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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Nov 04. 2023

애국

반짝반짝 작은별

 '육, 오, 사, 삼, 이, 일' 이걸 보고 생각나는 것은? 그렇다. 타임스퀘어에 가득 모인 사람들이 외치는 새해 카운트다운이 떠오르면, 당신은 정상이다. 싱글 때는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되뇌는 숫자는 그런 희망찬 내일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지금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학년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거침이 없다. 아이들을 조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터미네이터 마저 자리를 비웠으니, 오죽하겠는가? 분명 환청이겠지만, 벌써 인터폰이 울리는 것 같다. 아이들이 등장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건만. 평온한 아랫집의 분노 게이지가 차곡차곡 쌓이는 게 느껴진. "얘들아 우리 집은 너네 집이랑 달라. 바닥에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다고!" 기껏 근엄한 표정을 지어가며 일갈했건만, 아무도 듣질 않는다. 오히려 삼학년이 달려와 나에게 헤드락을 건다. "구인남 이모부! 이모 없으니까  좋아요. 헤헷." 그래. (이모부 이름도 잘 모르는) 삼학년아! 나도 집에 아내가 없으니까 너무 좋단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동서는 28인치짜리 캐리어(얼마나 묵으려고?)만 남기고 떠나 버렸다. "형님! 고마워요. 다음에는 처형하고 애들만 우리 집으로 보내고, 혼자 맘껏 즐기세요." 하지만 동서는 알까? 터미네이터는 (기계 주제에) 무엇보다 본인의 둥지를 벗어나길 싫어한다는 것을. 난 비장의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얌전히 앉아서 유튜브 보면 아빠(이모부)가 오천 원씩 줄게!" 순식간에 조용해진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는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인 건가? '잦은 유튜브 시청이 아이의 인지능력 발달에 미치는 악영향' 따위는 개나 줘버리자. 그걸 쓴 사람도 이런 상황에 놓이면, 나처럼 행동할거라 확신한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이러다 제 명에 못 죽는다.

 어제 아내는 조카들이 처가로 갈 거라고 했다. 확실하다. 꼼꼼한 내가 그런 첩보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 만약 아이들이 이쪽으로 오는 걸 알았다면, 난 살아있는 누군가를 조문하러 지방에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지금 내 앞에 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난 똘똘한 4학년에게 물었다. "아인아. 아까 할머니 집에 지 않았니?" 4학년이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로 대답한다. "아까 할머니네 갔는데요. 할머니가 풍이 심하니까 이모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이제 모든 의문이 풀렸다. 아파트에 사는 장모님에게 갑자기 바람을 부리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feat. 아이올로스) 가끔 우리 가족이 찾아뵐 때면, 장모님은 환한 얼굴로 아이들을 맞이하신다. "어유! 우리 강아지들. 성당은 갔다 왔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깍!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건 바로 안방으로 들어간 장모님께서 대놓고 문을 잠그는 소리다. (소리 안 나게 잠그는 법을 모르시는 걸까?) 이해한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도 힘든데. 이미 자녀 셋을 키워낸 장모님은 할 만큼 했다. 그렇다고 없는 외풍까지 말씀하시는 건 좀...

 아이들은 6, 4, 2, 5, 3, 2, 1 순으로 앉아 있다. 미가 통하는 애들끼리 모인 모양이다. 응? 잠깐만. 그런데 왜 2가 이지? 어느새 중2 큰아들이 지 방에서 기어 나와 일학년과 붙어 있다. 97.8킬로 대 20킬로. 무려 다섯 배 가까운 차이지만, 정신 연령은 비슷해 보인다. 아내와 처제의 얼굴이 닮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의 외모는 서로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이대로 밖에 내놓는다면, 생일 파티에 모인 친구들처럼 보이지 않을까? 처남이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다. 만약 걔까지 결혼했다면, 지금 앉아 있는 애들 사이로 몇 명이 더 추가되었을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군가와 친해져 서로의 가족에 대해 얘기하게 되면, 보통 상대방은 이런 말을 한다. "현섭씨 대단해. 어쩌다가 셋을 낳았어. 애국자네." 하지만 상대방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인간은 실수에서 배우는 것보다, 실수를 반복할 확률이 훨씬 높은 동물이라는 사실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처제가 동서를 처음 데리고 온 날, 장모님은 간절함을 담아 제안했다. 너희들은 아직 어리니까 애 낳는 건 좀 미루고 신혼을 즐기라고. 육아에 치여 생긴 큰딸의 다크서클을 보며, 늦둥이 막내딸만큼은 살리고 싶은 심정이었겠지. 하지만 난 분명히 들었다. 바닥에서 꼬물거리는 우리 애들을 보며 처제가 조용히 동서에게 건넨 그 말을. "우리도 셋 낳자" 당시 난 귀를 의심했다. 이런 처참한 광경 속에서 어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 둘째를 가져가) 결과적으로 처제는 네 명을 낳았으니 목표(?)를 초과 달성한 셈이다. 그것도 연연연년생으로. 화끈해서 좋지만, 이 정도면 제왕절개 중독을 의심해 봐야 다. 발레리나 시절 아다지오 달인이었다고 들었는데, 애 낳는 건 왜 비바체냐고.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산아제한 포스터를 보며 자란 나는 결혼 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애를 많이 낳는 사람은 부자 아니면 바보지." 너무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지만, 난 자는 아니니까 분명 바보다. 복작복작한 걸 나름 즐기는 바보. 불과(?) 10년 전만 도,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은 혼자 있으면 오히려 심심하다. 간혹 아내가 들통에 뭐라도 끓이기 시작하면, 여행이라도 가나 싶어 불안하다. 이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가족들이 떠드는 소리에 익숙해진 귀가 허전함을 느끼는 것뿐이다. (이래서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나?)

 손주를 보며 웃음 짓는 건 단지 아이들이 좋아서 그럴까? 아니다. 그것보다도 본인이 직접 자녀를 키울 때, 즉 가장 젊고 찬란했던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삶의 끝자락까지 가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어쩌면 나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구간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를 둘러싼 가족들이 삶을 좀 더 풍성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줄 때,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즐기자. 이번 생이 바로 크론쇼가 필립에게 건네준 페르시아 양탄자일 수도 있으니까. (얘들아! 우리 너무 자주 만나진 말자. 인터폰 울리잖아! 그리고 처제야! 제발 스트레칭한답시고 땅바닥에서 다리 찢어서 소파 위로 올리지 좀 마. 보고 있는 내 가랑이가 다 아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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