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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풍 Dec 06. 2017

노슬아치

세대갈등의 현주소

>> 200년을 넘어온 갈등


'노슬아치’란 말이 있다. ‘노인’과 ‘벼슬아치’의 합성어로 2015년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떠돌기 시작했으며, 이후 방송과 신문에서도 종종 나오곤 했다. ‘요즘 젊은것들’이 기성세대, 그중에도 노인세대를 폄하하는 이 신조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구조 속 일부를 조명한다.


1818년 다산(茶山)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는 1800년 정조 서거 후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며 쓰였다. 당시 안동 김씨와 풍산 조씨의 세도정치는 뇌물과 인사제도 타락으로 정치 기강을 붕괴시켰고, 이후 60년간 조선을 쇠락의 길로 인도하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런 시국에서 하급관료들은 아첨을 일삼기 바빴고, 벼슬을 얻기 위해 붉게 바랜 싸구려 탕건을 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모이를 쫓아다니는 닭과 같다 하여 닭의 ‘볏’을 빗대 ‘벼슬아치’라 비하했다.


관직에 있으며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고 권세만 누리려 하는 것을 비판하는 말인 ‘벼슬아치’, 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우리가 다시 소환하게 된 이유는 그만큼 갈등의 골이 깊어진 우리 사회를 꼬집고 있다. <목민심서>가 세상에 나온 지 정확히 200년 되는 2017년, 여느 때보다 많은 사회적 이슈와 쏟아져 나오는 지금, 수많은 문제의 밑바탕에는 '세대갈등'이란 숨은 암초가 깔려있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 중 '민생'관련 정책, 그러니까 교육, 보육, 복지, 부동산, 일자리, 저 출산, 건강보험, 고령화 같은 정책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정책들은 여당과 야당, 또는 지역을 나눠 다투는 것이 아니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청년층, 중년층 그리고 노년층의 이해관계 속에서 출동이 발생한다. 어쩌면 경제 불황, 외교·안보문제 등 커다란 이슈들보다, 우리가 가슴에 품고 외면에 내비치기 껄끄러운 이해관계를 동반한 문제들이 오히려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껄끄러운 주제들은 인터넷이란 숨은 공간에서 은밀하게 퍼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들어온다.


‘노슬아치’라니. 유교 문화권에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미덕으로 삼고 살던 우리 민족이 뱉어낸 말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이 현상은 그냥 웃어넘길 만한 가벼운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 사회가 매우 위험한 갈등으로 치닫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단어에서 느껴지는 세대 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원인인지 이해해야 하고, 점점 빠르게 양극단으로 몰리는 세대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해법을 하루빨리 찾아야 할 것이다.



>> 약자들의 Zero-sum 게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촛불 시위를 경험하며 높아진 시민의식과 민주정치의 변화는 외향적 측면에서 선진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시민혁명이 봉건제도를 무너뜨린 경험을 통해 자주적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듯, 뒤늦게나마 경험한 최근 우리의 시민혁명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첫걸음에 불과하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맞게 될 변화는 지난 모든 변화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거대하고 매우 은밀하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 가지고 올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실제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진 아무도 알 수 없고, 사실 벌써 고민할 필요도 없다. 지금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인공지능에 따른 실업 문제는 단순히 인간을 편하게 하는 결과로 허무하게 끝날 수 있다. 저 출산 사회도 마찬가지다. 노동력이 덜 필요한 사회에서 줄어든 인구는 지금의 식량난과 자원 부족을 극복하고, 개개인이 인간 본연의 가치를 더 누릴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걱정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나약했던 인류가 진화하면서 겪은 수많은 트라우마에서 온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실제 우리가 더욱 신경 써야 할 것은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엄청난 불행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적이고 소소한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지금 우리나라의 신세대와 기성세대는 서로를 알기 위한 노력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 


1980년 GDP가 650억 불 일 때 30대 가정을 꾸리던 지금 노인세대와, 그보다 21배 규모인 GDP 1.4조 불의 우리나라에서 30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생각과 관점이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닐까? 어쩌면 '다름' 그 자체가 자제가 아니고 그 '다름'을 살필 여유가 지금 사회에 없어 생긴 문제일지도 모른다.


갈등은 기본적으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멀리하고, 멀리하다 보니 달라진다. 그런 인과를 모르고 서로의 다름을 보게 되면 생기는 것이 피아彼我구분이다. 그 상태에서 이해利害가 얽히면 갈등이 된다. 지금의 청년층과 노년층이 겪는 갈등인 ‘노인 혐오’ 현상은 무지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기존 세대의 특권의식과, 권력서열을 부정하는 젊은 세대의 싸움이며, 여기서 슬픈 것은 갈등의 주체인 양쪽 모두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무책임한 정부, 그리고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이 논란을 방치하는데 기여한다.


이런 세대갈등은 독특한 유교문화와 일제시대의 잔재인 군대식 교육문화의 산물로, 우리 사회에 오랜 기간 내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를 본격적인 사회적 이슈로 끌어낸 계기는 2015년 9월 발생한 ‘수유역 임산부 폭행 사건’, 임신 10주 차 임산부가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한 사건이다. 


임산부는 어깨를 때리며 노약자석 팻말을 가리키며 시비를 거는 남성에게 자신이 임산부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성은 ‘이런 어린년이 싹수없게’라는 욕설을 했다고 한다. 이후 도망가는 과정에서는 임산부의 배를 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린, 년, 싸가지. 무심코 뱉은 말 치고는 너무나 정확하게 우리 사회의 갈등을 정의한다. 마치 이 남자의 뇌구조만 바꿀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 대부분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길 정도다. 이 사건이 공론화된 후 분홍색의 여성전용 칸이 생겼지만 이런 조치가 근본적인 해결책인지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수도 없이 많다. 출근을 위해 기차 지정석에서 잠을 자는 청년의 머리를 ‘후려 치며’ 깨워 강재 양보시킨 노인, 등산을 가면서 버스에 무임승차한 후 적반하장으로 버스기사에게 폭언 폭행을 하는 노인, 만삭 임산부 앞에서 등산복 입고 웃고 떠드는 노인 등, 노슬아치란 말이 어울릴만한 행동을 하는 사건들이 언제부턴가 부쩍 늘어났다. 


전형적인 약자의 싸움으로 볼 수 있는 이런 사건들은 어쩌면 사회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약자인 어린이, 임산부, 노인, 장애인 등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와 인식개선을 위한 노력이 아닌, 부문별 한 제도와 전시행정展示行政으로 일관하는 우리나라의 관료주의 사회 풍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을 줄이는 방법은 1) 서로를 입장을 이해하는 것, 2) 함께 공감하고 합의하는 것, 그리고 3)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 이 정도만 충족되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나 간단해 보이는 이 과정이 생각보다 어려운 이유는 뭘까? 임산부 폭행 사건 이후 몇 명의 공무원이 서류를 작성해서 분홍색 좌석을 몇 개 설치하는 것이 해결책이 안된다는 것은 이미 모두 아는 사실이다. 임산부 전용석이 생긴 후, ‘임신이 벼슬이냐’라는 비판이 역으로 회자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약자들의 Zero-sum 게임이 이미 심각한 수준까지 와있음을 증명한다.



>> 세대갈등에 더해진 무거운 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비 효과’는 우연히 생긴 작은 일이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7년 전쟁이 낳은 우연의 여파로 생긴 독일 제국과 미국의 독립, 그리고 단 두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 발생된 2015년 10월 정운호 대표 구속에서 시작한 최순실 사태, 이 모든 것이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보험회사의 손실통제 부서에서 근무하던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그의 책 <산업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 Industrial Accident Prevention: A Scientific Approach>에서 5000여 건의 산업재해를 분석한 결과 나비효과와 유사한 산업재해 사고 발생의 법칙을 발견한다. 1:29:300의 비율로 유명한 이 법칙은, 중상자 1명이 발생하기 전 29건의 경상 사고가 먼저 발생하고 그 전에는 300건의 잠재적 위험이 발견된다고 한다.


지금의 세대갈등이 29건에 포함하는지, 아니면 300건에 포함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인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앞날에 분명 더욱 큰 갈등으로 그리고 사건으로 이어질 것임은 확실하다.


이제 겨우 2부 능선을 바라보는 21세기의 우리는 벌써 엄청난 사건들을 수 차례 치르지 않았는가. 이제 겨우 첫걸음을 땐 앞으로의 21세기 속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통일, 인구감소, 자원고갈, 환경 및 생태계 교란 등의 거시적 문제와 함께 일자리, 부동산 가격, 출산과 육아와 같이 보다 현실적이고 소소한 문제들이 줄이어 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은 공정한 세금 납부, 그리고 효율성과 형평성을 추구하는 예산 분배이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전쟁의 위협이 존재하기에 2017년 기준 40조 원을 국방비로 지출하며, 총세수는 400조 원 규모이다. 보통 GDP 대비 국방비라 해서 3% 대라 주장하지만 실제 들어오는 세금의 10% 가까이 국방비에 쓰고 있다. 여기에 최저임금인 월 126만 원의 5분의 1도 안 되는 19만 원에 징병되는 인적자원의 기회비용은 덤으로 국민소득의 전생애주기를 갉아먹는다. 국방비리 등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버는 돈의 10%가 기본 부담으로 존재하는 것은 예산 구조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추가로, 우리나라는 국민의 희생을 기반으로 수출 중심의 산업 성장을 위한 정책들이 무수히 많다. 기업의 법인세는 논란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 많이 낮고 이를 지원하는 정책 자금도 ‘눈먼 돈’의 형태로 기업들에게 몰려간다. 또한 오랜 논란이 있었던 전기요금도 현실을 파헤쳐 보면 낮은 산업용 전기요금을 통해 수출원가를 줄여주고, 누진세를 통해 가정용 전력 부하를 조정하고 세수도 올리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이 역시 모든 것은 국민 부담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재벌 총수의 상속세는 온갖 방식으로 줄여지고 있다. 최근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330조 원 규모의 삼성그룹을 인계받으며 고작 16억 원의 상속세만 낸 이재용 부회장이 있다. 반면, 규모 면에서 비교도 안 되는 오뚜기에서 상속세 1500억 원을 낸 것을 보면, 수 조 원의 세수가 증발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매년 60조 원 규모의 부동산이 대물림되는 과정에서는 고작 1.9%만이 상속세를 내도록 임대사업자 관련 법안을 만들어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부자의 천국’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부담은 매우 공평하게 국민 개개인에게 돌아간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현실 속에서 쪼그라든 파이를 나누어 먹기 위한 치열한 싸움은, 특히 힘이 없는 사회 구조의 맨 아래쪽에서 더 치열하게 치러진다. 과거 우리 사회가 인종, 종교, 남녀, 계급 등 권력을 중심으로 한 큰 틀에서의 사회적 갈등이 주를 이뤘다면, 요즘 시대의 갈등의 원인은 너무 세부적이고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경제권을 그 중심에 두고 있어 해결이 매우 어렵다. 


노인과 여성, 취업세대와 은퇴세대, 그리고 저임금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등 양극단에 놓인 약자들 간의 대립은 기존의 갈등 양상과는 크게 달라 해법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점점 치열한 국면으로 향하고 있고 점점 갈등을 넘어 사회분열로 넘어가는 모습이다.



>> 갈등이 해소될 즈음


갈등이란 말은 ‘칡 갈(葛)’과 ‘등나무 등(藤)’에서 유래한다. 칡과 등나무는 비슷한 뿌리를 가진 덩굴과 식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무를 감싸면서 자라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이 둘이 한 곳에서 자라면 잘 자라지 못하여 이를 보고 일이 까다롭게 서로 얽혀서 풀기 어려워진 상태, 또는 서로 간의 의견이 대립함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를 갈등이라 부른다. 영어의 Conflict 역시 라틴어로 ‘함께’를 의미하는 ‘Con’과 ‘충돌’을 의미하는 ‘Fligere’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은 필연적으로 갈등이란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이것을 회피하거나 억지로 없애려는 행위는 오히려 갈등의 본질을 이해 못한 체 더 큰 혼란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전시행정을 위해 지하철에 분홍색 좌석을 설치하고 보람을 느끼는 공무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갈등은 학습 가능한 개념이기에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은 사람의 사고를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된다. 또한 갈등을 거치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은 우리가 Comfort Zone을 벗어나 보다 창조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갈등(Conflict)을 각자의 주관에서 다룰 때 쓰는 말은 긴장(Tension)이다.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후, 어쩌면 훨씬 전부터 안팎으로 긴장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왔다. 거기에 더해 부족한 자원과 지리적 여건은 우리 민족이 억새풀처럼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벼’과의 식물이지만 평지의 물가에서 자란 갈대와 달리, 중간중간 마디도 없고 길이도 짧으며 항상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을 하는 억새풀은 보이는 것과 달리, 이름처럼 억새다. 달리 말해 긴장에 강한 식물이다.


음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Tension이란 단어를 접한다. 피아노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화성和聲(Harmonics)에서의 Tension은 일반적인 화음(도-미-솔) 밖의 음정을 Tension이라고 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바이엘이나 체르니 같은 정곡법적인 화성 교본에서 보는 것이 일반 화성이라면, 복잡한 재즈 곡에서 묘한 긴장감을 주는 것이 이 Tension(긴장)의 역할이다. 음악에 있어 이 긴장의 역할은, 불협을 통해 몰린 화성학적 위기 상황을 극적으로 화음으로 해소함으로써 보다 풍성한 전개를 만들어 드라마틱한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일천한 나의 음악적 지식으로 볼 때, 불협을 통한 카타르시스는 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오랜 기간 수많은 역경을 겪은 사람이 성공을 하는 순간 많은 사람의 공감과 지지를 얻는 것처럼 말이다.


노슬아치란 말이 회자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한편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과거 ‘나이’라는 절대권력에 순응하던 젊은 세대가 이런 방식으로라도 사회적 모순에 대해 통찰을 가지고 풍자하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변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좀 더 많은 분야에 적용되어 숨은 갈등이 표면화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서로의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하는 문화가 형성된다면 분명 지금 보다는 선진국의 모습고 비슷하게 변하게 되지 않을까?


2017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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