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친 재료 속에서 배운 생각의 재료
나는 가끔 요리사가 된다. 그것은 거창한 직업의 이름이 아니라, 한 주의 피로가 가라앉은 주말 아침에만 잠시 허락되는 역할이다. 일주일에 한 번,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드물게 찾아오는 이 시간은, 평일 내내 아이들과 씨름하며 하루를 버텨낸 아내에게 건네는 작고도 은밀한 선물이다. 알람 없이 이어지는 늦잠, 그 고요하고도 달콤한 시간의 대가로 나는 부엌에 선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아빠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소 과장된 맛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내 요리는 대체로 정직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단순하다. 냉동실 문을 열어보면 그곳에는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둔 식품, 언젠가 먹겠다고 사두고 잊어버린 간편식들이 하얀 서리 속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중 몇 가지를 골라 꺼낸다.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아무 말 없이 내 부족함을 대신한다. 뜨거운 바람이 만들어낸 노릇한 색감은 마치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것처럼 그럴듯하다. 요리는 때때로 과정이 아니라 결과의 얼굴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나는 이 기계를 통해 배운다.
그리고 나의 작은 기술이 더해진다. 아이들이 먹기 좋도록 가위로 잘라내는 일, 그것은 단순한 손질을 넘어 일종의 연출이다. 크기를 맞추고, 모양을 다듬고, 접시에 보기 좋게 올려놓으면 그럴듯한 한 끼가 완성된다. 아이들은 종종 그 앞에서 눈을 반짝인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조각을 집어 들며, 작디작은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 순간,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마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요리사라도 된 듯, 근거 없는 자부심이 마음속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나는 그것이 내 손맛이라고 믿었다. 아이들이 남기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 하나로, 나의 요리는 이미 완성된 것이라 착각했다. 사람은 칭찬에 익숙해지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서서히 멈춘다. 나 또한 그랬다. ‘아빠가 해주는 건 다 맛있지.’라는 말은 달콤한 독처럼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과감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넘쳐흘렀다.
다시 돌아온 주말. 아이들에게 평범한 라면이 아니라, 특별한 짜장라면을 만들어주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재료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 안은 작은 시장처럼 풍성했다. 소시지, 만두, 치킨, 치즈,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가지 가공식품들. 나는 그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활용하기로 했다. 풍성함은 곧 맛이라는 단순한 공식을 믿었기 때문이다.
짜장라면을 끓이며 나는 평소보다 물을 조금 더 남겼다. 그릇을 넘치지 않게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더 많은 재료를 받아들이기 위한 여백이었다. 준비해 둔 것들을 하나씩 넣기 시작했다. 칼집을 낸 소시지는 끓는 물 속에서 작은 폭죽처럼 벌어졌고, 만두는 부드러운 피 속에 감춰진 고기를 품은 채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튀김옷을 입은 고기는 잘게 잘려 라면 위에 흩어졌고, 기름기 어린 향이 국물에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참치 한 캔을 통째로 넣었을 때, 나는 이미 이 요리가 ‘특별하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남은 것은 치즈였다. 두 가지 선택지가 눈앞에 놓였다. 꾸덕함이 매력인 체다치즈, 그리고 길게 늘어나는 맛이 예술인 모차렐라치즈다.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들의 웃음을 떠올렸다. 피자를 좋아하는 아이들 얼굴을 생각하며, 망설임 없이 모차렐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낌없이 올렸다. 치즈는 뜨거운 김 위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며, 마치 밤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처럼 라면 위에 자리를 잡았다.
비주얼은 완벽했다.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아이들은 환호했고, 젓가락을 들었다. 나는 아이들 표정을 기다렸다. 기대라는 것은 늘 조용히 다가와 마음 한켠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 예고도 없이 무너진다.
이상했다. 아이들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지 않았다. 웃음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딘가 억지스러웠다. ‘맛있어’라는 말은 들렸지만, 그 말은 공기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젓가락은 점점 느려졌고, 접시 위의 음식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나의 요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젓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맛은 있었지만, 맛이 없었다. 각각의 재료는 분명 훌륭했지만, 함께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제각각 떠돌고 있었다. 소시지는 소시지의 맛을, 만두는 만두의 맛을, 치즈는 치즈의 맛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국물은 무거웠고, 혀는 방향을 잃었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았다. 시끄럽지만 의미는 없고, 풍성하지만 공허한 상태였다.
그릇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단 한 장의 체디치즈면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풍성함이 반드시 완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리는 생각과 닮아 있다. 우리는 종종 더 많은 것을 담으려 한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의견들. 그것들이 모이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결과는 오히려 흐릿해진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문장처럼,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모르는 삶이 된다.
지금의 시대는 넘쳐난다. 정보는 손끝에서 흘러나오고, 생각은 클릭 한 번에 쌓여간다. 그러나 그 많은 재료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방향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떤 순서로, 어떤 온도로 섞어낼 것인가다.
그날 이후로, 조금 더 천천히 요리하기로 했다. 냉동식품을 꺼내는 손길에도, 가위를 드는 순간에도, 작은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가.’ 아이들의 식탁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맛이 또렷하게 남기를 바란다.
아마도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흔들리며, 더 많은 것을 쥐려 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를 완성시키는 것은, 무엇을 더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냈느냐일지도 모른다. 비워낸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본질, 그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깊은 맛을 남긴다.
그날의 짜장라면은 실패였다. 그러나 그 실패는 내게 하나의 레시피를 남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오래 남는 레시피. 그것은 아마도, 삶을 요리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