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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Nov 08. 2023

진심

The art of breakup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The art of breakup(14화 참조)의 저자 박린입니다. 우선 미천한 저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와주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처음 출판사에서 저에게 강연을 요청했을 때 조금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극작가로 15년 넘게 활동하는 동안 어떤 곳에서도 저를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작품 몇 개는 나름 흥행에 성공했는데도 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여과 없이 솔직하게 써 내려간 얇은 책이 저에게 이런 명성을 가져다 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가 출판사 측에 요청한 건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가면을 쓰고 강연을 진행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여러분 중에는 제 얼굴을 꽤나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극작가의 삶과 소설가의 삶을 철저히 구분하고 싶습니다. 많은 연예인들이 부캐를 만드는 것처럼요. 박린이라는 이름도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제 양옆에 앉아 일하는 동료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빌렸을 뿐이지요. 이렇게까지 설명드렸는데도 제 가면이 못 마땅하신가요? 여러분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으시다면, 고백성사를 떠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공간이 완벽하게 익명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영화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분명 구멍이 숭숭 뚫린 나무판자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아! 지금 다니고 계신 성당은 고해소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고요? 혹시 그곳에서는 글로써 죄를 고백한다는 말씀인가요? 죄를 고백하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차단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겁니다. 사제들은 이런저런 일로 무척 바쁘고, 죄를 고해야 하는 사람은 너무 많기 때문이죠.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과연 의식의 밑바닥까지 솔직해질 수 있는지. 아마도 불가능할 겁니다. 그저 여러분은 '누군가 알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죄'만 고백하겠지요. 신과 직접 연결된 사제에게조차 말이죠. 가면은 이런 고민을 말끔하게 해소시켜 주는 무대장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철저한 익명성이 보장된 인간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무한히 가식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무한히 솔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약속드리겠습니다. 무한히 솔직해질 예정이라는 것을요. 서론이 너무 길었군요. 지금부터 최근 제가 겪은 일을 여러분들께 고백하고자 합니다.

 사실 그날은 공치나 싶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죠. 주말에 보자는 제안을 거절하는 건 꽤 번거로운 일이었습니다. 일부러 피한다는 인상을 주면 곤란하니까요. 저는 우선 그녀와의 약속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적절한 이유를 동원하여, 어쩔 수 없이 약속을 깨야하는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제 설명이 꽤 설득력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별 다른 반응 없이 받아들이더군요.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문자가 왔습니다. '우리는 서로 타이밍이 안 맞는 것 같아' 그때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제가 만든 시나리오의 결말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녀를 향한 감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뀐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한창 고조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카페에서 만난 그녀가 고백할 게 있다더군요. 지금까지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 저에게는 촉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녀가 할 얘기가 별로 유쾌한 내용은 아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제 예상대로 그녀가 꺼낸 얘기는 전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처음 겪는 일이었죠. 그녀가 고백한 나이는 저보다 세 살이 많았고, 심지어 유부녀였습니다. 저는 황당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저를 오빠라고 부르던 그녀가 갑자기 나이 들어 보였습니다. 제 나이 정도 되면, 돌싱을 만나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부녀라니요. 그건 얘기가 다릅니다. 이미 남편과의 관계가 파탄 났더라도, 저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죠. 한창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중이라고 판단해서 저에게 고백한 걸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관계의 다음 장을 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녀와의 만남에서 미묘한 불편함을 느끼던 중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우선 그녀는 데이트 비용을 전혀 부담하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인 저의 정체성은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인데도 말입니다. 처음 몇 번은 그러려니 했습니다. 제 또래만 하더라도,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거든요.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만남에서 조차 그녀는 단 한 번도 먼저 계산하려는 의도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빈말로라도요. 두 번째로 그녀의 옷차림이 거슬렸습니다. 저는 몸에 맞춘 깔끔한 정장 스타일을 선호하는데, 그녀는 항상 히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몸매가 꽤 괜찮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헐렁한 옷이 잘 어울리긴 했지만, 너무 자유분방해 보이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렇게 자유분방하니까 남편이 있는데도 연예를 할 수 있는 거라고요? 하하하. 친절한 분석 감사 드립니다. 세 번째로 그녀는 못 말리는 골초였습니다. 언젠가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창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고 싶다더군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녀가 흡연자인지 몰랐기 때문에 의아했지만, 전 쿨하게 그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하의 날씨에 창문을 열고 연달아 세 대를 피우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수족냉증이 있는 저로써는 꽤 불편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유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녀가 단점으로만 가득 찬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분명 제가 좋아할 만한 요소도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비슷한 성적 취향?

 아무튼 저는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만나는 시간을 줄이며, 감정의 수위를 서서히 낮춰 나갔습니다. 그녀가 먼저 속인 건데 뭘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냐고요? 상처 입은 동물을 얕잡아 봐선 곤란합니다. 특히 그녀처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요. 지금까지의 제 경험으로만 비추어 봐도, 주도권을 가지고 헤어진 경우 꼭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직장으로 찾아온다던지, 저의 약점을 폭로하겠다던지 하는 일 말입니다. 저는 살아있는 개구리를 삶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했습니다. 성실한 농부가 되어, 틈날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 논리라는 씨앗을 심었지요. 저와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품은 씨앗 말입니다. 저로서는 그녀가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 뿌려진 씨앗은 쑥쑥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연출한 '타이밍의 미묘한 엇갈림'을 양분 삼아서 말이죠. 몇 개월 동안 이어진 지난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타이밍이 안 맞는 것 같다'는 문자는 마지막 바퀴를 알리는 기수가 흔들어대는 빨간 깃발처럼 보였습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에 그녀로부터 다른 문자가 왔습니다. 언제 시간이 되냐고 말이지요. 이상하게 흥분이 되었지만, 침착하게 화요일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당일에 바로 만나자는 건 조급한 제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화요일에 만난 그녀는 평소와 똑같았습니다. 헐렁한 옷차림에 부스스한 머리. 한 가지 다른 점은 저를 기다리는 곳에서 담배를 물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원래 오픈된 공간에서는 누가 볼까 봐 잘 피우지 않았는데, 이건 분명히 좋은 신호였습니다. 하지만 '빨리 이별을 고해 주면 좋겠다'는 제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헤어질 때까지도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평소의 만남처럼 일상적인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전 갈증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부득불 다음번 만남을 기약해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볼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 집 앞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남편을 만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실망감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요? 하루종일 제가 기다렸던 말을 결국 그녀가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오빠.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계속 엇갈리는 걸 보면, 우린 여기까진 것 같아."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누나. 저보다 세 살 많으시잖아요.'였습니다. 하지만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우선 그녀에게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당신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해 미안하다. 면목이 없다고 말이죠. 그러자 그녀는 왜 항상 내 말이 옳다고 인정하는 거냐며 따졌습니다. 저는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당신이 항상 논리적으로 옳은 말을 하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없다며 넘어갔습니다. 잠깐동안 차 안은 적막에 휩싸였습니다. 누구라도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깨야하는 상황이었죠. 저는 약간은 쉰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만 만나자는 건 아예 다시는 보지 말자는 의미냐고요. 무엇보다 그걸 원하면서 무슨 헛소리냐고요? 제발 초 좀 치지 마십시오. 저는 비추입니다만, 만약 그러고 싶으면 여러분이 직접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친구로 지내는 건 상관없지만, 이런 감정으로 만날 수 있겠냐고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저에게 '이런 감정'이라고 할만한 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저 침묵으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이런 깊은 감정으로는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분명 그녀는 제가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걸 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저는 그런 밀당에 장단을 맞추고 싶은 생각이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무척 배가 고팠습니다. 그녀와의 이야기를 빨리 마무리하려고, 식사를 건너뛴 채 바로 카페로 들어갔거든요. 약간의 공백 이후 어서 집에 들어가 쉬라는 말을 세 번째 반복할 때쯤, 그녀가 차에서 내렸습니다. 이렇다 할 작별인사도 없이 말입니다. 저는 그녀가 공동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차 안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녀가 돌아봤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가버린 걸 알면 곤란하니까요. 제 시야에서 그녀가 완벽하게 사라진 걸 확인하고,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FM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음악을 들으니 영화 속 명대사가 떠오르더군요. "거 이별하기 딱 좋은 날씨네."

 이렇게 또 하나의 인연이 흘러갔습니다. 기분이 어떠냐고요? 저에게는 꽤 빈번한 경험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녀와 이별하기 직전까지 감정을 많이 덜어내서 괜찮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그녀를 만날 일이 없겠죠. 그녀가 주도적으로 이별을 고한 이상, 귀찮은 일도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실제로 그날 이후 일주일이나 흘렀지만, 오늘까지도 아무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타이밍의 미묘한 엇갈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요? 여러분이 원한다면 할 수도 있습니다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 모든 관계는 제각각 처해진 상황이 미묘하게 다를뿐더러, 지금 여기에서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방법은 영원히 못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떠들었더니 목이 마르네요. 여러분도 십 분만 쉬었다 가시죠. 저는 화장실에 가서 물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마시면 된다고요? 물을 마시려면, 일단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면 먼저 벗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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