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르. 영화에서의 장르는 좁게는 분류의 기준에서부터, 넓게는 이야기의 내용 전개 방식까지 규정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수많은 감독들이 이 장르의 규칙을 따르거나 혹은 변주를 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비틀어서 패러디를 하는 방식으로 장르라는 이름의 경계를 지켜왔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영화 산업 안에서 의 장르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것인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한국영화 산업의 분기점이 되었던 2004년 이후에 흥행했던 영화들의 전반적인 경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글은 한국 영화 산업 내 장르의 기능 방식에 대한 것이므로, 한국 영화에 한해서만 논하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2003년도 말에서 2004년도 초는 한국 영화 산업에 있어서 가장 큰 변곡점이라고 부를 만하다. 한국 영화 사상 (물론 그 전에는 제대로 집계되지 못했지만) 유례없는 관객 동원 숫자인 ‘천만’이 4개월에 걸쳐 두 편이나(<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를 시작으로 한국 영화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자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콘텐츠로 발돋움하였으며, 그 추세는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와 영화 산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의 흐름을 보면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인 다양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축소되는 경향은 뚜렷하다. 성장의 신호탄을 터뜨린 2004년도에 나왔던 영화들과 현재의 영화들을 비교해보면 그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것은 천만 영화의 등장으로 인한 당시의 기대감에 대한 증거이자, 산업이 훨씬 안정된 현재보다 참신한 시도를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음을 방증한다.
최근의 흥행한 영화들, 또는 영화에 자주 관찰되는 경향을 살펴보면 뚜렷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영웅의 모습(<명량>, <변호인>)을 부각하든, 신파극의 목적(<신과 함께>)을 달성하든, 아니면 사회 문제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든(<내부자들>, <도가니>), 특정 이데올로기에 복무(<국제시장>, <연평해전>, <군함도>)하기 위해서든, 그들의 특징은 관객들의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장르는 철저히 소비된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들 영화는 다양한 장르의 혼합 가능성을 보여준다. 능수능란해 보이는 장르 전환은 얼핏 기술적으로는 완성되어 보일지 모르나, 관객들에게 특정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장르가 소환되고 다시 사라지는 것이 반복된다. 적절한 구간의 코미디나 서스펜스들 앞에서, 장르는 그야말로 ‘양념’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나는 장르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프레임 안의 다른 존재들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장르나 이미지를 착취하는 형태에서 오는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를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문제 또한 가지고 있다. 어떤 소재, 어떤 장르를 가져오든 결국엔 신파를, 영웅을, 분노를 위해 복무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2004년 당시만 하더라도 장르 혼합 현상이 ‘세계를 보수적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장르의 한계를 돌파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는 사실’ (「장르 혼합 현상에 나타난 산업과 관객의 상호 텍스트적 관계」, 조종흡, 장재우, 서경혜, 박순영, 영화진흥위원회, 2004)이다. 비록 그것이 상업적인 요구라고 할지라도 관객과의 상호 대화를 통하여 장르의 관습을 타파하는 노력이 기울어진다면, 그것대로 긍정적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당시의 기대와는 다르게 현재의 한국 영화에서의 장르 혼합은 다른 의미로 남았다.
그리고 여기, 장르의 구조 안에서 엇박자의 리듬을 타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들은 장르의 구조를 고의적으로 실패함으로써,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 영화들은 앞의 영화들에서 보이는 목적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의도했던 체험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히려 명확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의 영화들과 다른 점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을 관객 스스로 체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장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인 셈이다. 더 이상 똑같은 이야기를 재료만 바꾼 채 나오는 작품들을 봐야 하는, 한국영화에 피로해져 버린 관객들이 많아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2004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축포를 터뜨리고 있을 그때, 이미 ‘장르를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영화들의 전조 증상이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장르를 비틀고 있는 이 영화들은 공포 코미디 영화의 외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한국 코미디 영화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만 함을 밝힌다.
2.
2004년도의 한국 코미디 영화들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희화화된 폭력’ 일 것이다. 그 무렵 한국 영화 시장은 조폭 코미디의 후속작(<목포는 항구다>, <달마야 서울 가자>, <나두야간다>, <맹부삼천지교>)들이 쏟아져 나왔고, 인터넷 문화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인기를 얻은 인터넷 소설 기반의 영화들(<늑대의 유혹>, <그놈은 멋있었다>, <내 사랑 싸가지>)이 주로 나오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 그룹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바로 희화화된 폭력 일 것이다.
잔혹한 폭력을 쓰는 존재로 묘사되던 조직폭력배는 대중의 웃음거리 소재로 전락하였다. 그들이 영화 안에 펼치는 폭력들은, 전도된 폭력(예컨대, 싸우러 갔다가 오히려 두들겨 맞는 어수룩한 조직폭력배들과 같은 설정) 앞에 대중들의 통쾌함을 자극하며 소모되고 만다. 희화화된 폭력 앞에 둔감해지고 마는 것이다. 인터넷 소설 기반의 영화들은 어떤가. 과장된 세계라는 변명 아래, 누군가를 소유하기 위해 폭력적인 행동도 사랑의 본질처럼 미화되고 만다. 대체로 그 과정에서 폭력을 당하는 객체는 여성들로, 그녀들은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 대상을 사랑하는 형태를 보인다. 이 역시 여성의 판타지로 포장되어 남성 폭력을 미화함으로써 목적에 달성하는, 희화화된 폭력에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서사를 성별만 바꾸어 남성의 판타지로 재현해내는 영화들도 있다. <여고생 시집가기>나 <어린 신부>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경향의 영화들 사이에서 전조 증상을 가진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 역시 폭력의 희화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희화화는 풍자에 가깝게 묘사된다. 이들 영화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비튼 다음, 그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들을 희화화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다. 김상진 감독의 <귀신이 산다>와 신정원 감독의 <시실리 2km>가 바로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두 영화는 두 가지 장르를 교차하여 배치해놓은 공통된 구조를 가진다. 이른바 코미디 호러라는 장르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특정 장르로 인식되는 지점을 비틀어 웃음을 유발하고 세계가 가지는 속성을 드러낸다. 이제 두 작품을 살펴보고 그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당시에 등장했는지 말해보고자 한다.
<시실로 2km>는 앞서의 조폭 코미디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어수룩한 조직 폭력배들이 목적을 가지고 시골에 찾아오게 되고, 자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서사는 <달마야 놀자>가 가지고 있는 레퍼런스를 빼닮았다. 그러나 <시실리 2km>는 단순히 싸움으로 인한 해학적 상황 묘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영화가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건, 시골이라는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에 등장하는 귀신보다도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 시킨다. 그리고 자본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할 수 있는지를 폭로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신정원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공간의 의미를 비틂으로써, 그 공간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새로운 시선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역설적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공간에 대해서만 비트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코미디 혹은 호러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인식 또한 비튼다. 그런데 이러한 장르 비틀기는 각 장르가 원하는 목적을 서로가 달성하게 만들어주는 흥미로운 양상을 보인다.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던 관객들은 느닷없는 귀신의 등장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렇게 공포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을 해하거나, 원한을 품은 대상처럼 소비되던 ‘귀신’이라는 존재를 다르게 정의되는 장면들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각자의 장르가 서로를 보완하는 셈이다. <시실리 2km>가 가지는 미덕은, 이렇게 전복된 존재들 가운데서 단순히 웃음이나 공포라는 감정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 사회에 대해 감독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영화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비록 처음 출발했던 코미디라는 장르를 완수하고 말지만, 장르 비틀기가 의도하는 지점을 적확히 수행하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귀신이 산다>도 재개발 문제를 묘사하는 데 있어 희화화된 폭력의 방식으로 상업적 타협을 한다. 이 작품 역시 공간의 의미를 비트는 행위가 드러난다. 가장 안온한 공간이라고 믿어지는 ‘집’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울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줌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집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신화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한다. <귀신이 산다> 역시 귀신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비틂으로써, 스크린 외부의 존재를 포섭한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무섭고 미지의 존재처럼 여겨지던 혼령의 편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귀신의 존재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이고, 자본인 셈이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영화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산물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폭력을 희화화하는 당대의 현실과 맞닿아있기도 하고, 2001년부터 이어져왔던 장르 혼합 현상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던 현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과장된 세계와 우스꽝스러운 폭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고, 이는 B급 코미디 같은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이 시장에서 나올 수 있었던 토양이 되어주었다. 후에 비틀린 장르 영화들이 추동력을 잃은 것도 이러한 관객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실패한 장르’란 무엇인가. 앞서 언급되었던 영화들과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바로 장르의 완성 유무일 것이다. 장르 비틀기를 시도하는 영화들은, 자신이 시작했던 장르를 끝까지 완수하고 만다. 그러나 실패하는 장르 영화는 의도적으로 장르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공포로 시작했던 영화가 코미디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신정원의 영화 <차우>(2009)다. 그는 <시실로 2km>의 성공 이후, 자신의 야심을 <차우>에서 선보이기 시작한다.
감독은 <차우>의 오프닝에서부터 장르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밝힌다. 인간의 탐욕을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푸티지가 지나가고 나면, 처음 괴수에게 당하는 희생양이 등장한다. 그런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건 뒤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영화 내내 유지되는데,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의 구조를 거의 똑같이 차용하면서 괴수물의 관습을 받아들이다가도, 끊임없이 코미디로 변주한다. 익숙한 장르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정면으로 배치되는 장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정원은 자신의 영화가 장르적으로 완숙미를 보여주는 것에는 전혀 집중하지 않는다. 괴물로 인한 공포심을 심어주다가 얼마 안가 맥없이 그 긴장감을 끊어버린다.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이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장르가 완성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세계 전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공간에 대한 태도도 일관되다. 김순경에게 ‘아무 데나’로 명명되었던 삼매리는 10년 동안 아무런 범죄가 없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있음 직한 순박한 시골 농촌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실상은 개발로 파생되는 이익에만 몰두하는, 도시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군상의 모습이 동시에 제시된다. 시골이 가지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는 것처럼, 이내 탐욕스러운 자본이 지배하는 공간임을 끊임없이 주지 시킨다. 시골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전작 <시실리 2km>의 연장선상이자 신정원의 공간이 가지는 특성이기도 하다. 괴수인 멧돼지는 어떠한가. 극 초반의 멧돼지는 미지의 괴물처럼 등장하지만, 감독은 그 존재의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영화가 중반으로 가기도 전에 정체는 드러날 뿐만 아니라, 아예 포스터만 봐도 괴수의 정체는 누구라도 알 수 있게끔 해놓는다. 산골에 자주 출몰하는 멧돼지는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외형이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으며 뉴스에서 자주 출몰하는 존재이기에 미지에서 오는 공포감은 반감된다. 물론 이것은 <죠스>에 나오는 백상아리도 그렇지 않느냐는 반문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죠스>와 <차우>가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은, 괴물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이다. 영화는 괴수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다른 장면에서 자행되는 코미디는 이러한 공포의 대상을 다른 곳으로 비껴가게 만들어 버린다. 괴수 영화의 괴수가 정작 공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설정될 때 그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비틀어져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괴수에게 당하는 피해자들과 공간은 그 관계가 때때로 역전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천일만의 딸이 죽는 시퀀스가 그렇다. 물론 그녀의 죽음은 멧돼지가 한 행동의 결과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그녀를 죽이는데 계기를 제공한 것은 뺑소니범들이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복수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것은 멧돼지들뿐이다. 억울한 누명을 쓴 셈이다. 오히려 멧돼지의 새끼를 죽이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마지막 그가 죽어가면서 자신의 새끼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괴수인 멧돼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괴수 영화임에도, 인물들과 괴수의 대치가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실패한 장르, 실패한 공간, 실패한 존재들이 한데 뒤엉킨 영화인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신정원의 다음 작품 <점쟁이들>(2012)에서도 유지하고 있다. 장르가 펼쳐지는 순간에 끼어드는 다른 장르, 관계가 역전되어있는 인물들, 모든 것의 기원이 자본에 대한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는 설정 (악귀의 탄생이나, 악귀에게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주민들의 현실) 같은 것들이 그렇다. <점쟁이들>은 <시실리 2km>와 유사하게 코미디에서 시작해서 중간중간 공포의 장르가 끼어든다. 신정원 특유의 장르 실패적인 조크들은 재밌고, 악귀와 퇴마사들이 펼치는 소동이 비껴서 가리키는 지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점쟁이들>이 <차우>가 가지는 실험성에 비해 그것이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일종의 소동극처럼 묘사되는 산만한 편집은 끝까지 그것을 유지하며 코미디라는 장르를 끝까지 완수해버리고 만다. 의도적으로 장르를 실패하려는 신정원의 개성은 희석되고, 장르의 간극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는 <시실리 2km>보다 약하게 다가온다. 그러니 자본이 가지는 속성도 단선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게 된다. <차우>의 상업적 실패로 인해서 일까. 상업적 타협으로 보이는 장면들과 설정은 무척이나 아쉬운 대목이다.
4.
역시 상업적 실패를 면할 수 없었지만, 여기서 언급이 되어야 할 작품들이 또 있다. 황인호의 <몬스터> (2014)와 양병간의 <무서운 집>(2015)이 그것이다. 두 작품 모두 신정원처럼 장르의 실패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황인호는 <오싹한 연애>(2011)의 성공 이후, 더욱 이를 코어 하게 시도하는데, 그것의 결과물이 <몬스터>이다. 물론 작품에서 보이는 허술함이나 불편함에 대한 지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미디의 세계를 가진 복순과, 스릴러의 세계를 가진 태수의 정확한 양분이 보여주는 기괴한 생명력은, 의도적으로 실패한 장르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작품일 것이다. 그것의 전달력에는 이견이 있겠으나, 족발집 시퀀스와 시퀀스의 마지막 장면은 적어도 이 영화가 감독의 명확한 의도를 위한 난장판이었음을 인식하게 만든다.
다른 영화들이 대중 영화라는 탈을 쓰고 그럴듯한 외형을 가지고 의도적인 장르 실패를 보여줬다면, <무서운 집>은 그럴듯한 외형조차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공포는커녕, 코미디조차 의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의외로 위력적이다. <무서운 집>은 앞서 말한 <귀신이 산다>가 가지는 문제의식에서 페미니즘적인 시도를 결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서운 집>은 그 제목답게 집이란 존재가 개인의 인생에서 얼마나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로 바뀔 수 있는지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그것을 귀신같은 존재가 자아내는 무서움이 아니라 허무하기까지 한 의도적인 장르의 실패가 해낸다. 이 영화의 섬뜩함은 최소한의 서사 구조를 가진 영화들이 가지는 덕목을 모조리 어기는 데서 드러난다. 그녀는 내내 집안일을 하고, 귀신을 만나며, 소리를 지르고 도망 다니지만, 결코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상식적으로 집 밖에 나와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발을 동동 구르며 집에 남는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그저 비명만 지르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자신을 위로할 뿐이다. 이는 집이라는 공간에 종속되어버려 무기력해진 여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정'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 뒤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폭로한다. 끊임없이 롱테이크로 묘사하는 일상의 모습들은 관객들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하고야 마는데, 이는 중년 여성들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지루한 노동을 강요받고 살아왔는지를 체험하게 만들려는 감독의 의도는 아닐까. 그의 세계 역시 실패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서운 집> 역시 고의적인 장르 실패가 가지는 가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인 것이다.
5.
이렇게 실패한 것들로 가득 채워진 세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영화를 보면서 장르가 가지는 덕목, 즉 장르들이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고유한 것들을 주목하지 않게 된다. <차우>에서는 괴수와 대립하는 인물들 사이에서의 공포가, <몬스터>에서는 살인마와 피해자 사이에서 흐르는 서스펜스가, <무서운 집>에서의 귀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힘 같은 것들 대하여 주목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니 그들 이외의 것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본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탐욕을(<차우>), 이 모든 난장판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들을(<몬스터>), 가부장제에서 고통받는 중년 여성(<무서운 집>)에 바라보게 만든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이 주목하는 것을 바라보게 만들려 노력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들이 가지는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하는 얘기에 사명감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괴악한 장난에 섞인 자의식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는 교훈적이거나 계몽적인 방향의 길로 빠지지 않는다. 자신을 ’시시하다 ‘라고 말하는 영화가 어떻게 진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그들의 영화는 위력적이다.
그렇다면 앞서의 영화들이 왜, 그리고 하필 지금 한국영화 산업에서 언급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현대의 한국 영화 산업의 제작환경과 관객 문화의 변화와 결부되어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흥행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장르의 혼합과 함께 다양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고 해소시키는 영화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객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여가인 영화에서까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문화의 반영인 셈이다. 자신이 해소하고 싶은 감정들을 극장에서나마 소비해버리고 싶어 한다. 영화 산업은 그런 관객들의 요구를 철저히 반영한다. 이제 제작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종합 선물세트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결국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경계는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단절되고 만다. 이러한 관객 문화의 변화는 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현실의 어려움과 절망감을 영화에서나마 해소시킬 수밖에 없는 사회 안에서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엽기’라는 코드가 세대를 휩쓸었던 2004년도와는 달리, 이제 대중들은 스크린의 경계를 위협하는, ‘안온’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들을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극장 밖의 맥락이 극장 안까지 침범하고, 그것이 산업을 지배하는 순간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산업과 자본은 점점 더 안정성을 추구하게 되고, 영화들은 선을 넘지 못하고 그 주위를 서성이거나 아예 선 근처로 올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 시기에 선을 넘는 영화들의 등장은 의미심장할 것이다.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보게 만드는 영화들. 대중들이 상정하는 ‘정상’에 도전하는 영화들. 그들이 등장해야만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