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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암 Feb 02. 2023

멋대로 해석해 본 연금술사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한 여정)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주체와 주인>

 나르키소스는 호숫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심각한 자기애에 빠진 나머지, 결국에는 그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나르키소스의 얼굴을 비추어주던 그 호수는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실은 남자의 두 눈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눈물지었다. 이 소설은 나르키소스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갑자기 싯다르타와 보리수나무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연상되었다. 수선화는 곧 나이자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자 원석이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홀로 존귀하고 아름답고 위대하다. 작가는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를 통해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한 여정을 펼쳐 보이지만, 위대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현실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는 여행은 삶의 이유이자 연금술이기도 하다.     



   <목적 또는 주제>

   연금술의 목적. 자아의 신화를 이룬다는 것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그것을 현실로 끌어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이 팝콘 장수와 양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더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이런 굴레에 매여있다.  


  

   <갈등과 제약>

   주인공 산티아고에게 꿈을 꾸도록 하고 꿈꾸는 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다고 독려하는 살렘의 왕 멜기세덱은, 자기 몫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사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마크툽이라니.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쓰여 있는 말이라니.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라니. 하루하루는 살거나 이 세상을 뜨거나 어느 한쪽을 위해 있는 것으로서, 모든 것은 단지 이 한마디 마크툽이라니. 살렘의 왕을 통해 피력된 자유의지와 무한한 가능성은 운명론 또는 결정론으로 이해될법한 마크툽이라는 이슬람의 종교적 수사와 충돌하고 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살도록 누군가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면 지금 내가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본들 결국 그 일은 일어나고 마는 것일까. 생과 사가 이미 정해져 있거늘 그럼 도대체 신화를 이룬다는 것은 어쩌면 제한되고 약속된 신의 섭리에 제약을 받는다는 의미일까. 


    

   <수단과 방법>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는 살렘의 왕 멜기세덱을 통해 사람에게는 꿈꾸는 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살렘의 왕은 선지자, 인도자, 스승, 자연과 세계를 아는 사람, 마음의 주인 등 여러 형태의 연금술사로 나타나고 존재하고 있다. 예지의 도구인 흰색 보석 ‘우림’과 검은색 보석 ‘툼밈’은 선택의 기로에서 분명한 질문을 던지는 경우 갈등과 제약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인생의 모든 일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으니, 그 대가를 수단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또 한 가지 신께서는 우리 인간들 각자가 따라가야 하는 길을 알 수 있는 표지(標識)를 적어 주셨고, 우리는 신이 적어주신 길을 읽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미지의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이나 농사일처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들을 잃는 일이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다 같이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단숨에 사라지는 거라오.”




   <신화 혹은 연금술>

 사람들은 삶의 이유와 존재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고민하다가도 이내 잊어버리거나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 살렘의 왕은 이에 대해 사람들이 삶의 이유를 무척 빨리 배우기 때문이라고, 그런 게 바로 세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현자 중의 현자는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에 행복의 비밀이 있다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결국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찾아 나서는 여정은 각자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고, 그 행복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마음에 있으며, 그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신의 섭리에 따라 사랑을 지키는 것이리라. 한 방울의 기름은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양치기 소년으로 회귀)이고, 또 다른 한 방울의 기름은 사랑을 지키는 것(사막 오아시스의 파티마를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내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떠나본 적이 있나. 연금술사를 만났거나 표지를 따라가본 적이 있는가. 지금이라도 새로운 여정에 올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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