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병
2017년 5월 미국 유명 소셜 뉴스 사이트 Reddit에 "한국 정치인의 스웨그(Korean Poitician Swag)"라는 게시물이 올라와 화제가 되었다. '노룩 패스'로 유명해진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의 이야기다. 공항에서 출국심사를 마치고 나오며 수행원에게 눈길도 안 주고 케리어를 떠미는 영상은 불과 5초밖에 안 되지만, "한국 엘리트의 민낯(Bare face of the Korean Elite)"란 비판을 받으며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김무성이란 정치인을 모르는 외국인들조차 그의 거만한 모습에서 염증을 느낀 것이다.
"이것은 스웨그가 아닌 부패한 시스템에 있는 한 구성원의 무례함이다.
(It's not swag it's extreme douchebaggery
from a member of a corrupt system.)"
해외 언론들은 그가 2015년 연탄배달 봉사활동에서 나이지리아 출신 유학생에게 얼굴색이 연탄과 같다는 말을 한 인종차별 발언과 함께 한국의 '개저씨(Gaejeossi)'와 '갑질(Gapjil)' 문화를 설명한다. 해외에서 한국의 상하 구조와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생각보다 정확하게 진단한 것이 상당히 신기했지만, 그보다는 부끄럽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왜 항상 부끄러움은 우리 몫일까?
영어로 'Ignorance'란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무지(無知)'란 말이지만, 실상에서는 좀 더 비판적인 성격을 띤다. "You are so ignorant."란 말은 인종이나 성차별 등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쓰는 말이다. '너 진짜 개념 없다'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이 말은 '꼰대'나 '개저씨' 같이 말이 통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을 비판할 때 사용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수입할 품목 최우선 순위로 이 단어를 꼽는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몰지각한 행동은 사람들의 분노와 수치를 자아낸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정상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의 행동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그들은 왜 개념 없는 행동을 하면서 항상 당당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성장이란 명목 아래 사회 공동체로써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한국의 부끄러운 고유 문화인 갑질을 살펴본다.
사회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해석한다. 사회의 법과 윤리, 그리고 행동 규범 등은 모두 이 이분법적 논리 위에 형성된다.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 것이 우리가 유년기 시절 배우는 사회성의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선악의 개념은 혼란에 빠진다. 나이가 들면 어른으로 인정하여 자의적 판단 권한을 부여해, 어릴 때 하던 '나쁜 짓'에 대해 더 이상 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이 살던 농경사회는 지금에 비해 매우 단조로운 생활 방식을 갖는다. 그 시대에는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당연히 '어른'이 돼서 존중을 받았다. 그들의 경험과 지식이 사회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다르다. 유튜버를 꿈꾸는 청년에게 해박한 농사지식을 가진 사람의 조언은 필요 없다. 나이는 곧 경험, 그러니까 나이가 든 만큼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수용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개저씨나 꼰대로 불리는 사람들을 만나면 세대갈등이 생긴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애가 강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변화를 주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삶의 밸런스를 중요시 여긴다. 이렇듯 요즘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삶에서 만 해도 수많은 생각의 모순으로 혼란스럽다. 또한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을 과거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훈수를 두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 시대의 정보 접근성은 역사상 최고치에 이른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대부분의 정보가 공급된다. 일부 경험에 따른 더 나은 판단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각자 살고 있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10년 차이는 중세시대 100년보다 더 큰 환경적 변화를 가져온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의 조언은 때론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유교문화에서 말하는 장유유서는 단순히 나이 어린 사람들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장유유서는 경험과 지식이 많은 윗사람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아랫사람을 배려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둔다. 장유유서에서 말하는 '차례'는 희생의 순서를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다. 수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특성을 고려해 먼저 희생함으로써 사회 통합을 도모했던 것이다.
유교사상의 나이 개념은 한두 살 차이로 계급을 나눈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십 년 터울까지는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원래 존중과 배려를 기본으로 한 좋은 문화가 일제식 군대문화에 의해 변질되면서 계급이 곧 '권력'이라는 논리를 낳았다. 이후 이런 억압적인 사회분위기는 우리의 군대 문화, 그리고 독재정권의 억압 속에서 상명하복이라는 원칙과 버무려져 갑질의 기본 틀을 만든다.
갑질은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위치와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들의 위치 간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이 좀 더 특별하다 느끼며, 보다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유아적 발상을 한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 남자이기 때문에, 고객이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가 상대보다 높다는 착각은 갑질의 기본 동기를 부여한다. 또한 그들은 그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하기에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수치심은 어린 시절에는 학습이 가능하지만 나이가 들면 점점 어려워진다. 수치심을 회피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돈, 언변, 폭력, 조직 등의 회피 수단은 그들이 사회성을 갖지 않아도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수단을 갖는 것은 자신의 몰지각한 행동도 정당화할 수 있는 무기를 얻는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 그들은 점점 더 위험한 존재로 바뀐다.
공감능력이 없어 남을 살해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는 유년기에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위험한 존재의 극단적인 사례이다. 사이코패스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도 못 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사회성이 결여된 성향을 가진 사람이 살인을 통해 쾌감을 얻으면 연쇄살인마가 되듯이, 갑질에서 쾌감을 얻는 사이코패스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꼰대나 개저씨가 되어 갑질을 시전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면 그 조직은 개인이 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을 만들어 리바이어던의 광기를 폭주시킨다. 이런 조직은 '일인을 위한 만인의 희생'도 서슴지 않는다. 과거 광주학살이나 천안문 사태와 같이 말이다. 수치심이란 기초적인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 권력을 잡고 타인의 감정을 배제한 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갑질의 본질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생각보다 이런 행태가 많이 보인다.
이러한 성향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그리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에 따라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로 구분된다. 한국의 갑질 문화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무례한 행동이 자신의 권리라 학습하고, 타인을 무력하게 굴복시킴으로써 자기만족을 얻는다. 상대방이 느끼는 공포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나 타인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소시오패스, 그리고 약자의 무력감을 통해 자신의 지배욕을 체우는 갑질의 심리는 한 뿌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폭력은 수치심을 자존감으로 바꾸기 위해 생겨난다.
- 제임스 길리건(James Gilligan)
연쇄살인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끄러움, 수치심, 죄책감이란 기본적인 사회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편의점 직원에게 뜨거운 라면을 던지거나 콜센터 직원에게 욕설을 하는 진상 고객의 갑질은 피해자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외국인 노동자를 폭행하는 사장, 남양유업 대리점 막말 사건 같은 조직적 갑질은 신성한 일터를 지옥으로 만든다. 용산 참사나 세월호 사건에서 보았듯 국가기관 안에도 갑질이 존재하는데, 이는 국가조차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우린 이미 경험했다.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인격과 관계없이 돈과 권력만 있으면 자신의 힘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회성과 수치심을 유년기에 배우지 못한 사람이 어른이 되어 힘을 얻게 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유년기에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줄도 모른 체 자기만족이나 이익을 향해 힘을 행사한다. 이들 중 일부는 이러한 특성을 잘 살려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한 기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기도 하고, 정치인이 되어 책임지지 않을 약속을 한 후 선거에 승리해 국회로 나간다.
사이코패스가 범죄자로 밝혀지기 전까지 일반인으로 숨어있듯,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대통령 비선 실세마저 이 뷰류의 사람이 차지했던 것을 보면, 생각보다 많은 곳에 있지 않을까 예상된다. 최근 연극계 성추행 파문을 일으킨 이윤택 같은 인물이 우리 사회 속에 얼마나 더 숨어 있는지 모른다. 그의 말대로 그들의 '관행'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괴물'이 존재할 것이다.
그 인간의 본성을 알고 싶거든
손에 권력을 쥐어줘 보라
- 에이브라햄 링컨
법과 규약 같은 행동규범은 사회나 조직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소수가 이를 만들기에 권력을 가진 쪽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제재 대상을 소수가 규정하며 비상식적인 법 집행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세시대 빵을 훔친 농노가 아녀자를 겁탈한 귀족보다 큰 벌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인권'이라는 개념이 확산되고, 성폭력이나 인종차별과 같은 약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 장치는 마련됐다. 하지만 여전히 일상에서의 무개념 한 개저씨의 행패나, 자신의 깨알 같은 권력을 휘두르는 갑질은 법적 처벌이 어렵다. 대기업과 같이 법무팀의 검토나 소송을 통해 약자를 괴롭힐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집단의 경우 두말할 것도 없이 오히려 법의 보호를 받는다.
우리 사회의 갑질은 대부분 도덕이라는 넓은 범주에서 법으로 정하지 않은 사각지대에서 발생한다. 그곳에서 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수준까지 자신이 가진 권력의 한계를 시험하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불만을 타인에게 떠넘기며 위안을 얻는 걸까? 아니면 현대 사회를 계급사회로 착각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월등하다 착각하는 것일까?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 갑질이 만연하게 된 것일까?
우리 사회는 상명하복 문화가 존재한다. '존대'라는 사회계층을 분리하는 기능이 언어에 장착된 우리나라의 경우, 법과 도덕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참고 견디는 사회적 풍토가 있어 무개념한 그들을 방치한다. 또한 권력자의 배려로 특별 사면되는 기득권이나, 휠체어를 타고 법원에 나가 감형을 받는 모습은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비정상적인 행태이다. 하지만 법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작동한다.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의 인내와 무기력감, 그리고 이기심에 따른 외면은 갑질을 무방비로 방치하는 경과를 낳았다.
한국의 갑질 문화를 처음 세계에 알린 것은 2014년 조현아 땅콩 회항사건이다. 해외에서 '땅콩 분노(Nut Rage)'로 알려진 이 사건은 뉴욕 JKF 공항에서 1등석에 탄 대한항공 오너 조양호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가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땅콩(정확히는 마카데미아)이 접시가 아닌 봉지에 담아 서빙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승무원을 비행기에서 내리라며 20분간 이륙을 멈추고 난동을 핀 사건이다.
조현아는 1심에서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지만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항로에 대한 해석을 이유로 삼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최근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반면 해당 승무원은 보직에서 해제되고 사내에서 화장실 청소 등 잡무를 하는 등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고, 정신적인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재판을 진행 중이다. 위자료로 청구한 금액은 3억 원이다. 상대의 경제력을 감안하면 너무 미미한 금액이지 않은가?
조현아의 행동은 법적으로 보면 항공운항 저해와 폭행죄, 그리고 항로 변경에 해당한다. 그마저도 중죄인 항로 변경은 지상에서 이동한 것이 항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판단으로, 최순실 사태의 혼란을 틈타 조용히 무죄가 선고됐다. 2017년 3월 한 치과의사가 대한항공 기내난동 사건을 일으키며 징역 2년을 구형받은 후, 항공기 난동행위를 강화해 최고 징역 10년에 처하는 규정 변경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판결이다.
동일 범죄에 대해 다른 논리를 적용하는 이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 무력에 의한 난동, 그리고 권력을 이용한 난동 정도의 차이일까? 전자에 비해 후자에 대한 조치가 너무 관대하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법 자체가 권력을 가진 자가 피해가기 쉽도록 설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1988년 지강헌 사건에서 나온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30년이 지나도록 유효한 외침이란 사실에 참담함을 감출 수 없다.
놀랍게도 심리학에서는 이런 무개념한 행동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남들과 공감하지 못하고 교묘하게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성격을 '어둠의 3요소(The Dark Triad)'라 한다. 이는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anism)과 나르시시즘(Narcissism), 사이코패시(Psychopathy) 세 가지 특징을 합친 것으로, 갑질을 하는 사람들의 성향과 매우 유사하다.
마키아벨리즘은 16세기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나온다. 1513년 <군주론(The Prince)>을 써 어두운 권모술수의 한 획을 그은 마키아벨리즘은 일구이언, 표리부동, 여론조작 등 모든 행위가 권력유지를 위해 허용된다는 그의 사상에서 비롯된다. 지나치게 권력을 정당화해서 군주가 비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1559년 교황청은 이를 금서로 지정했지만, 이 책은 이후 수많은 권력층과 독재 정권의 기본서가 되었다.
나르시시즘의 경우 자기애가 강하고 자기중심적 사고로 오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나타난다. 다른 두 가지 특징에 비해 아주 위험한 성향은 아니지만, 매우 골치 아픈 특징이란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과 마주하지 않았는가. 일반적으로 이 특징은 과잉보호를 받았거나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 또는 성공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 자주 발생한다.
사이코패스는 연민과 공감능력을 상실한 냉혈한 인간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이 살해하는 상대방의 얼굴에서 공포나 고통을 읽지 못할 정도로 교감능력이 없다. 물론 연쇄살인마가 된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도 살인에서 쾌락을 느끼지 않으면 연쇄살인마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갑질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명 이런 성향들이 쉽게 발견된다. 높은 교육열로 똑똑해진 우리 사회의 사이코패스들은 연쇄살인이 너무 큰 리스크를 내재하기에 법륙적 처벌이 어려운 갑질을 선택한 것일 수 있다.
갑질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성향 외에도 복잡한 문제를 내포한다. 분노장애나 반사회성, 그리고 자신이 받은 불이익을 남에게 넘기는 보복적 성향도 내포되어 있고, 자신이 커다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증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경우도 많다. 또한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릇된 유교문화적 사고방식, 일제 강점기와 긴 독재정권을 거치며 학습한 일반 시민들의 권력에 대한 무기력감은 그들의 횡포를 방치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갑질 방지법'이란 명명하에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약자를 조명한 보호장치 중심으로, 문제의 본질인 기득권이 가진 비정상적으로 큰 권력을 다루지 않는 반쪽짜리 법안으로 보인다. 소수에게 집중된 이 권력을 줄여 사람들에게 나누지 않으면, 갑질은 모습을 바꿔가며 계속될 것이다. 이기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을 권력으로부터 격리할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갑질과 같은 개념 없는 행동을 사회가 합의한 악(惡)으로 규정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법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피해가 쌓이면서 권력과 투쟁하며 최소한의 정의(正義)를 합의하는 과정이다. 흑인 노예나 여성을 사유재산으로 인정했던 역사는 지금 관점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이를 너무나 당연시 여겼기에 약자의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단순 육체노동에서 숙련 기술자로 바뀌며 노예제도는 사라졌고 여성의 정치 참여도 지금은 가능하다. 이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수많은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적 악은, 많은 경우 기득권이 누리는 해택이 존재하기에 이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매우 강하다. 따라서 이를 사회적으로 합의된 악으로 규명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분위기나 권력층의 변화가 필요하기에, 많은 사람들의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김무성이나 조현아의 행동을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합의된 악'이 규정되지 않았다. 국민의 법감정과 달리 실제 법 집행을 할 기준이 마련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악으로 규명하고 법으로 제재하는 과정은 사회가 발전하기 위한 절차이다. 한동안 사라진 듯했던 계급사회가 다시 생겨나며 갑질이 만연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를 자칭하는 대한민국의 수치다. 지금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없어져야 할 최우선 순위 과제인 것이다.
법은 근본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다. 최악의 상황을 사후에라도 처벌해서 정의를 바로잡는 기능이 주된 역할이다. 망가진 저울과 권력에 의해 쉽게 끊어지는 법망을 가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의 법은 더욱더 그러하다. 또한 그 법을 만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을 악으로 보지 않으면 변화가 불가능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국회에서 나오는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수치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망언들이 쏟아져 나온다.
다행히도 민주주의는 집권 기간을 정해두고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기능을 두고 있다. 극단적인 순간에는 대통령 탄핵도 할 수 있다는 것을 2003년 처음 알려준 당시 한나라당의 공헌으로, 2017년 우리는 실제 대통령을 탄핵시키기도 했다. 물론 다음 총선까지 무려 2년이란 긴 세월이 남았지만 국민적 수치심을 느낀 우리 사회는 소수 무개념 한 세력의 악행을 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차원에서 배제할 준비가 되어있다.
아무리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지켜본다면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선천적인 사이코패스조차 살인은 숨어서 한다. 이를 일말의 양심으로 볼지, 아니면 학습되고 계산된 행동으로 봐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감시는 그들을 제재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하고, 다소 긴 시간이지만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숙제이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경제적 목적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어리석음이 망친 사회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작은 숙제 중 하나이다. 이 숙제의 결과는 곧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과도 직결될 것이며, 앞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할 다음 세대의 행복의 척도가 될 것이다. 이미 헬조선에 대량 흙수저를 만든 과오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책임을 느끼고 행동하는지 서로 지켜보며 감시해야 할 것이다.
"SouthKorean politician goes viral with suitcase push at the airport". Independent. 2017-05-24
"Korean politician swag". REBRN. 2017-05-23.
"A viral video of a politician and his suitcase shows what’s wrong with male entitlement in Korea". QUARTZ. 2017-05-24
"Here's what the brain of an extremely selfish person looks like". Tanya Lewis. Busienss Insider. 2015-08-20.
"Understanding the Dark Triad". Mind Tool.
"Machiavellianism". Wikipedia.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도서. 케빈 더튼.
"장유유서의 오해". 재외동포신문. 2014-08-22.
"변질된 유교적 전통". 나무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