보는 것이 목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런 바쁜 여행을 버렸다. 


어느 노천의 카페에 앉아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의 향에 감동하고, 공원의 푸른 잔디밭에 누워 따사로운 햇살에 행복감을 느끼고, 아무런 생각 없이 유럽의 골목길을 걸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때론, 어느 한 곳이 좋아 그 곳에 계속 머무르기도 하는... 그래봐야 1주일 남짓의 휴가철 단 한 번 뿐인 여행이겠지만, 나는 최대한 느리게, 그리고 깊숙하게 그 도시에 빠져드는 여행이 좋다.  아무튼, 그 땐 지금보다 더 어렸기에, 지금보다 에너지도 넘치고, 호기심도 많았던 나이였다.


신트라를 출발한 버스는 약 30분 만에 로카곶에 도착했다.  로카곶은 유럽 대륙의 최서단 땅끝이다.  그 곳에 도착하면, "이 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라는 포르투갈의 시인 카몽이스의 시구가 새겨진 비석을 보게 된다. 그 비석의 뒤편으로 언덕 위 하얀 등대가 있고, 그 너머로 어디선가 세찬 바람과 함께 차가운 파도 소리가 들려 온다. 



이 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대서양, 포르투갈의 전성기였던 대항해시대, 신대륙을 향해 떠났던 도전과 모험의 바다. 그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 땅이 끝나고, 지금 나는 그 끝에 서 있다. 


그 끝에서 펼쳐지는 이 장엄한 풍경 앞에 나는 또 한 번 가슴의 쿵쾅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끝은 곧 시작이라는 말. 그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이 곳에서 만큼은 누군가의 경험이자 역사였다.


거친 파도와 바람이 밀려오는 이 곳, 로카곶에서 그렇게 끝은 곧 시작이었다. 그 시작의 바다는 거센 풍랑과 풍파로 인간의 도전에 저항했고, 모험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은 끝끝내 그 거센 풍랑과 풍파를 이겨내고, 대서양을 정복했다. 그 정복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한 때, 스페인과 함께 세계의 지배자로 역사에 기록되기도 했었다. 


지금은 옛일이 되어 버린 포르투갈의 황금시대.  로카곶에서 그 끝은 다시 시작이라는 진리 앞에 어쩌면, 포르투갈은 다음 시대의 전성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비록 유럽의 빈국으로 전락했을지라도 말이다.  



유럽 대륙 최서단 땅끝,  로카 곶


로카곶의 관광안내소에서는 얼마의 돈을 내면, 유럽 대륙의 최서단 땅끝에 도착했다는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별 것 아닌 종이 한 장이지만, 대한민국에서 17시간의 비행을 거쳐 다시 기차와 버스를 타고, 유럽 대륙의 최서단 땅끝, 대서양이 시작되는 그 곳에 도착했으니, 그 감격스런 마음에 이 증명서 한 장이 괜히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끝은 곧 시작이다" 라는 이 평범한 진리를 나는 이 곳, 로카곶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간다.  



2006.10

Cabo da Roca, Portugal

By Courb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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