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없는 주니어의 설득 생존기
그래서 이거 개선하면 매출이 오르나요?
대표님의 이 질문 앞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가져온 기획안은 '알림톡 발송을 위한 채널 및 템플릿 등록 프로세스 개선안'이었다.
내 눈에는 너무나 명확한 '불편함'이 대표님의 눈에는 '돈 안 되는 예쁜 쓰레기'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b2b 특성상, UX를 개선한다고 해서 당장 신규 유입이 늘거나 매출이 상승하는 구조는 아니다.
그렇다 보니 대표님은 새로운 고객을 끌어올 수 있는 '신규 기능'에 우선순위를 두고 계신 분이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개선안은 정말 사치일까?
우리 서비스에는 알림톡을 전송하기 위해 카카오 비즈니스 채널을 등록하고 템플릿을 승인받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기획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화면은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관적이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내가 지금 전체 프로세스의 어디쯤 와 있는지,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에 대한 안내가 전무했다.
그저 삭막한 템플릿 목록을 보여주는 화면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그마저 등록된 템플릿이 없으면,,? 길 잃기 딱 좋은 화면이다)
사용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문제는 더 심각했다. 채널을 등록하고 검수 요청을 보냈지만, 언제 승인되는지 알림도 없을뿐더러, 사용자는 등록이 제대로 된 건지 확인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페이지를 새로고침하거나, 잊을만하면 다시 들어와 상태를 체크해야 했다.
결국 참다못한 사용자는 우리에게 전화를 건다. "제 거 승인 언제 돼요?"
이것은 사용자에게 엄청난 인지적 부하를 주는 일이다.
즉, 서비스가 내 업무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서비스의 눈치를 보며 챙겨야 하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유저들은 전화조차 하지 않고 말없이 떠난다.
이탈 경로를 추적할 이벤트 로그조차 제대로 심겨 있지 않은 상황에서 "유저가 불편해 보여요"라는 말은 뇌피셜일 뿐이었다.
우리는 규모가 작은 B2B 서비스이다. 대규모 B2C 서비스처럼 매일 수만 명의 데이터가 쌓이는 것도 아니었기에, 로그 설계조차 미비했다.
사실 많은 초기 스타트업이나 B2B 기업들이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숫자로 증명하고 싶어도 증명할 숫자가 없는 척박한 환경.
하지만 숫자가 없다고 해서 설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기획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을 위한 객관적인 근거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나는 고객의 문제를 공감시키기 위해 현재의 엉망인 프로세스를 플로우차트로 시각화했다.
단순히 시스템의 흐름만 그린 게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사용자의 대기 시간과 운영팀의 대응 시간을 함께 적었다.
AS-IS: 고객 한 명이 채널등록 ~ 알림톡 등록을 완료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 최소 3일.
사용자 경험: 승인 여부를 알 수 없어 발생하는 반복적인 재접속에 따른 시간낭비와 불안함
운영 공수: "어떻게 등록하나요?, 언제 승인되나요?"라는 반복적인 문의 응대에 소요되는 업무 리소스.
이것은 단순히 'UX가 안 좋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회사의 돈(인건비)과 고객의 신뢰가 동시에 줄줄 새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대표님에게 다시 기획안을 전달했다.
이번에는 'UX 개선'이라는 단어 대신, '비즈니스 효율화를 위한 운영 구조 개선'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현재 운영팀이 단순 반복 문의에 쏟는 리소스를 최적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사용자가 등록 과정에서 길을 잃고 전화를 걸게 되면, 정작 중요한 신규 고객 대응에 구멍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개선을 통해 확보될 일 평균 2시간의 운영 리소스는, 신규 고객 대응 및 고객 만족도를 관리하는 데 온전히 집중될 것입니다."
UX는 단순히 화면을 예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UX는 '비용 절감'이자 '확장 가능성'에 대한 투자다.
사람이 일일이 붙어서 설명하고 확인해 줘야 돌아가는 시스템은 서비스가 커질수록 결국 회사의 발목을 잡기 마련이다.
기획자가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멋진 일들을 다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주니어 기획자의 업무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의 끝없는 줄타기였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회사의 모든 활동은 결국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미학적으로 훌륭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기획이라도, 그것이 비즈니스적인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획자는 반드시 '비즈니스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내가 제안하는 이 활동이 어떻게 회사의 매출을 높이거나, 비용을 줄이거나, 리소스를 효율화하여 결국 '돈을 벌어다 주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건 '비즈니스 언어로의 번역'이었다.
기획자의 언어: "유저 플로우가 매끄럽지 않고 안내가 부족해요."
대표님의 언어: "단순 문의 대응을 자동화하여, 팀 전체가 고부가가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데이터가 없어서 서러운가? 서럽다.. 많이..
포기하는게 아니라 프로세스를 뜯어보고 시간을 계산해 보자. .
UX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대표님이 있을 수있다.
매출을 올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새는 돈을 막는 것이고, 그 최전선에 바로 UX가 있다.
항상 근거를 가지고 가서 설득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