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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Nov 01. 2023

믿음

服事

 인간은 다양한 계기로 인해 종교와 가까워지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경로를 꼽자면, 특정 사건을 통해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경우다. 예를 들어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지인들의 경우, 다들 저마다의 사연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큰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거나, 아니면 깊은 감정의 수렁에서 빠져나왔다던가. 그들의 다양한 사연을 유심히 듣다 보면,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행복은 매우 주관적인 감정이다. 누군가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릴 때 더 행복하고, 다른 누군가는 정신적인 충만함을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비슷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유사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건 마치 감정의 교집합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태어나서 교육받고, 일하고,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삶의 갖가지 의무를 이행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언뜻 보면 지루할 수도 있지만, 평범한 삶의 가장 큰 장점은 이미 검증이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삶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 인생을 소비하며 내린 최적의 결론이 아닐까? 평범한 삶 속에는 묵직한 안정감이 들어있다. 그리고 시간이 쌓여야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깊이감도 함께 존재한다. 마치 매일 먹는 쌀밥처럼 밋밋하지만, 의외의 반찬(사건)을 만나는 즐거움이 인생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다. 언뜻 보면 그건 낚시와 많이 닮은 게 아닐까? 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물고기까지 덤으로 얻게 되는 행운의 연속. 이런 관점으로 바라볼 때, '모두가 무탈하길 기원한다.'는 말은, 그 상태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느끼며 감사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노잼 인생이 아니라)

 반면 불행은 평온한 일상에 생긴 작은 균열 사이로 그 부담스러운 얼굴을 내민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본적으로 인간은 타인에게 관심을 쏟는 동물이 아니다. 바로 옆에서 근무하는 동료가 어제 어떤 옷을 입고 왔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만약 기억한다면, 그건 당신이 매우 '사회화'된 인간이라는 뜻이다. (아니면 패션 쪽에 관심이 많거나) 이런 인간의 속성을 인정한다면, 다른 사람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고통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왜 더 중요한 문제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매우 가까운 사이인 경우, 불행을 깊이 공감하고 걱정하며 심지어 해결까지도 같이 고민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이례적인 관계에서나 가능한 얘기일 뿐, 보통 다른 사람의 불행은 머릿속에 입력과 동시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마치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쯤 되면, 절박한 인간은 무언가 의지할 곳을 찾게 된다.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을 고백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위로받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걸 느낀다.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그런 과정을 통해 수없이 되뇐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게 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저 시간이 흘러 또는 우연한 계기로 해결된 불행을 마치 절대자가 베풀어준 아량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종교와 가까워지는 또 다른 계기는 바로 독실한 집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출생과 동시에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는다.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아예 시작부터 박탈당하는 사례다. 성실한 신앙인 가운데 자녀들에게 다른 종교를 권하는 장면은 한 번도 보질 못 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을 뿐인데, 신앙심의 끝판왕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끝판왕은 바로 아내다.

 아내는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매우 깊었다. 국민학교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반주봉사를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결혼 전만 하더라도 우리가 명동성당에서 식을 올리는 것에 대해 별 다른 견은 없었다. (사전 교육을 받는 게 귀찮았을 뿐)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당연히 성당에서 결혼해야 되지 않겠냐는 얘기를 들으면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건 마치 '무엇보다 종교가 우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나일롱 신자인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먼저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종교와 관련해서는 조금 반항스러워도 괜찮다는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착실한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1/3호는 복사를 하고, 2호는 반주 및 해설을 한다. 게다가 아내는 새벽 반주 및 성물방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종합 선물세트가 따로 없다. (거기는 우리 가족 없으면 어떻게 돌아가는겨!)

 슬슬 날씨가 추워지면서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생겼다. 새벽 미사 복사를 서는 막내를 픽업하는 일이다. 성당이 집에서 가까우니 지금까지는 그냥 걸어 다니게 했지만, 겨울이 되면 어둡기도 하고 너무 추워서 막내 혼자 보낼 수가 없다. 새벽 5시쯤 일어나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쪽잠을 자다가 다시 데리러 가는 게 즐거울 리 없다. 그것도 3년 넘게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주 어릴 때야 엄마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 쳐도, 곧 6학년이 되는데도 아무런 불만 없이 나가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미사가 끝나고 복사실에서 하나씩 들고 오는 간식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이 막내의 가슴에 그토록 굳건한 믿음을 심어주었을까?

 내가 태어나고 할머니가 무심코 하신 말씀(가톨릭 신부가 되었으면 한다)에 엄마가 무척 발끈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엄마는 귀한 아들을 그런 험지로 몰아넣는 시어머니의 제안이 분명 못마땅했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이미 난 자격미달이다) '예비 신학생(AKA 예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복사 활동을 하는 아들들을 보면, 나도 젊은 시절의 엄마가 느낀 감정과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 혹시 먼 훗날 아들 중 누군가 신부가 되고 싶어 한다면, 난 무엇보다 먼저 그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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