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현섭 Nov 02. 2023

등대

뜨거운 안녕

 가끔, 아주 가끔은 이럴 때가 있어. 마음속에 온통 먹구름이 낀 것 같은 막막한 느낌이 드는 날.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그런 기분이 들더라. 머리맡에 놓아둔 나무 십자가를 꼭 쥐고 심호흡을 해봤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네가 남겨주고 간 유일한 물건도 이젠 소용없는 걸까. 너에게로 이어지는 통로가 영영 막혀버린 것 같아 너무 참담했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왔어. 역까지 걸어가는 길 위로 여기저기 낙엽이 휘날리고 있었어. 나처럼 갈피를 못 잡고 있더라. 그 움직임을 보고 있자, 생명의 의무를 끝낸 아쉬움이 절로 느껴졌어. 지하철로 들어가서 휴대폰을 확인하니까 열 통이 넘는 전화가 와 있더라. 모두 회사 번호로.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오늘 같은 날은 너를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니까.

 매일 타는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지하철에 올랐어. 한 30분쯤 이동하니까 공항에 도착하더라. 난 곧장 항공사 데스크로 걸어가서 가장 빠른 티켓을 달라고 말했어. 앉아 있던 직원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어보기 시작했지. 11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나를 뚫어지게 말이야. 네가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난 빨래통에서 다시 꺼낸 구겨진 흰셔츠를 입고 있었어. 외투도 걸치지 않고. 다행히 직원이 앉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겠지만, 얇은 슬리퍼까지 신고있었지. 그것도 맨발인 채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너무 지긋지긋해. 이제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널 확실하게 도려내 버리고 싶어. 진심이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제주에 도착해 보니, 정오가 막 지난 시간이었어. 들뜬 표정으로 수화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어.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 서서 한참을 생각했어. 널 잊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가야 널 놓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어서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지. 버스는 제주 시내를 천천히 훑으며 달리기 시작했어. 얼마나 달렸을까. 하나 둘 사람들이 내리더니, 얼마가지 않아 큰 버스 안에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어. 네가 없는 어느 곳에서도 결국 난 혼자일 수밖에 없는 걸까. 머리 위에 달린 큰 거울로 날 흘끔흘끔 살피는 기사의 시선이 느껴졌어. "손님. 이번이 종착역이에요." 기사의 말을 듣고 내려보니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어. 내 기분과는 전혀 다른 맑고 파란색의 탁 트인 광경이. 확실히 제주의 바람은 도시와는 다른 느낌이더라. 꽤 강한 바람인데도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았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내가 포근함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항상 환한 얼굴로 뛰어와 안기던  쏙 빼닮은 포근함.

 난 천천히 모래 위에 걸터앉아 생각을 덜어내기 시작했어. 너에 대한 생각을 말이야.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더라. 네가 선물한 기억이 머릿속 어딘가에 문신처럼 남아 있어서.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여기가 어딘지 알게 되었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표지판을 보고 말이야. 표선 해수욕장. 너를 잊으려고 제주에 온 건데, 오히려 바다를 좋아했던 네가  생각나 걸 보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까부터 근처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계속 곁눈질하고 있어. 한참 전에 지나가는 걸 언뜻 본 것 같아. 당연히 내가 너무 이상해 보이겠지. 어떤 사람이 가을 바닷가에 이렇게 몇 시간씩 앉아 있겠어. 그것도 누군가를 흘려보내며 말이야. "민박 찾아요?"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가 말을 걸었는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어. 마치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이질감이 느껴질 만큼. 지금 난 현실과 비현실 어느 쪽에 놓여 있는 걸까. 너에게 내린 닻을 회수하고 싶은 사람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나일까. 특별히 묵을 곳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할머니가 내미는 명함을 받았어. 언젠가 네가 그랬잖아. 다른 사람이 주는 건 그게 무엇이든 받아두라고. 누군가 너를 대신해서 꼼꼼하지 못 한 나를 챙겨주는 거라고. 고마워.

 어느새 저녁이 되었어. 우물 위에 가림막을 덮어두듯 바다 위로 어두운 장막이 내려 앉았어. 이제 관객 없는 연극은 끝났다고 말하는 것 같아. 내 뒤에서 흘러나오는 롯데리아 매장의 불빛만 없었더라면 좀 더 근사 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뭐. 문득 하늘을 보니, 내 마음속 먹구름과 비슷한 풍경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 광활한 대양을 쓸쓸히 가로지르며 눈물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언제쯤 본색을 드러낼까. 툭! 치면 울 것 같은 눈망울을 가진 어린아이 같아. 이제 참는 건 그만하고 어서 터트려 주었으면.

 아까부터 뭔가 반짝인다 싶었는데, 등대가 보여. 아주 멀리 있어서 희미하지만 하얀색인 것 같아. 그저 먼 바다를 향해 눈을 깜빡이는 외로운 존재인 줄 알았는데, 맞은편에 또 다른 등대가 있어. 그리고 서로를 가로막은 바다에선 끊임없이 파도가 치고 있어. 파고에 따라 생기고 금방 사라지는 하얀 포말이 마치 운명의 손톱 같아. 수천 개의 손톱을 건너 등대는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닿을 수 없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초록색 눈만 깜빡이는 게 너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십자가를 바라볼게. 너의 부재로 인해 끝없이 신음하는 나를 달래준 고마운 존재지만, 이젠 필요 없어. 난 앞으로 나아갈 거니까. 야구 동아리에서 만난 네가 처음 말을 건넸던 그날처럼 힘차게 던질 거야. 내가 던진 공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날아와 가슴에 꽂힌 그 말이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나. "혹시 선출이에요? 유니폼이 참 잘 어울려요." 파도 소리에 묻혀 무언가 가라앉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아. 마치 마지막 인사를 하듯 그저 살짝 떠올랐다가 어두운 심연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어. 당장은 어렵겠지만, 파도가 쌓아 올린 세월을 꿋꿋하게 견디며 언젠가 무엇보다 날카로워지길 바라. 너에게 내린 닻을 단번에 끊어버릴 만큼.

 후련하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어. 식욕을 느끼는 건, 삶의 바퀴를 앞으로 굴리겠다는 의지의 증거잖아. 지금부터 난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 있는 롯데리아로 걸어 들어갈 거야. 점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햄버거를 주문하고, 오로지 음식에만 집중할테지. 미안해. 서운하겠지만, 이젠 정말 너를 많이 덜어낸 것 같아. 그런데 어쩌지? 아까부터 내리는 차가운 비가 등대의 눈에서도 흘러내리고 있어. 초록색으로 뚝뚝. 다행히 내 얼굴은 피해간 것 같아. 지금 뺨을 타고 흐르고 있는 건 너무 뜨겁거든.

 

  


작가의 이전글 믿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