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작품 해석하기

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by 윤현섭

만약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유료였다면, 나는 과연 돈을 내고 입장했을까? 미술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비추어 볼 때 그랬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도시가 가진 문화적 콘텐츠를 자국민과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개방하는 런던의 관대함이 없었다면 지금도 난 여전히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 트라팔가 광장에 위치한 내셔널 갤러리를 방문했다. 방문하기 전에 조사해 보니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등의 유명 작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입장료가 무료였다! 간단한 소지품 검사 후 내셔널 갤러리로 입장한 나는 순서 없이 돌아다녔다. 우선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안내에 따라 오른쪽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흐의 해바라기를 발견했고, 방안을 가득 채운 노란빛을 만날 수 있었다. 둥근 해바라기 위에 고흐만의 터치가 가득 담겨 있었고 관람객들은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여러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상황이 신기하긴 했지만, 사실 신기함을 뛰어넘는 감동이나 전율은 별로 없었다. 다른 미술관에 들렀을 때 느낀 감정과 비슷했고 어쩐지 너무 익숙했다.

해바라기를 뒤로 하고 얼마나 더 걸었을까? 어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서 마주친 그림을 보고 나는 한동안 멍한 기분이 들었다. 우선 엄청난 크기에 압도되었고, 너무나도 사실적인 묘사에 놀랐다. 가운데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눈을 가리고 손으로 뭔가를 더듬어 찾고 있고, 뒤쪽에서 부축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좌측으로는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기둥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서 있는 여인이 있었으며, 그 앞쪽으로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거기까지만 보았을 때는 상황 파악이 좀 어려웠지만, 오른편에 도끼를 들고 서 있는 남성을 보자 어떤 상황인지 명백하게 이해가 되었다. 어떤 여인의 처형 직전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로 1833년에 Paul Delaroche가 완성한 작품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영국의 여왕에 올랐지만 9일 만에 폐위되고 추후 사형에 처해진 실존 인물 Jane Grey의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었다. Jane Grey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준다는 여왕(bloody Mary)의 제안을 거절하고 성공회 교도로서 신념을 지키고 차분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처형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그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속 사형집행인의 표정은 직업인으로서의 의연함과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연민이 뒤섞여 있지만, 실제 집행 당시의 생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빨리 일을 해치우고 뭘 먹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이런 직업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자신에 대한 경멸감으로 가득 차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난 Jane Grey의 눈가리개 밑으로 드리워진 음영에서 농밀한 두려움을 느꼈다. 물론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의연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가리개 밑의 음영은 죽음을 앞둔 인간의 감정을 품어내고 있었고,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저 정도 상황까지 내몰리면 인간은 의연한 듯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미 개종에 대해 수차례 거부 의사를 밝혔고 주위 사람들이 그런 기개에 감복하여 그녀를 칭송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가려지고 손으로 자기가 죽을 곳을 더듬는 순간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비밀인 것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의식적으로 막고 살아온 감정이 한꺼번에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동안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 Sir 존손 갤러리, 코톨드 갤러리, 바비칸 특별전 등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마크 로스코, 프란시스 베이컨 등의 작품을 보고 또 한 번 큰 전율을 느꼈다. 누구나 무지한 것에 대한 약점이 있고, 보통의 사람들은 그 약점을 무관심이라는 장막으로 가려 버린다. 내가 무관심하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만남을 계기로 미술, 문학, 음악 등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모든 예술 작품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다.

KakaoTalk_20230907_124654735.jpg 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 Paul Delaroche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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