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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Nov 10. 2023

존경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하더라도, 많은 가정에 위인전집과 백과사전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자식들을 잘 키워보겠다는 부모의 욕망을 자극하는 아이템은 인기가 참 많은 것 같다. 당시 우리 엄마도 나와 동생을 잘 키우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는지, 전래동화나 위인전집 같은 책이 거실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상한 신념(독점욕?)에 따라 TV는 거실이 아닌 안방에 배치되었다. 나는 TV를 무척 좋아했으나, 늦은 밤 아버지가 있는 안방까지 들어가 여명의 눈동자를 시청할 배짱은 없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난 어쩔 수 없이 책과 친해졌다.

 위인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특별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전혀 흠결이 없고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으며, 결국 시련을 딛고 추구하는 바를 이뤘다. 그리고 저자는 그런 위인들의 삶을 어린 나에게 은근히 강요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누구누구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다짐했지만, 어쩐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평범한 나에게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내게는 목숨을 바쳐가며 애국하는 용기뿐 아니라, 추운 날 얼음을 깨고 냉수마찰을 시도하는 기개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발표해 보라고 할 때도 '제발 나는 시키지 않았으면'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딱히 없으니까)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분을 운 좋게 만나게 되었다. 바로 2학년 때 담임 장인수 선생님이다. 무려 25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난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새 학기 첫날, 교실에는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설렘과 앞으로 펼쳐질 강행군의 부담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친구들은 제각각 다른 생각을 했지만, 담임이 누구냐는 건 모두의 관심사였다. 요즘 우리 둘째가 한창 연주하는 멜로디(소녀의 기도)의 조례 시작종이 울리고, 누군가 교실문을 열고 절뚝절뚝 걸어 들어왔다.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덕에 남자의 큰 얼굴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교탁 앞에 서서 우리를 쓱! 훑어보고는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강민수! 네.", "권혁진! 네." 가나다 순의 이름을 모두 부르고, 그가 꺼낸 첫마디는 내 예상과는 완벽하게 다른 내용이었다.


"난 너희들이 어느 대학으로 진학하던지 간에 전혀 관심이 없다."


 '썅! 망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다. 그리고 반 아이들의 진학에 대해 저런 무책임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고3보다도 더 중요한 시기는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간단한 공지사항 몇 개를 말씀하셨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간절히 원하는 대학이 한 발 멀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선생님에 대한 불만은 계속 이어졌다. 첫 사회 수업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주 부정적인 첫인상과는 다르게 선생님의 수업은 너무 재밌었다. 오죽하면 국영수 시간에 엎드려 자는 애들조차도 사회 시간만큼은 똘망똘망했다. (맞을까 봐 무서워서 그랬을 수도)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은 SNU 출신이었다. 가끔 수능 모의고사를 치를 때마다, 선생님은 하라는 감독은 안 하고 우리와 같이 문제를 풀곤 했다. 채점 후 만점에 가까운 언어영역 시험지를 무심하게 교탁에 내려놓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단칼에 바위를 베어버린 무림 고수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무기를 집어넣듯이.

 그러나 지적 능력 보다도 선생님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 건, 바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애정이었다. 가출해서 목포까지 도망간 이근영이를 채포해서 돌아온 일, 가정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살뜰히 챙긴 일, 지금도 만나면 배꼽 잡고 웃는 출석부 위조 사건까지 고2 시절의 에피소드는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나 역시 친구와의 관계로 힘들어할 때, 선생님께서 가교 역할을 해주신 기억이 난다. 그때 나에게 써주신 편지는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좀 더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으로 시작하는 내용이다. 말 그대로 장인수호에 올라탄 우리들은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고3이라는 항구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지금까지 선생님과의 만남을 이어가는 걸 보면, 다른 친구들 역시 어린 시절의 나와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참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 언젠가 스승의 날 모임에서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97년은 내 교직 생활에서 가장 즐거운 한 해였다. 원형 탈모가 생긴 것만 빼고."

 이렇게 고마운 선생님께서 올해 퇴직을 결정하셨다. 선생님이 현장에서 떠난다니 너무 아쉬웠고,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총무의 지휘에 따라 퇴임식을 준비했다. 퇴임식에 참석하신 선생님은 우리가 마련한 자리를 무엇보다 고마워하며, 길고 정성스러운 퇴임사를 낭독하셨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어 후련하다고 하셨지만, 중간중간 울컥하는 모습을 보면 분명 선생님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쏟아내고 퇴장하는 선수를 보고 있는 나 역시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건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스승의 은혜를 합창하는 애들 중에 태반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으니까. (나이 먹고 주책이야! 화음 넣지마!)

 문화마다 사람마다 존경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영화 'a beautiful mind'에 등장하는 존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쳐버린 존 내쉬에게 경의를 표하며, 프린스턴의 석학들이 자신의 만년필을 기꺼이 내놓는 장면이다. 나도 선생님을 생각하면 만년필을 열개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별로 필요 없으실 것 같아 이렇게 글로 남기고자 한다. 아내와 찾아갈 때면, 항상 데레사라며 본명을 불러주시는 장인수 선생님.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존경의 마음이지만, 그래도 수줍게 표현해 본다. "선생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구보다 존경합니다."


퇴직에 즈음하여 한마디 남긴다. (by 장인수)

내일의 나는 오늘까지의 나와 다르지 않을 거다.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지난한 몸짓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하며 지낼 거다.

너희들의 축하, 그대로 받아 한껏 행복했다.^^

오랜 세월 옆자리를 내어주고 많은 걸 함께 해준 너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고맙다!

이왕이면 한 30년쯤 더 같이 가자! (미안!^^)

세상 일이란 게 뜻한 바대로 다 갈 수 없기 마련임을 알고 인정하자.

그래야 지나친 욕심을 내지 않고 크게 흔들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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