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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04. 2020

읽씹/안읽씹 하는 사람들

읽씹 vs 안읽씹, 아쉬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카카오톡이 우리들의 연락 수단이 된지도 10년이 넘었다. 삐삐를 넘어 문자와 전화로 누군가와 소통하던 우리는 이제 카톡을 보낸다. 자연스럽게 서비스 어플의 이름일 뿐이었던 '카카오톡'을 축약한 '카톡'은 현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소통을 뜻하는 이음동의어가 됐다. 물론 요즘은 '페메'라고 부르는 페이스북 메시지와 'DM'이라고 부르는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가 이를 삼분하는 듯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카톡에 울고 웃는다.




이전의 통신 수단들은 수신을 확인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문자를 읽지 않아도 상대방의 심리를 알 방도가 무방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락에 있어 어느 정도 느긋했던 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와 달리 카카오톡은 '숫자 1'을 통해 이를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편리하지만 불쾌한 서비스를 추가했다. 덩달아 사람들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읽지? 읽었나? 안 읽었네.


처음은 '읽고 씹다'의 줄임말인 '읽씹'이 문제시되었다. 대놓고 수신 확인이 가능한 카카오톡의 메시지 기능은 1이 사라졌음에도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는 어떤 부류를 만들어냈다. 인간관계에서 이 읽씹을 고민하는 사연들이 우후죽순 늘어났고 읽씹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헤치며 이를 비난하는 반대 세력 또한 생겨났다. 이 읽씹이 가장 문제시된 이유는 수신자의 부정적인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읽씹을 시전한 사람들은 바빴다는 핑계를 뒤늦게 둘러대지만 메시지 하나를 읽고 쓰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체로 읽씹은 '나'라는 발신자의 '정체성'을 등한시하는 다분히 공격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카톡을 볼 새도 없이 바빴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지 않는가. 그저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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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씹의 이유는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나마 용인이 되는 이유는 '어떤 답변을 보낼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내 정체성을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용납이 된다. 또한 이러한 사유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도 웬만해선 느낄 수 있는 맥락이다. '아, 얘가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구나'라고 말이다. 그러니 메시지를 발신한 사람이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낼 인내가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주저함으로 받아들여진다. 대화의 끝맺음으로 느껴지는 메시지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직접적인 합의의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맥락이다. 수많은 읽씹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이마저도 다양한 카톡 이모티콘이 이를 대체했다. 메시지라는 텍스트와 달리 이모티콘이라는 이미지는 읽고 씹기에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다음




지금의 디지털 환경에서 사람들이 더 많은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안읽씹'이다. 이는 '안 읽고 씹는다'의 준말로 읽씹에 비해서는 비교적 그 역사가 짧다. 하지만 이 안읽씹에는 좀 더 고도의 심리전이 추가되어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더한 괴로움과 피로감을 느낀다. 카카오톡은 내부 알림을 통해 대화방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비행기 모드'라는 우회로도 등장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카톡을 온전히 읽었으면서도 1이 사라지지 않는 편법을 구해 좀 더 지능적인 읽씹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면에서는 읽씹 때문에 지나치게 비판받던 '읽씹러'들이 안읽씹을 통해 그러한 비난을 완곡하게 회피하기 위해 생긴 신종 사회문화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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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안읽씹'은 여러 불편한 점을 만들어냈다. 우선 소셜 미디어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 카카오톡의 '프로필 사진 변경' 기능을 마비시켰다. 수시로 안읽씹을 시전하던 내 전 여자 친구 중 하나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셀카를 건져 프로필 사진을 변경하려고 할 때면 한동안 답하기 귀찮아 쌓아 뒀던 모든 카톡을 일일이 읽고 답장했다. 개중에 대부분은 읽씹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얘는 이해해줄 거예요! 서로 그러거든요!"라나 뭐라나. 한 번은 그냥 바꾸면 되지 뭐하러 귀찮게 그러냐는 내 힐난에 그녀가 이렇게 답했다. "그럼 삐지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럼 답장 좀 미리 해주지 그랬어. 여자들의 심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남자들이 모르는 여자들의 세계에선 1이 사라지지 않은 채 프로필 사진을 변경하면 인간관계가 매우 험악해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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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안읽씹은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관계 또한 애매하게 만들었다. 래퍼 저스디스가 'SNS는 21세기의 연락처'라고 말한 것처럼 지금의 사람들에게 디지털 환경 속의 팔로우(follow)와 언팔로우(unfollow)는 나름대로 큰 의미를 가진다. 현실에서 친구인 우리가 디지털 세계에서는 남남인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지점은 공공연하게 지적하기에는 무언가 속이 좁은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너는 왜 맞팔 안 해?"처럼 "너 왜 카톡 안 읽었어?"는 육성으로 말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렇게 마음속에 찜찜함을 남겨둔 채 현실 관계를 지속하면서 사람들은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쌓기 시작했다.


힙합엘이


세 번째로 안읽씹은 연애 과정에서 알 수 없는 기싸움을 만들어냈다. 이는 '썸'이라는 말로 연애 초기의 긴장감, 두근거림, 떨림의 감정으로 포장되었지만 동시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여자는 '칼답'을 하지 말아야 하고 남자는 칼답을 해야 하고 따위의 연애 조언들이 팽배해지면서 안읽씹은 '밀당'의 기본 스킬이 되었고 남들보다 예민하고 소심한 사람들에게 이 안읽씹은 지나친 감정노동을 요구했다. 이별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읽씹의 텀이 길어질수록 연인들은 사랑이 식었음을 감지했고 차근차근 이별을 준비하는 필수 코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렇게 안읽씹은 무심함의 빈도수를 측량하는 지표로 빈번하게 사용되며 연인들의 애정 전선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네이트 판


마지막으로 안읽씹은 낚시를 만들어냈다. 이는 '안읽씹러'가 어떻게든 메시지를 확인하게 만들기 위해 나타난 재밌는 현상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한 마디로 끝날 수 있는 문장을 대략 세 개의 메시지로 나눠 보낸 뒤 마지막 메시지에 사진, 동영상, 기프티콘을 텍스트로 써서 전송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진이나 동영상은 수신자가 확인할 확률이 높은 콘텐츠라는 것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어떤 사진일까, 어떤 동영상일까 궁금해서라도 메시지를 확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질적인 기프티콘의 경우는 좀 더 유혹적이다. 리얼한 낚시를 위해 텍스트가 아닌 진짜 사진과 동영상을 보낸다면 대화의 흐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스꽝스러운 '짤'인 경우가 많다.


데일리, <내 카톡, 안 읽는다 이거지? 카톡 안 읽을 때 읽게 하는 방법>




안읽씹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소통법 또한 존재한다. 바로 '읽페'와 '좋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처음 알고 나서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뜻을 전혀 몰랐을뿐더러 굳이 왜?라는 생각을 가득 품게 하는, 내 기준에서는 너무나 기이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읽페'는 '스토리(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존재하는 24시간짜리 휘발성 게시물. 하루가 지나면 스토리는 사라진다. 일반적인 포스팅과는 다르게 방문자를 확인할 수 있다.)를 읽으면 페이스북 메시지 하겠다' '좋페'는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면 페이스북 메시지 하겠다'라는 뜻이다.


직장내일, <팀장님한테 인싸 용어 맞혀보시라고 해봤음>


이는 지금의 십 대 청소년들에게서 유행하는 소통법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나 또한 그랬지만 그 나이 때 학생들은 유행에 워낙 민감하다 보니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현상만 떼놓고 지금의 청소년들이 가진 보편적인 마인드 셋을 추정해보면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학업도 연애도 우정도 매우 쿨할 것만 같은 현시대 젊은이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일치하지 않는 소극적인 소통법이기 때문이다. '읽페'와 '좋페'는 터치 한 번이면 먼 나라의 이름 모를 누군가와도 1초 만에 연결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코 앞에 있는 사람과 쉽사리 연결을 시도하지 못해 생긴 '방어적 소통'이다.


예를 들어보자. A라는 남학생은 B라는 여학생을 짝사랑한다. 하지만 직설적으로 페메를 보내긴 힘들다. 호감의 감정을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가지 방어기제를 내세우는 것이다. 스토리 읽으면 페메 한다. 좋아요 누르면 페메 한다. 선택권을 B양에게 넘기는 것이다. '너 또한 호감이 있다면 이 스토리를 읽었겠지', '너 또한 호감이 있다면 좋아요를 누르겠지'라는 심리가 담겨있는 것이다. A군에게는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소극적인 대화 시도'인 것이다. 만약 B양이 스토리를 읽지 않는다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면 쿨하게 B양을 좋아하지 않은 척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뭐든 쿨할 것만 같은 이 세대도 상처 받지 않으려 거리를 잰다.


이 소통법 또한 부작용이 존재한다. 실수가 개입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볼 생각이 없었지만, 좋아요를 누를 생각이 없었지만 '자동으로 다음 스토리로 넘어가 방문자 기록에 남은 상황', '터치 실수로 좋아요를 눌러버린 상황' 등등을 통해 읽페와 좋페를 딱히 수신하고 싶지 않지만 귀찮은 연락이 올 가능성이 있다.


페이스북 주 이용자인 10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금 더 높은 연령대인 2030 세대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스타그램의 스토리 기능은 약간 다르게 활용된다. 이들은 좀 더 유연하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 어느 정도 내공이 쌓여 있기 때문에 스토리를 방어적 소통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 그들에게는 '방문자 기록' 그 자체가 더 중요해졌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페이스북 스토리와 마찬가지로 24시간의 유효기간 동안 방문자를 추적할 수 있다. 이는 '관조'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능이다. 누가 내 스토리를 보는지 알 수 있다면 나에 대한 '관심도'를 간접적으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IT 동아


초창기의 인스타그램이 표방한 정체성과는 다르게 지금과 같은 스낵 컬처 시대에는 게시물 포스팅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토리의 비중이 더 높아진 듯하다. 하루에 피드 게시물을 2개 이상 올리게 되면 관종 취급을 받고 '언팔'을 당하는 것과 달리 스토리는 그러한 사회적, 문화적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10개를 올리든 20개를 올리든 사람들은 별다른 리액션을 보이지 않는다. 내 뉴스피드를 망치지 않으니까.


주로 기록의 용도로 사용하는 이용자들이 많은 소셜 미디어에서 스토리 기능은 좀 더 캐주얼한 장점이 있기도 하다. '좋아요'와 '댓글'에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적기 때문에 웬만해선 '예쁘고 힙한 사진'을 올려야 한다는 포스팅 강박에 비해 비교적 일상적이다. 아무런 좋아요와 댓글을 남기지 않고 스크롤을 휙 올리는 행동이 카톡의 '안읽씹'과 유사하다면 스토리는 적어도 '읽씹'을 통해 내 존재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




읽씹이든 안읽씹이든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는 모멸감이 알게 모르게 상당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이 거듭되는 듯하다. 인간관계에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모든 트러블에도 완벽한 정답과 해결방안 따윈 없다. 그저 '아쉬움'이라는 원인이 슬플 뿐이다.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은 주로 읽씹과 안읽씹의 주체가 되고 아쉬울 게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나 또한 지금도 누군가의 카톡을 읽씹 했고 안읽씹 했고 칼답 했다. 내가 아쉽지 않은 사람과의 대화를 원천 봉쇄하고 내가 아쉬운 사람과의 대화를 지속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러한 상황에 무감각해진 내가 모질다고 느낀다.


https://www.youtube.com/watch?v=e-YujV-YadE&vl=ko

유튜브, <Simple Sample 심플샘플>


나는 전화나 영상통화보다 카톡을 선호한다. 오랜 시간 동안 할 말을 생각하고 정리해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읽지 않았다면 전송한 메시지를 삭제할 수도 있다. 말실수를 하고 싶지 않은 주의 깊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괜한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은 소심한 사람이라 그렇다. 어쩌면 나는 진솔한 대화를 핑계로 끊임없이 나를 포장하기 바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쉬움이 뭐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읽씹'과 '안읽씹'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일까. 환하게 빛나는 직사각형의 대화 창 안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갑과 을이 존재함을, 슬프지만 소통에도 이기적인 먹이사슬과 빈부격차가 존재함을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어서는 아닐까. 또 어쩌면 어디서든 소통이 가능한 디지털 환경의 발전과는 별개로 진득한 대화가 사라져 가는 '인스턴트 소통의 시대'가 도래해서는 아닐까.


'소통'은 양방향일 때야 비로소 완성되는 단어다. 읽씹과 안읽씹은 그 이유가 어찌 됐든, 방식이 어찌 됐든 일방적이다. 얼굴을 맞대고 입으로 나누는 대화에도 고민이 필요한 것처럼 손가락을 거쳐 전달되는 메시지에도 당연한 배려가 필요하다. 심지어 메시지는 필터링도 쉽다. 발신자로서, 수신자로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읽씹과 안읽씹에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담아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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