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역할과 미래
2008년 여름 교육감 선거가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결국 투표율 15% 수준으로 치러졌으며, 당시 40%를 득표하여 당선한 공정택 교육감은 얼마 후 뇌물 수수 재판으로 직위 상실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던 그즈음 KBS 인간극장에서 5부작으로 방영한 '꼬마스님 여름 일기'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대한민국의 교육을 책임지는 사람이 지광스님과 지산스님과 같은 마음이길 바라며 글을 쓴 기억이 난다.
'꼬마스님 여름 일기'를 보고 나니 : http://blog.naver.com/cpk78/120054248950
10년이 좀 안된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 변해온 걸까? 여전히 우리는 OECD 국가 중 근무시간이 가장 긴 나라, 여름휴가가 가장 짧은 나라, 그리고 자살률이나 노인 빈곤율 등의 지표는 10년이란 긴 시간을 가로질러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치게 만들고 있다.
지금 우리 어깨에는 10년 전부터 경쟁과 성장 기조의 사회적 부담 위에, 고령화와 저출산이라는 더 끔찍한 문제가 놓여 있다. 또한 글로벌 경제 침체에 따른 집단적 이기심은 자국우선주의를 표방하며 제국주의와 산업화를 통해 이룬 현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있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지난 10년간 가장 치열한 30대를 겪은 당사자로서, 지금 우리 사회가 지나온 정체기와 문득 겁이날 정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글을 써본다.
제조업의 가치를 우선 시 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금융 및 투자업의 역할을 다소 부정적으로 보기에 금융전문가의 의견을 잘 귀담아듣지 않지만, 얼마 전 투자왕 조지 소로스의 파트너인 짐 로져스가 KBS 명견만리에 출연하여 한국사회에 대한 통찰을 이야기할 때 다소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정체되어 있다"라고 한다. 한국은 "투자처로써 매력적이지 않다"라고 한다. 현재 베트남의 역동성을 가장 매력적인 투자 요건으로 생각하는 이 투자왕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1.8%의 합격율을 가진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는 것을 보며, 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농담을 던졌지만, 그의 혜안에 비친 지금의 한국사회는 과연 어디로 향한 것일까?
한국에 아무런 애착도 없고 공인인 입장에서 그가 말한 문제의 본질은 "IMF의 위기 속에서도 역동적이었던 한국이 이제 소수 재벌에게 자본과 권력이 집중된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경제 구조가 됐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게 그의 통찰의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국민의 인식은 계속 변해왔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증명하듯 억압된 기간 동안 시민의 민주주의 의식은 점점 성장해왔다. 또한, 산업계는 글로벌적인 기술혁신에 흐름을 같이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하고 있다. 국민의 지식수준은 점점 높아졌고, 당장 내 주변만 하더라도 사회 전반적인 합리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단순히 법과 제도가 강화되서가 아니고 전반적인 시민의식이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아직 사회적 보호대상으로 분류되는 학생들이, 어쩌면 지금 갈취의 대상인 약자로 내몰리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이기적이고 비합리적 판단에 의해 미래가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이기심과 편취로 인해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매년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 위해 젊음을 포기한다. 사랑도, 꿈도 사치이고 도전은 어느덧 기피대상이 된 지금의 현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누군가는 '실력 있는 부모'를 만나 다니지도 않을 대학에 당당히 입학하고, 또 누군가는 1% 정도의 주식을 보유한 아버지를 둔 덕에 30대 중반에 시가총액 300조가 넘는 기업의 오너가 되는 시국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면 되는 것일까? 그 어떤 교육을 제공하더라도 아이들의 입속엔 점점 쓴 맛만 남겨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교육과 북한의 주체사상 교육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당당하고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10년 전 고아로 세상에 내버려진 동자승들이 지광스님과 지산스님을 만나 사랑과 관심 아래 성장하는 것을 보며 작은 안도를 느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20살 내외로 성장했을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짐작해보면 이내 마음이 착잡해진다.
최근 화재를 모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눈길을 끈 것은 농업혁신의 풍요로움이 인간의 자유와 노동에서의 해방이 아니고, 오히려 소수의 지배계층을 만든 불행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자원과 문화를 독점하는 것으로 자신 스스로를 지배계층으로 만든 이들은 이후 봉건 체계의 붕괴와 민주주의라는 합리적 사고를 통해 많은 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얼마 안가 산업혁명에서의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따른 혜택은 또다시 그 과정을 반복해서 소수의 자본에게 유리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냈다. 4차 산업혁명이란 터울 아래 노동의 개념을 뒤업을 이번 변화에서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더 안전한 마차 위에서 사회를 위협할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수렵인들이 순식간에 농노의 신분으로 추락한 것처럼,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의 대가를 착취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렇게 만만한 억압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두 번의 전례는 지금 다가오는 미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착취로 느껴질 수 있다는 암울한 생각을 해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무원이 되기 위해 새벽 6시에 학원 앞에서 줄을 서는 아이들, 평범한 사무직이 되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을 외국어를 몇 개 씩이나 익혀가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젊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지금, 정작 혁신을 해야 할 기업은 국가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고, 이를 막아야 할 정부는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최근 정권이 바뀐 후 방향을 바꾸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이건 소수의 케비넷이 움직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경쟁보다는 함께하는 사회, 조금 뒤처져도 불안해할 필요 없는 그런 사회를 원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뒷받침되어야 지금의 글로벌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면서도 왜 우리는 그것을 변화시킬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자신의 팍팍한 삶 뒤에 숨어 침묵을 지키는 동안 지금 무너지는 곳이 자신의 발 바로 아래임을 외면하는 걸까?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쯤 됐으면 그런 뜬 구름 잡는 소리는 그만하고, 현재의 문제를 직시할 때이다. 그리고 이를 직시하는 것은 누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 스스로임을 자각해야 한다. 지금 내 아이가 꿈을 펼칠 2~30년 후의 세상에서, 행복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과연 우리가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지 각자 스스로 질문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