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彼岸)의 너머로-2
주검을 직접 본건 처음이었다. 바라나시는 이미 화장터로 유명했기에 예상은 했지만 얇은 천 쪼가리에 쌓인 시신의 형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모습도 그렇고 채 덮지 않은 그의 거친 발도 모두 충격이었다. 그의 삶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 거친 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왜인지 터져 나오는 울음에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 역시 살아 있을 때는 나처럼 끊임없는 욕망에 시달렸을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 주검의 행렬에는 유가족도 없어 보였고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눈물을 그냥 흘리며 그 바라나시 거리를 정신없이 헤매고 다니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헤매다 다른 주검을 나르는 이들을 따라갔다. 그 유명한 화장터 인 마니까르니까 가트 가 나왔다. 여러의 주검들이 각각의 장작의 화염에 불타고 있었다. 그 화장터 옆의 한쪽 건물 옥상의 레스토랑에서는 경박스러운 인도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곳의 관광객들이 병 콜라를 마시며 화장터를 관람하고 있었다. 또 한쪽에는 시타르라는 인도 기타를 가르치는 학원에서는 음악이 들려 나왔으며 그 옆길에는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실려오는 주검과 계속 타고 있는 장작더미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우는 이도 없었고 유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체 오로지 주검이 타고 있는 장작더미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개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죽음이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한쪽의 삼사층 되는 건물에서는 관광객들이 올라가서 구경을 하고 있기에 나도 가보았다. 거기에는 아까와 비슷한 천 쪼가리가 덮힌 사람들이 몇몇은 살아있는지도 알 수 없는 체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의 건물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태울 장작 값을 먼저 지불하고 거기서 죽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이나 그 옆에서 주검을 태우는 것을 보는 나와 같은 관광객들이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모든 게 온통 혼란이었다.
정리가 되질 않았다. 죽음에 대해 개념으로서만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이 눈앞에 현실로 있었다. 그 거친 발의 주검도 생전에는 한없는 온갖 욕망에 끄달렸을 나와 다르지 않았을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내게 한없이 눈물이 나오게 만들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그 죽음을 기다리는 건물에서 생을 다하기만을 기다리는 그들도 지금의 나와 별 다르지 않은 젊음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없이 허망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저녁이 되니 갠지스강 한쪽에서는 뿌자라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24시간 꺼지지 않는 주검을 태우는 불이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불을 주제로 하는 의식을 매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런 갠지스강에 물통을 가지고 와 담아가고 마시고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을 하고.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은 정말 혼돈 그 자체였다.
숙소에 돌아와 옥상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모여 대마초를 피우고 있었고 건물 너머에는 계속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도 특유의 경박한 음악은 계속 흘러나왔다. 맥주를 마시며 정리되지 않는 생각과 감정을 술기운으로 날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 역시 내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출가했던 절을 다시 나오고 나서, 인도에 오고 나서도 어쩌면 계속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음을 보고 나니 아니 항상 내 삶과 함께 하고 있었으며 어쩌면 나 역시 그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고 보니 죽음은 그 거친 발과 같았다. 계속 맥주를 마셨다. 옆에서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낄낄거리며 자기들 끼리 대마초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도인들이 왜 저렇게 까지 평범한 그리고 더러운 강물에 집착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갠지스강에 몸을 씻거나 마시는 것만으로 그들의 죄가 씻겨 나가며 죽은 이후 자신의 몸을 태워 갠지스강에 흘려보냄으로써 그 갠지스 강물에 의해 그의 나쁜 까르마가 정화가 되어 내생에는 좋은 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실제 갠지스강이 그렇게 업을 정화하는 기능이 작동하던 안 하던 이미 그들의 실제 삶에 있어 태어나면서부터 나뉜 계급으로 인해 윤회와 그리고 까르마라고 불리는 업이라는 두 개념과 맞물려서 갠지스강이 업을 정화해 준다는 믿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하지 않나 싶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출생과 그로 인해 정해지는 계급을 평생을 짊어진 채로 살아간다는 건 그리고 이미 계급마다 부여된 삶의 고통의 덩어리를 받아 들어야 한다는 건 그 계급 자체를 부정하던지 아님 그 계급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나쁜 까르마의 원인이 되는 나쁜 의도를 가진 일을 하지 않으며 사회에 순응하고 선행과 덕을 베풂을 통해 좋은 까르마를 쌓아서 그 좋은 까르마의 덕으로 내생에는 좋은 계급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한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으며 그것은 인도라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이상 강요받고 순응하게 되며 이는 그 계급사회가 이어져 오는 사회 체계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이어져 내려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어쩌면 자기의 계급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체가 어쩌면 지금의 삶을 부정하는 방식인 것이고 그럼으로써 윤회와 까르마의 체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모순되는 사회가 만들어지게 되며 스스로가 갠지스 강의 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며 죽어서 화장되어 그 갠지스 강에 흘려보내지는 것으로써 증명되고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뭄바이에서 본 좋은 고급 외제차에서 시계와 반짝거리는 금속들을 거들먹거리던 그 좋은 계급들의 사람들은 과연 죽어서 갠지스강에서 화장을 할까? 이 카스트라는 계급사회에 가장 혜택을 많이 누리는 그 계급들은 그 계급 체계를 증명하는 존재인 갠지스 강의 화장터를 이용하고 있을까? 난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화장터에 태워지는 이들이나 갠지스강 물을 먹으러 오는 순례객들의 행색은 다 가난해 보였다.
그렇기에 갠지스강이 더럽고 안 더럽고 가 그들에게 무엇이 중요할까 싶다. 더럽고 안 더럽고는 기준의 문제이고 까르마가 정화되고 소멸되는 여부는 믿음의 영역이다. 믿음의 영역에서는 마시고 씻고 심지어 물통에 담아 가족들에게 나눠주러 먼 길을 가기도 하며 심지어 거기서 죽어 불태워져서 종국에는 갠지스강으로 스며 가길 원한다. 그러는 이유는 결국 현재 살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면 당연히 애써 굳이 그러지도 않아도 된다. 누구나 삶에는 희로애락이 있다.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듯이 죽음도 피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없는 출생을 신의 뜻이라고 여기거나 혹은 윤회와 까르마로 인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믿음의 영역은 누가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가 없다. 증명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위에 의하여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 아니다. 콩 심으면 콩이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난다. 윤회라는 것의 개념을 걷으면 남는 건 까르마 즉 업이라는 거고 업이라는 것은 결국 인과 법칙인 연기(緣起)와 다를 것이 없다. 인(因)이라는 콩이 땅과 물이라는 연(緣)의 조건하에서 콩나물이 자라나는 것만 남는다. 즉 행위에 의해 인(因) 만들어지고 조건에 의해 연(緣)이 되어 아래의 불경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결국 행위에 묶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되고,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
현자들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그 행위를 봅니다.
그들은 연기(緣起)를 보는 님으로서,
행위와 그 과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합니다.
뭇 삶은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에 매어 있습니다.
Majjhima Nikāya, Vāseṭṭha Sutta 중에서
그러고 보니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으로 나가면 안 샐까 라는 생각은 적어도 여기 인도에서는 증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인도 내에서 인정되고 있는 계급이 다른 나라에서는 통용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인도에 와서 제일 많이 맥주를 마셨지만 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어나 보니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왠지 무언가 맘이 편해지고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아침을 먹고 다시 갠지스강로 나와 보트를 탔다. 보트를 타고 보는 갠지스강은 화장터를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은 강 중에 하나일 뿐인 듯했다. 아니 이제는 화장터가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화장터 가트가 있던 건너편으로 보트를 대고 내렸다. 계단으로 된 가트 쪽과는 달리 모래사장이 곱게 있던 곳이었다. 듣기로는 여기 역시 불가촉천민이 사는 곳이라 잘들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처럼 일부러 와서 건너편의 바라나시 모습을 사진 찍는 관광객들이 제법 있었다. 그중 누군가 크게 비명을 질렀고 가서 보니 허옇게 불은 반쯤 남은 시신이었다. 시신을 태우는 것을 봐서인지 담담했다. 주검을 모두 태울 장작비 가 모자란 이들은 태우다 불이 꺼지면 그대로 강에 흘려보낸다고 한다. 그런 남은 주검이 흘러서 물에 허옇게 뿔어 건너편 모래사장에 온 것인가 보다. 심지어 갠지스강에는 돌고래도 가끔 보인다고 한다. 이런 갠지스 강이 돌고래 라니. 돌고래가 육식 이던가.
이후 바라나시의 이곳저곳을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다. 바라나시의 골목길은 미로와 같았고 아주 좁은 길이었다. 지나가는 서양 배낭여행객에게 길을 물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저녁이 되면 다른 인도지역과 비슷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점점 드물어갔다. 다른 지역에서 흔하게 보던 축 늘어져 잠만 자는 개들과 달리 바라나시의 개들은 마른 모습으로 눈빛조차 생생하게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하루 종일 시체 태우는 냄새로 뒤덮여 있었고 그것을 맡으며 좁은 골목길을 계속 헤매고 있으니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해는 지는데 여기서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되어 걸음이 더 빨라지고 있었는데 골목에 한 인도 꼬마아이가 네 사정을 다 안다는 듯이 자기에게 10루피를 주면 길을 알려 주겠다며 말을 걸어왔다. 그 당시 환율로 10 루피면 약 300원 정도였는데 그 정신없는 가운데도 난 그 꼬마에게 왜 내가 너에게 10루피를 줘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물어봤고 그 꼬마는 나에게 10 루피면 넌 숙소를 찾을 수 있고 자기는 그 10루피로 먹을 걸 사 먹을 수 있으니 10루피로 두 명이 행복한 거 아니냐라고 대답을 했다. 난 10루피로 난 숙소를 찾았고 그 10루피를 받은 꼬마도 행복하게 돌아갔다. 그 꼬마 말대로 우리는 10루피로 두 명이 행복할 수 있었다. 이 10루피로 인한 그 꼬마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무엇이 다를까. 내가 느낀 안도감의 행복은 저 높은 계급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과 과연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