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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풍 Jan 09. 2018

착취의 수단

노예, 석유, 자본 그리고 괴물

>> 인간의 착취


영화 매트릭스(1999년)를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몇 장면들이 있다. 주인공 네오가 스미스 요원의 총알을 피하는 장면, 그리고 모피어스가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밀며 주인공의 선택을 요구하는 장면은 은 너무나 유명해 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명은, 수많은 튜브와 센서가 꼽힌 주인공이 거대한 기계에 연결된 인공자궁 속에서 깨어나는 모습이다. 인공지능(AI)에 의해 ‘길러지는’ 인류가 단지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며, 허구 속에서 자신도 모른 체 착취당하는 그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이 세상에 만든 수많은 ‘인공자궁’들을 생각하면 대상이 인간일 뿐이지 현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2017년 9월 기준 우리나라에는 1.7억 마리의 닭이 사육되고 연간 7억 마리가 도축된다. 닭의 기대수명은 30년, 토종닭의 경우 45년까지 산다고 한다. 하지만 양계장에서 길러지는 닭의 수명은 고작 7~12년이고, 육질과 사료비용을 위해 생후 30일 정도에 도축된다. 인간으로 치면 사춘기도 지나지 않은 시절, 닭과 병아리의 중간상태로 식탁 위에 올려지는 것이다.


대형 축산농장의 도축 현장을 본 사람이라면, 매트릭스의 인공자궁이 인간이 만든 도축시설에 비해 훨씬 안락하고,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인도적이라 느낄 것이다. 거기서 도망칠 생각만 없다면 말이다.


인간은 동식물뿐 아니라 같은 종인 인간도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쟁을 일으켜 국가나 도시 전체를 약탈하고, 식민지를 만들어 한 지역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한다. 중세시대 지주들이 ‘인클로저’를 통해 소작농을 착취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조물주 위의 건물주’는 소상인들로부터 불로소득을 얻는다.


어떻게 보면 헌법에 명시한 세금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합의된 착취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알게 모르게 꼽힌 수많은 튜브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 농업과 노예제도


착취의 역사는 항상 인간의 문명과 함께했다. 역사학자들은 BC 10,000년경 끝난 최근의 빙하기 후 일 년 중 춥고 건조한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수렵채집을 하던 인간이 농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식용이 가능한 한해살이 곡물(쌀, 밀, 콩, 감자 등)은 보관이 가능하여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토양이 좋은 강 하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명이 발달하며 농업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농업은 잉여 생산과 축적이 가능하기에,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식량 보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농업을 선택한 인류는 힘든 노동에서 자유롭기 위해 권력을 행사해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노예제도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노예제의 흔적은 BC 35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침입한 유목민들을 생포해서 노예로 만들었고, 이후 범죄자나 채무자들 같은 자국민과 이주민도 노예로 만들었단 기록이 있다. 자신과 다른, 또는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존재를 죽이지 않고 효용가치를 만드는 형태로 노예제는 시작됐다.


이런 방식의 노동력 착취는, 자율성이나 활동 제한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집트, 인더스, 중국, 이슬람, 그리스, 로마 등 농업사회를 시작한 모든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서로 교류가 없던 다양한 문명이 다발적으로 노예제도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런 반인륜적인 제도를 만들고 유지한 것일까?


과거 권력층은 물론이고 지식인들도 대부분 노예제를 옹호하며 이를 합리화했다. 플라톤은 그리스인을 제외한 다른 문명의 사람들은 ‘야만인’이기 때문에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힘이 곧 정의다'라는 독트린을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지적 능력과 도덕성과는 무관하게, 전쟁이나 권력싸움의 결과에 따라 자유인과 노예가 구분하는 불합리성을 내포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상심한 귀족 플라톤은 아테네를 떠나 정치적 이상을 품고 시칠리아에 가는데, 그곳에서 그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국가반역자로 몰려 노예로 팔린 후 구출된 적이 있다. 이후 그는 정치적 야망을 버리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이를 합리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람들은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않고 태어났다"라며 '노예 천성론'을 내세우며 노예제도를 자연의 질서에 담는다. 이를 근거로 수세기에 걸친 착취와 불평등, 그리고 인종학살까지 이어진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박애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인들도 착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노예제를 정당화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수잔 바우어(Susan Wise Bauer)는 노예를 소유한 기독교인들이 신약성서의 '노예의 복종의무'를 교묘히 바꾸어 해석함으로써 노예제를 정당화했다 주장한다.


신약성서의 에베소서 6장 5절에 나온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란 구절을 이야기하며, 본래 의도가 당시의 '상황 설명(Descriptive of the state)'을 통해 올바른 행동을 규정한 것인데, 기독교 노예 소유주들이 이를 '관례적(Prescriptive)'으로 해석하고 이를 규범화하여, 마치 "주인은 노예를 가질 권리가 있고, 노예는 어떤 상황에도 복종해야 한다"라는 전재를 의도한 것이라 주장한다.


에베소서 9절에 적힌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의 맥락을 뺀체 '선택적 직해(Selective Literalism)'로 성서의 의도를 왜곡한 사례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는 "권력과 탐욕에 눈이 먼 행위”라 비판한다.



>>도구에서 자원으로


초기 노예제도는 노동력을 공급하는 수단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예는 부를 창출하는 '자원'으로 바뀐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기존 지역 중심으로 국한된 노예제도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를 맞으며 국가와 대륙을 넘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충남대 사학과에 재직 중인 차전환 교수는 그의 저서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제 사회가 출현한 것은 정복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며,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정복 전쟁을 벌인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정복 전쟁의 목표는 노예 공급을 위한 '저수지'를 확보하는 것이라 표현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은 ‘야만인’이란 개념을 만들어 전쟁을 벌인 것도, 16세기 시작한 미국과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도 결국 정복전쟁을 통해 '노예 저수지'를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동 수단의 발달과 함께 문화가 융합하면서 문명 수준에 따라 권력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이 저수지 확보 전쟁은 미국 식민지 시절 럼주(Rum)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생긴 북미 삼각무역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낳는다. 아프리카 황금해안에서 구입한 흑인 노예를 카리브해의 섬에 끌고 와서 사탕수수 농사에 투입하고, 거기서 생산된 당밀은 북미 뉴잉글랜드 럼주 제조사로 보내진다. 이렇게 생산된 럼주는 일부 판매되고 나머지는 다시 아프리카로 유통되어 더 많은 노예를 사들이는 통화로 사용된다.


이런 순환 체제가 이어지며 노예무역은 점점 과열되는 양상으로 번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아프리카 부족들이 서로 싸우며 노예를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왜 가까운 남미나 북미 원주민을 두고 아프리카가 노예의 저수지가 된 것일까?

 

식민지 노예제도는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황금을 얻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으나 막상 많은 양의 금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사탕수수와 담배 등을 재배해서 본국으로 보내는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처음에는 카리브해 원주민을 사탕수수 농사에 투입했지만 혹독한 사탕수수 농사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 죽는 것을 보며 고민에 빠진다. 그러던 중 1517년 한 가톨릭 주교가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고된 노역과 질병에도 높은 생존율을 보이는 것을 파악하고 스페인 왕 카를로스 5세에게 아프리카 인들을 노예로 이주시키는 것을 요청했다. 이는 곧 받아들여져 1520년부터 본격적인 대규모 흑인 노예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삼각무역은 북미 자본가에게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의회는 밀수와 영국 상인에 대한 피해를 이유로 1764년 설탕 법(Sugar Act)을 제정한다. 이 법은 당시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5~1763)과 영국에 반발한 폰티액 인디언 족에 의한 폰티액 전쟁(1763)으로 인해 늘어난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미국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반발심을 높이고 독립에 대한 갈망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진다. 결국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커다란 도화선이 되어 1783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영국의 착취에서 벗어난 후 프랑스 등으로부터 서부지역을 구매하며 담배농사와 함께 발전한 서부개척시대는 1820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와 함께 또 다른 착취의 형태로 이어진다.


당시 북미 대륙의 원주민(흔히 인디언이 불리지만 인디언이 아닌)들은 흑인 노예들에 비해 신체적으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백인이 옮기는 천연두 등의 질병에 취약했으며, 전사로써의 기질까지 강해 노예로 길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황금이라는 더 큰 탐욕이 발동한 백인들은 그들을 길들이는 것이 아닌 인종 말살 정책을 펼친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와 달리, 미국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이었기에 북미 인디언들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세 차례의 대학살에 의해 약 300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결국 자신이 살던 땅만 뺏기고 자신의 노동력은 착취에서 조차 소외되는 독특한 결과를 맞는다. 북미 원주민은 현재까지도 실업, 도박, 마약중독, 자살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 새로운 탐욕: 석유


이후 1861년 남북전쟁과 세계 각지의 노예 해방운동이 일어나면서 노예를 통한 착취는 일부 진정되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하지만 노예해방이 생긴 이유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이성적이고 선하게 바뀌어서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노예제도가 사라진 진짜 이유는 인간의 노동력이 다른 에너지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립 초기 대규모 사탕수수 및 담배농장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영국이 산업혁명과 함께 대규모 방직산업에 뛰어들면서 목화 수요가 급증하자 남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목화 재배가 이루어진다.


목화 농사는 씨에서 면을 뽑는 과정이 어렵고 수작업인 탓에 수많은 노예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1793년 엘리 휘트니(Eli Whitney)에 의해 발명된 조면기(cotton) gin)에 의해 이 과정이 손쉬워지고, 북부 공업도시를 중심으로 수력을 활용한 대규모 섬유 생산 기계가 보급되면서 남부의 농장주와 북부의 방직공장은 노예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온도 차이가 생긴다.


여기에 1840년 미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증기 및 내연기관의 보급은 '힘만 쓰는 노예'보다는 ‘숙련된 공장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미국은 결국 1863년 ‘노예해방 선언’을 발표한다.


산업혁명 이후 20세기를 넘어오며 격은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는 석유가 가진 거대한 힘을 확인하며 착취의 대상을 인간에서 석유로 바꾼다.


과거 ‘인간의 전쟁’은 군량미가 가장 중요한 전쟁 물자였지만, ‘기계의 전쟁’인 현대전은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고 움직이는 석유가 핵심자원이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통해 이를 확인한 강대국들은 기존 석탄으로 움직이던 증기 전함들은 보다 가볍고 연기를 덜 발생하는 석유 연료로 속속들이 전환했다. 주 전력인 장갑차와 전투기 역시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기에 안정적인 석유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요소로 굳어졌다.


하지만 전 세계 각지에 비교적 고르게 분포된 석탄과 달리 석유의 경우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기에, 이런 흐름은 20세기 초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중동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우리가 일본 식민 지배에 맞서 1919년 3.1 운동과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피를 흘리던 즈음, 서구에는 1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결정되어 승전국들의 만찬이 시작되고 있었다.


19세기에 일어난 영국과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쟁탈전, 'The Great Game(1830~1895)'의 선수였던 영국과 러시아는 중동이란 먹이를 두고 긴 싸움을 하던 중, 독일의 움직임이 중동으로 향하는 것을 감지함에 따라 서로 급히 화해한다. 이후 프랑스 등과 삼국동맹(Triple Alliance)을 결성했고, 이에 맞선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는 삼제동맹(Dreikaiserabkommen, League of the Three Emperors)을 형성하여 각자 세력을 키웠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오스트리아 왕태자를 향한 세르비아계 청년의 '단 두발의 총성'으로 인해 벌어진 세계의 첫 번째 대전(大戰, Great War), 훗날 1차 세계대전(1914 ~ 1918)으로 불리는 거대한 패싸움은 매우 격렬하고 신속하게 진행됐다. 불과 4년 만에 77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이 비극적인 싸움은 역사상 두 번째로 치명적인 전쟁으로 이름을 남겼다. 물론 첫 번째는 그 두 배에 가까운 군인과 수많은 민족학살이 있었던 2차 세계대전이다.

 

이 싸움의 발단,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에 날린 가벼운 ‘어깨빵’이 모두의 패싸움으로 번진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제국주의(Imperialism)의 탐욕과 민족주의(Nationalism)의 충돌 속에서 쌓인 긴장이 자본주의와 결합한 석유에 대한 탐욕의 불씨가 옮겨 붙으며 순식간에 폭발한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쌓인 시대적 갈등, 그리고 눈앞의 이익에 대한 탐욕이 사소한 이유를 핑계로 폭발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살펴볼 것은 선 빵을 날린 이유로 엄청난 빚더미에 오른 패전국 독일이 아니다. 그들이 술을 마시며 파티를 즐기던 술집 주인의 입장이다. 물론 그날 파티 장소는 오토만 제국(Ottoman Empire)이 지배하던 중동이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승전국들은 몰락한 오스만 제국의 중동 지역 해체(Deconstruction) 작업, 그 시작을 알리는 사익스 피코(Sykes-Picot) 협약 이행을 위해 1920년 프랑스 산 리모(San Remo)에 모였다. 이는 1917년 '발포 선언(Balfour Declaration)'과 1919년 6월 '베르사유 평화협정(Treaty of Versailles)'에 따라 Big Three가 모여 만든 League of Nation 중심의 새로운 질서의 이권 분배를 실질적으로 나눈 자리였다. 겉으로는 평화를 추구하는 평화협정의 이면에는 중동 석유를 누가 얼마나 착취할 것인가 하는 각자의 속내가 숨어있던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은 프랑스의 통치에 들어갔고, 영국은 요르단, 쿠웨이트 등을 접수했다. 사익스 피코(Sykes-Picot) 협약은 중동 아랍 민족이 서구 열강의 탐욕에 의해 갈가리 찠긴 중동 역사 비극의 시작을 울리는 서막이었다. 이는 10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당시 무력(武力)에 의해 나뉜 국경과, 오랜 역사 속에서 민족에 의해 나뉜 국경 간의 갈등 속으로 수많은 중동 인을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들의 피를 탐하며 지역 분쟁을 통한 석유 패권 싸움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중동국가들은 유전이 발견된 시기와 국가의 독립 여부에 따라 석유전쟁의 ‘헬게이트’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상황을 겪었다.


이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우드 왕가는 전체주의 국가 중 가장 큰 국민의 사랑을 받는 왕가로 자리 잡는다. 국민의 대부분이 “근성의 사우드 왕가가 아니었다면 독립을 포기했을 것이고, 식민 상태에서 석유가 발견되었으면 지금의 국가가 아니라 헬게이트가 되었을 것이다” 라며 안도감을 나타낸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투쟁 끝에 1902년 세운 독립국가를 시작으로 1934년에 이르러 지금의 국경으로 확장한다. 193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견된 첫 유전이 좀 더 일찍 발견되었다면 지금의 시리아나 리비아 같은 헬게이트를 겪었을 것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민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 새로운 빨대: 자본


고대 노예제도에서 이어진 힘에 의한 착취는 헌법이라는 기본 원리와 규범을 정하고 이것이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더 이상 물리적인 억압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하는 것, 즉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이 20세기를 지나온 인류의 공동 목표였기 때문이다.


21세기 대부분의 국가가 채택한 민주공화정은 개인과 다수의 억압을 법으로 금지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 철학이다. 이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매우 이례적으로 조문 자체에 ‘민주공화국’ 임을 선포한다. 하지만 우리가 최근 겪은 것처럼, 그리고 북한 역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 불리는 것처럼, 선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를 견지하기 위한 법률 체제와 다수의 참여가 필요하다. 하지만 과연 진정한 민주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할까?


민주공화제를 먼저 도입했고 우리 헌법의 기틀이 된 미국을 살펴보자. 미국은 태생부터 영국의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흑인 노예제 및 격리, 북미 원주민 말살, 동유럽 이민자 차별, 중국 철도 노동자 착취, 일본인 강제 수용 등 인종을 이유로 가장 버라이어티 한 차별을 자행한 국가이다. 물론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라 불리는 특성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멕시코에 벽을 쌓아 ‘국가차별’을 하겠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는 미국의 차별에 비하면, 우리의 지역감정은 애교로 보일 정도이다.


2015년 기준 미국 인구의 17.1%가 히스패닉 계열이고,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는 38.8%, 가장 많은 뉴멕시코의 경우 48%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발언의 의도와 근거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 이면에는 미국을 급속도로 발전시킨 자본주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1867년 출간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본질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필요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한 후 이를 초과하여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얻어 설비 등에 재투자하면서 생산을 확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노동자의 몫이 감소되고, 자본과 노동의 불균형을 만들어 실업과 빈곤의 끊임없는 악순환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태는 결국 유산계급(프롤레타리안)의 혁명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를 남긴다.


현대 자본주의가 지나온 과정을 보면 150년 전 던진 이런 경고가 무색하다. 특히 군사독재 시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던 대한민국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더욱 강력한 자본가’를 초월한 모습인 ‘재벌’을 탄생시키며 차별과 착취의 새로운 국면을 낳는다. 그 결과 ‘흙수저’, ‘비정규직’, ‘헬조선’ 등의 단어를 사회에 등장시켰고, 착취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착취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차별에 대한 조건을 만드는 것에 있다. 그것이 인종이든 계급이든 관계없다. 경제적, 물리적, 생물학적으로든 어떤 이유라도 갖다 붙여서 차별하고 배분에서 소외시키는 것이 Exploitation 101 수업의 학습계획서(Syllabus)다.


아프리카의 ‘흑인 분리정책(Apartheid)’, 미국의 ‘한 방울 원칙(One-drop Rule)’, 한국의 ‘영호남 차별’ 모두 어느 집단을 소외시켜 억압과 착취를 통해 보다 많은 권력과 자본을 한 집단에게 몰아주는 행위이다. 이로 인해 강자는 더 강해지고, 약자는 더 약해지는 악순환이 생기는데,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하에서는 이런 모순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예언도 함께 남겼다.


그 결과 현대 사회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인해 중간계층이 사라지고 점점 하위계층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돼 사회 존립의 위협마저 가할 것이다.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얀 펜(Jan Pen)은 1971년 그의 저서 『소득분배(Income Distribution)』에서 소득 불평등에 관한 새로운 표현 방식을 제안한다. ‘난쟁이의 행렬’, 영어로는 ‘The Height of Inequality’로 잘 알려진 이 방법은, 소득이 가장 낮은 사람부터 가장 높은 사람까지 일렬로 퍼레이드 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앞줄의 사람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형태로 시작한 반면, 마지막 사람은 겨우 다리밖에 안 보이는 거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기발한 방법은 <한겨레신문>이 2007년 한국의 소득분포를 적용하여 언론에 기사화되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은 ‘거인’에 의해 평균소득이 올라가면서 실제 우리가 느끼는 “평균소득’과의 차이를 깨닿게 되면서 박탈감을 받았다. 실제 평균소득인 30분에 나타나는 279만 원과 우리가 평소 듣는 평균소득인 322만 원(37분에 출현)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 이 통계를 작성한 통계청이 600만 원을 고소득의 상한선으로 정한 것으로, 이 통계는 말 그대로 소득에 대한 통계인 것으로, 이건희 같은 재벌이나 재산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벌 2세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아마 제대로 된 통계가 나올 때는 ‘난쟁이의 행렬’이란 말이 무색해져 ‘벼룩들의 행렬’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 애프터 매스(Aftermath): 괴물


자본주의의 늪은 인간의 탐욕을 조절하지 않은채 생산을 늘려 국가경제를 확대시키려는 그릇된 욕심과 함께 커진 것이다. 이 방식은 산업혁명이라는 유용한 도구를 만들어 문명을 빠르게 발전시켰지만,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경쟁하는 다수의 자본에 의한 경쟁’, 즉 전쟁이라는 필연적인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도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한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전쟁은 국가의 완전고용과 제품의 무재고 상태를 만드는 최적 생산 시스템을 제공한다. 따라서 강대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수천 년 전 농업을 선택한 인간이 노예제도를 선택한 것과 같이, 자본주의를 선택한 세계가 전쟁을 선택한 것은 자연의 섭리와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노예 천성론’은 미국이 상대 국가의 의도나 종교 또는 사상을 반영하지 않은채 덧씌운 ‘악의 축’과 많은 부분 닮아 있다. 자신의 탐욕을 위장하기 위해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은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우리 사회에 존재했다. 그리고 힘의 논리에 의해 그 주장이 받아지고 나면 그 모든 피해는 약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대공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였으며, 부수적으로 항공우주 및 원자력 등의 방위산업의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한편, 공동의 적이었던 독일이 추락하고 미국은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의 반란으로 인해 늘어나는 공산주의 국가의 확산에 따라 시장이 축소되면서 감소하는 수요를 막기 위한 ‘땅따먹기 게임’이 시작된다.


냉전체제는 양강인 미국과 소련의 영토가 아닌 한국,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 수많은 지역에서 전쟁을 벌인다. 지구를 초토화시킬 만큼의 핵무기를 가진 두 마리의 거대한 고래가 눈싸움을 하는 동안 스스로 등을 꺾은 세우가 바로 한반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를 가장한 두 강대국의 시장 확보 경쟁은 해당 지역을 초토화하는 반면 자신의 국가는 끊임없이 화약과 무기를 만드는 생산공장으로 인해 커다란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비료나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 등으로 전환하여 국가재건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판매한다. 물론 초기에는 그냥 주기도 한다.


미국은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등지에서 수도 없이 ‘악의 축’에 대한 ‘세계 경찰’ 의무를 한다는 명목 하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하지만 그 속내는 그 땅의 석유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전 미국 공군 보좌관 찰스 발트(Charles F. Wald)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1980년 이래로 미국은 최소 14개의 이슬람 국가를 침략, 점령 및 폭격했다. 수천 명의 미국인과 수 조 달러의 희생을 치른 이후, 이 지역은 죽음과 파괴의 가마솥이 됐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며 “이런 행위는 우리가 사는 동안 계속 지속될 것"이라며 솔직한 심경을 전한다.


국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국가를 인공자궁 속에 가두는 일을 서슴지 않고, 국익을 위해서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스스로 정당화한다. 이는 마치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사회계약의 의무가 있는 ‘리바이어던’ 이 자본주의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모습과 같다. 자신의 국민도, 타국의 국민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괴물로 변한 리바이어던, 영화 매트릭스는 인공자궁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괴물의 모습은 미국이란 강대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물론 몸집이 큰 만큼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먹어 치웠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는 크고 작은 ‘리바이어던’이 수도 없이 널려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권력이 놓인 자리에는 항상 괴물의 알이 숨어있고, 사람들이 감시하지 않은 알은 언젠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썩을 데로 썩은 부패한 정권, 그런 정권을 쥐고 흔드는 재벌, 그 재벌에 빨대를 꼽은 비선실세, 그리고 대통령의 무지함을 이용해 국가에 빨대를 꼽은 수많은 세력들은 결국 거대 괴물로 성장하는데 제동이 걸렸지만, 대한민국이 수십 년 더 후퇴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을 연출했다.


플라톤의 명언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는 잘못된 번역으로 알려졌지만, 그렇게 번역한 사람도 일리가 있다. 이를 지금 사회에 적용하면 “권력을 감시하지 않은 국민이 받는 가장 큰 대가는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란 교훈을 주기 위함은 아닐까?


2018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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