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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Oct 30. 2023

콜럼버스의 달걀

 이건 분명히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뭐가 되었든 경쟁에선 일단 이겨야 하는 게 아닌가? 승자와 패자. 딱 한 글자만 달라 보이지만, 스스로 느끼는 감정과 타인의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다.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종목을 막론하고 프로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과 준우승의 상금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1위가 2위에 비하여 2~3배만 더 받아도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을 것 같다. 10배를 넘어 심지어는 2~30배까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엄청난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패배한 것도 서러운데 상금까지 차별하냐!) 하지만 지금 난 간절하게 준우승을 원한다. 게임 스코어 10대 9 상황(내가 9)이라면 가지고 있는 모든 집중력을 원기옥처럼 끌어 모아도 부족할 인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 어이가 없다. 맞은편에서 심각한 표정을 한 상대가 회심의 서브를 날린다. 연습 때도 참 받기 힘든 토마호크 서브다. 결과는 서브 엣지로 인한 게임 종료. 평소에 이런 결과라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 않았겠지만, 그 순간 제일 먼저 든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나의 간절한 기도에 하늘이 응답해 주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일부러 엉뚱한 스윙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근육기억이라 생각을 거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할뿐더러, 스포츠맨십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엣지라니, 그건 영락없는 운의 영역이 아닌가. 어두운 얼굴(흑인이니까)로 나에게 다가와 "so sorry"를 연발하는 제임스를 보며, 난 적당히 아쉬운 표정과 함께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인생은 돌발상황의 연속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제임스가 1등 상품인 꽃다발 대신 2등 상품 러버를 원한다는 게 아닌가. 그는 국내에 오래 체류한 외국인답게 유창한 한국어를 또박또박 구사했다. "나 는 꽃 싫 어 요. 최 근 걸프렌드랑 깨져서  꼴 도 보 기 싫 다 구 요. 러버 주세요." 본인이 우승자니까 원하는 걸 갖겠다는 논리였다. 만약 내가 1등이라면 저런 시도 없이 정해진 걸 그냥 받았을 텐데, 역시 외국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들은 본인이 원하는 걸 항상 정확히 얘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짧은 논의를 마친 운영진은 결국 제임스에게 2등 상품을 수여했다. 그리고 난 당초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꽃다발을 받게 되었다. 갑자기 마지막 포인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사 그게 엣지였더라도 몸을 날려 받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내 손에 있는 꽃다발은 '그만 멍 때리고 집에 가서 씻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다른 회원들은 "2등이 1등 상품을 받아서 참 좋겠어. 큭큭.", "한참 놀고 집에 가는 건데도 와이프가 열렬히 반기겠어." 라며, 내 속을 박박 긁어댔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는데, 문득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꽃다발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면 되지 않겠냐고. 집에 도착해서 아내에게 꽃다발을 내밀자, 아내는 눈부시게 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웬 꽃다발이야! 오늘 무슨 날인가? 아닌데. 10월은 뭐가 없는데. 국물 먹고 싶어서 그래? 말만 해." 난 급조한 스토리를 읊기 시작했다. "다음 달에 우리 결혼기념일 있잖아. 자고로 기념일이 지난 다음에 챙기는 건 말이 안 되지만, 먼저 챙기는 건 괜찮다는 속설(?)도 있고. 그래서 이렇게 서프라이즈로 준비했지. 맘에 들어?" 내 말을 들은 아내의 표정은 갑자기 차갑게 식어 버렸다. 이건 일이 꼬이고 있다는 신호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윤현섭씨! 어디서 약을 팔아? 결혼기념일은 11월 말인데 벌써 챙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혹시 결혼기념일을 한 달 넘게 착각해서 산거 아냐?" 아내는 검정 뿔테 안경을 똑바로 고쳐 쓰며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뜨거운 감자의 노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내 맘(의도)은 이게 아닌데.' 더 변명해 봤자 일만 커질 것 같아서, 난 노래 제목처럼 아내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럼 그렇지. 난 성당 갈 거니까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 그렇게 나의 시도는 보기 좋게 박살 났고, 다음 달에는 불필요한 꽃과 선물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게 생겼다. (결혼기념일은 왜 남편만 챙겨? 머리 팔아 시계줄 사는 그 소설 못 봤어?)

 아내가 끓여놓고 간 얼갈이 배춧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후루룩 먹는데, 갑자기 피아노 위에 놓인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엔가 홀리 듯 꽃다발을 가져온 나는, 오른손에 숟가락을 그대로 든 채 꽃다발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유 없이 상콤한 기분이 되었다. 왜 그럴까? 지금까지 난 꽃다발 선물만큼 쓸모없는 건 찾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는데, 지금 보고 있는 것만은 달랐다. 하얀 포장지 속에 이름 모를 풀과 꽃이 조화(분명 생화임/사진 참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래서 병문안을 가거나, 빡친 연인을 달랠 때는 꽃을 선물하는 거구나.' 꽃다발 한쪽에는 손으로 쓴 메모가 달려 있었다. 오랫동안 싱그러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관리법이었다. 난 밥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꽃병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정이 메마른 우리 가족이 사는 집엔 그런 아이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국 끓이는 냄비에라도 꽂아 놓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마침 쓰지 않는 물병이 눈에 들어왔다. 난 물병을 집어 들어 바닥에 붙어있는 원산지(die cow 2000원) 스티커를 제거하고, 물을 반쯤 담았다. 그리고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풀고, 꽃다발을 물병에 꽂아 넣었다.  

 물병에 꽂힌 꽃다발을 보자, 자연스럽게 나태주 시인의 작품 풀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전문을 쉽게 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다)  작년 런던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우연히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봤듯이, 난 상품으로 받은 꽃을 한참 동안 음미했다. '이렇게 좋은 걸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꽃이 발산하는 향기와 싱그러운 풀내음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나니, 그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깨톡 프사를 식물(?)로 채워 넣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감성은 중년 아저씨와 아줌마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보다 눈치 빠르게 좋은 걸 먼저 발견했을 뿐이다. (나한테도 좀 알려주지)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 셋째는 은총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싸웠고, 뒤를 이어 아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쟤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10년 넘게 오래 보아 왔는데, 왜 사랑스럽지가 않을까?' 마음의 평화가 깨진 나는 아내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꽃을 가까이 두니까 너무 좋은데, 내일 양재 꽃 시장에나 놀러 갈까?" 아내는 질투가 심한 여인답게, 이제 국물에 이어서 꽃한테도 밀리는 거냐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했다. (왜케 자아가 비뚤어진거야!) 그리고 자기 회사 동료 와이프가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꽃꽂이 교실을 열었으니, 한 번 등록해 보라며 독려했다. (빈정댔다) 순간 난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치려다가, 싸한 느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 나의 본능은 믿을 만한 놈이다.

 나를 대차게 갈굴 수 있는 기회를 아깝게 날린 아내는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더니, 그대로 나에게 내밀었다. "요즘 미사일 배송에 없는 게 없는데 왜 양재까지 가? 그냥 여기서 주문하면 되지." 만 원도 안 되는 금액에 올라온 갖가지 종류의 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거 시들면, 다음에는 튤립으로 사줘. 그리고 제대로 된 꽃병도 하나 주문하고." 아내는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난 분명히 들었다. "또또 CEO 놀이하고 앉아 있네. 쯧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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