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현섭 Oct 27. 2023

금손

확증편향

 너무 초조하다. 대로변에 차를 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10분 이상 정차하지 않는 한 단속 카메라에 찍히지 않는 걸 알지만, 그것도 큰 위안은 못 된다. 오히려 어디선가 주워들은 요령을 떠올리며, 차를 천천히 앞뒤로 살짝살짝 옮겨본다. '그냥 저 앞까지 갔다가 유턴해서 돌아올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맞은편 가게에서 나오는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운전석 창문 너머로 평소에는 감히 쳐다보지 않는 아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지만, 역시 터미네이터 답게 특별한 표정 변화는 없다. 벌써 10군데 넘게 돌았는데 이번에도 꽝인 건가? 횡단보도를 건너 차로 접근하는 아내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다름없다. 그래서 더더욱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성공인지 아니면 실패인지. 조수석 문을 연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오른다.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진다. 빨리 결과를 알려줬으면 좋겠다. "짠! 남은 거 다 쓸어왔어. 이렇게 고생했는데, 여기에서 1등 나오겠지?" 뿌듯한 표정을 짓는 아내의 손에 48회차 즉석복권이 가득 올려져 있다. "현금이 모자라서 계좌이체까지 했지 뭐야. 그나저나 점원이 이걸 왜? 라며 물어보던데, 마스크 쓰고 들어갈걸 그랬어. 얼굴 다 팔렸어. 헤헤" 특유의 코 찡긋 웃음을 발사하는 아내를 보며, 나도 입만 웃는 어색한 미소로 화답한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얼마 전 퇴근길에 막내를 만나 편의점에 들렀다. 막내에게 2+1 젤리를 사주고 거스름 돈을 받는데, 사장님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손님! 제가 단골한테만 말씀드리는 건데요. 한 세트 하시죠." 당시 난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뭔가 소수만 아는 고급 정보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난 뭔가에 홀린 듯, 뭔지도 모르는 것을 달라고 했다. "4천 원입니다." 어느새 내 손 위에는 48회차 즉석복권이 올려져 있었다. '설마 눈탱이 맞은 건가?'라는 생각을 하는데, 사장님의 부연설명이 시작되었다. 즉석 복권은 거의 실시간으로 출고율을 표시해 주는데, 48회차 복권은 이미 출고가 100% 완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1등이 2장이나 남아 있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48회차가 보이면 싹쓸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했다. 오늘도 전화를 수십 통이나 받았다며 껄껄거리는 사장님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편의점 사장님의 마케팅 전략을 떠올리며, 아내에게 복권을 건넸다. 내가 직접 긁으면 되지 그런 것까지 아내를 시키냐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미루는 건 다 이유가 있으니까. 아내는 엄청난 금손이다. 그리고 금손은 단순히 손재주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손을 사용하는 모든 것에 소질이 있을뿐더러(요리 제외), 심지어 뽑기 운까지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이야 출산율이 바닥을 치고 있으니 좀 다르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한참 어릴 때만 하더라도 모든 게 추첨이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방과 후 과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애 셋을 키우는 우리 부부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그러나 몇 번의 추첨을 거친 후 난 깨달았다. 아내가 뽑는 한 그게 무엇이든 절대 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다소 비현실적인 얘기라는 걸 잘 알지만, 아내는 (나를 뽑은 걸 제외하곤) 단 한 번도 뽑기에 실패한 적이 없다. 세 아이 모두 원하는 어린이집, 유치원을 다녔으며, 방과 후 과정도 항상 아내 뜻대로 보냈다. 심지어 수백 대 일의 경쟁이었던 아파트 청약도 단 한 번에 당첨되었다. (요 얘기는 좀 기니까 나중에 다시 한번 하기로 하고) 이러니 똑같은 복권이지만, 아내의 손을 빌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거 뭐 나온 거 같은데 한 번 봐봐" 아내에게 건네받은 복권을 확인하니, 역시나 4천 원에 당첨되어 있었다.

 다음 날부터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긁은 복권이 무려 5번 연속으로 당첨되고만 것이다! 복권 뒷면에 적힌 4천 원 당첨 확률은 14.3분의 1. 그걸 무려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뽑는 확률이라니 (아참! 내가 사온거지), 갑자기 아내를 향한 나의 기대치가 급격하게 치솟는 걸 느꼈다. 방귀가 자라면 똥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 말을 이럴 때 쓰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자잘한 행운의 반복이 큰 행운의 전조 증상처럼 느껴졌다. '그래.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 바로 결혼이지. 아내 덕분에 일을 그만두고 놀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 그나저나 앞으로는 전업 작가가 되어야 하니까, 타격감 좋은 노트북부터 알아봐야겠다.' 이렇게 즐거운 상상으로 며칠을 보내고 마지막 당첨 복권을 바꾸러 편의점에 들렀는데, 사장님께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손님! 이제 48회는 다 떨어졌어요. 49회차로 드릴까요?"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여전히 48회 1등 2장(20억)은 미당첨으로 남아있었다. 난 48회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며, 사장님이 건네준 4천 원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이게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었고, 오늘 토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난 나는 목욕재계를 하고 아내를 깨웠다. (목욕이 의미하는 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나랑 같이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너(와 나)는 오늘 큰 부자가 될 거라는 자초지종을 장황하게 설명하자, 아내는 벌렁 드러누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피곤한데 귀찮게 하지 말라고. 난 엘리트 탁구인답게 공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족의 움직임을 끝까지 보며, 민첩하게 피했다. 그리고 나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아내는 넘어가고 말았다.

 검색해서 찾은 집 주변 복권방을 서너 군데 들렀으나, 역시나 48회차는 없었다. 난 오랜만에 XX동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아내는 너무 좋다고 했고, 우리는 40분 정도 차를 몰아 XX동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이 같이 다녔던 국민학교를 보자,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6학년 5반 김영애 선생님은 뭐 하며 사시려나. 너 나랑 짝이었던 거 진짜 기억 안 나?" 흔히 여자들은 남자의 기억력을 무시하지만, 난 남자 치고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6학년 때 아내와 짝이었던 게 왜 기억나지 않겠는가. 단지 난 쑥스러워서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다. 아내가 선생님을 대신해서 풍금을 연주한 일, 책상에 올려놓은 송충이 식물(?)을 보고 기겁하며 도망간 일, 여드름 난 얼굴에 둥근 안경까지 모두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그때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아옹다옹했으니, 이렇게 부부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역시 인생은 즉석복권과 같은 우연의 연속인 건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문득 아내로 인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마치 만선의 기쁨을 안고 부두로 향하는 어부처럼, 옆자리에 앉은 아내의 표정은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무려 다섯 번 연속으로 당첨되었고, 무엇보다 그 여세를 몰아 구하기 힘든 48회차 복권까지 두둑하게 챙겼으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나에게 복권 당첨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억세게 운 좋은 난 아내라는 복권에 당첨되었으며, 그건 이 세상 무엇을 가져다줘도 바꿀 수 없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 셰익스피어 느낌?) 그리고 사실 오늘 너랑 놀고 싶어서 복권 핑계 댄 거야. 내 맘 알지? (feat. 마침 요즘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국물을 먹고 싶은 마음도 알지?)


※ 48회스피또2000 구매 후기

: 10만 원 넘게 투자했는데, 그중에서 4만 원 정도 당첨되었다. 한 두장 살 때는 몰랐는데, 결국 즉석복권이라는 게 확률적으로 이렇게 설계되어 있어서 돈을 잃는 구조가 아닌가 싶다. (10만 원 → 4만 원 → 2만 원 → 1만 원 → 파산) 난 아내가 긁어야 당첨된다는 명분을 앞세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아침부터 돌아다녀 피곤한 탓에 어느 순간 소파에 누워 잠들어 버렸다. 잠결에도 긁느라 손이 아프다며 씩씩대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당첨 후기를 찾아보니,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잠원동에서 당첨자가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역시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냥 될놈될이다.

 

 

작가의 이전글 손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