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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Nov 06. 2023

春樹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春樹. 대한민국에서 중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낭독하게 되는 ''의 김춘수(金春洙) 시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저 단어는 최근 신작을 발표한 '村上春樹'를 의미한다. 한국어로는 촌상춘수, 일본어로 음독하면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이름을 볼 때마다, 그걸 만든 사람의 노고가 느껴진다. 추운 겨울(1월)에 태어난 아이가 봄나무처럼 싱그럽게 자라길 바랐을까? 전업 소설가로서 따로 필명을 쓰지 않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의 이름에 꽤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알 수 없지만)     

 누군가 내 앞에서 먼저 낚아채간 그 책을 예약까지 해서 지난주에 받게 되었다. 그리고 700쪽이 넘는 꽤 묵직한 분량을 2주에 걸쳐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1부는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현실 속 주인공은 문예 시상식에서 만난 한 살 어린 소녀와의 만남을 회상하고, 비현실 속 주인공은 상상으로 만든 도시에서 만난 소녀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운 좋게 인생의 아주 이른 시기에 완벽한 상대를 만난다. 소녀 역시 시간이 좀 걸리지만 주인공에게 모든 걸 주고 싶다고 고백한다. 주인공과 소녀는 시상품으로 받은 만년필을 이용하여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주기적으로 만나며 둘만의 공간(도시)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소녀는 자취를 감추고, 주인공은 혼란에 빠진다. 도대체 무엇이 소녀를 데리고 가버렸을까.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주인공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소녀를 만나려면 그 도시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높은 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로 들어간 주인공은 소녀를 만난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그림자를 포기하고 눈에 상처를 낸 채로. 도시의 소녀는 현실의 소녀와 동일하다. 다만 도시의 주인공은 현실에서 흐른 시간을 그대로 안고 넘어온 중년의 남자다. 도시 안에서 소녀는 도서관에서 일하고, 주인공의 역할은 '꿈 읽는 자'이다. 소녀가 일하는 도서관에는 책이라고 할만한 게 전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고 있는 알 형태의 꿈만 있을 뿐. 주인공은 저녁이 되면 도서관으로 향해 소녀가 건네주는 약초즙을 마시고 꿈을 읽어나간다. 하루에 두세 개씩 매일매일. 도시의 주인공은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간절히 그리던 소녀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매일 몇 시간씩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집으로 바래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 할지라도)

 도시를 지키는 문지기의 숙소에서 죽어가던 그림자의 탈출을 도우며, 이야기는 2부로 넘어온다. 도시로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나올 때도 친절한 설명은 없다. 나무에서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 그렇게 툭 하고 주인공은 현실 속으로 추락한다. 직장을 관두고 무위의 삶을 영위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문득 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출판 유통업에서 오랜 기간 일한 경력을 바탕으로 산골마을의 도서관장으로 채용된다. 이야기의 큰 축을 담당하는 전 도서관장 고야스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싶다. 그걸 언급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보면 '상실의 시대'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처럼 비현실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경우가 있고, '1Q84'처럼 대놓고 비현실적인 작품도 있다. 약간의 힌트를 곁들이자면, 이번 작품은 후자에 가깝다.

 주인공은 산골 마을 도서관장으로 마주하게 되는 여러 가지 업무를 (고야스의 도움을 받아) 처리한다. 가을에서 이듬해의 봄까지 약 6개월에 걸쳐서. 대도시에서 잔뼈가 굵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업무라고 해봤자 소소한 일뿐이지만,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한다. 고야스가 남긴 유지를 받들며, 도서관을 내실 있게 키워나가기 위해. 하지만 일상이 견고하게 자리 잡는 것과는 별개로 소녀에 대한 감정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처음 만난 날로부터 3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주인공의 마음속에는 현실과 도시에서 만난 소녀가 살아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도시에서 튕겨져 나온 걸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우연히 만난 커피숍 사장과의 관계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커피숍 사장이 관념적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을 두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주인공의 방어적인 마음이 그런 식으로 투영된 게 아닐까.

 도서관에 매일 찾아오는 노란 잠수함 잠바 소년(AKA 노잠잠 소년)을 등장시키며, 이야기는 끝으로 치닫는다. 그는 한번 본 책의 내용을 그대로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 게다가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를 모아 순식간에 재구성할 수 있는 비범한 인물이다. 평소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노잠잠 소년은 어느 날 우연히 들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도시를 그린 지도를 전달한다. 비록 주인공의 관념 속에서 탄생한 도시지만, 그 지도는 놀랍도록 정교했다. 이후 노잠잠 소년이 도시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과 도시에서 다시 만난 주인공과의 이야기는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남겨 두고자 한다.

 책을 읽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설정의 모호함이 조금 지나치다는 것이다. 산골마을과 도시로 대비시킨 현실과 비현실을 마지막에 가서 '어느 쪽이 현실인지 모른다'는 식이니 말이다. (작가가 의도한 거라면 할 말이 없지만) 또한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결론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기-승-전-결'을 갖춘 예술작품에 익숙한 내게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 애독하는 브런치 작가님의 글처럼, 나 역시 '중년이 되고 나니 결론과 상관없이 과정에서 만나는 것들을 즐긴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2주에 걸친 기간 동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40년 동안 묵혀 놓은 글을 다시 꺼내 매만지는 과정이 너무나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비현실은 자신만의 휴식처일 수 있다. 작가처럼 가상의 도시를 만들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기 힘든 심정을 고백하는 것도 가능하다. 복잡한 생활에서 벗어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는 가상의 공간. 그곳에서 인간은 위로받고, 다시 한번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이 글에 매칭할 사진을 찾다가 우연히 노란 잠수함을 발견했다. 작년 봄, 여주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한국 작가였는데, 전시된 그의 모든 그림에는 어디엔가 노란 잠수함이 새겨져 있었다. 하루키에게 영감을 준 것처럼, 비틀스는 그 작가에게도 비슷한 영감을 준 모양이다. 작년 5월만 하더라도 미술에 큰 관심이 없던 시점이라, 일(대형로펌 파트너 변호사)과 갤러리를 동시에 운영하는 친구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돈 많은 전문직의 고상한 취미활동 정도로 생각했지 싶다. 하지만 그건 버거운 현실에서 가끔은 벗어나고 싶은 친구가 공들여 만든 도시가 아닐까? 높은 벽으로 둘러싸였지만,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 달린 색채감 넘치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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