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기력을 어떻게 극복할까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코로나19보다 무서운 '넵병'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이전부터 직장에는 ‘넵병’이 만연했다. 넵병이란 직장 상사가 메신저나 문자로 업무를 지시할 때 ‘넵’이라고 답하는 것을 빗대어 이르는 신조어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네' 또는 '예'라고 쓰기에는 너무 버릇없어 보이기도 하고 딱딱해 보여서 기피하고, '넹'이나 '네ㅎㅎ'와 같이 쓰면 가벼워 보이는 대신, '넵'은 빨리 처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서 직장인이 대답할 때 많이 사용한다.”라고 넵병을 설명한다.

같은 ‘넵’이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 ‘넵!’은 ‘당연하죠! 가능합니다’, ‘넵..’은 ‘일단 알겠습니다’, ‘넵ㅠ’은 ‘죄송합니다’라는 의미다. 또한, ‘넵?’은 ‘뭐라고 하는 거지?’, ‘넵넵’은 ‘’넵‘만 쓰면 불안하다’, ‘넵~’은 ‘티 안 나는 짜증’이라는 부하 직원의 심리를 담아낸다.


나도 넵병을 앓고 있다. 선배들보다 어려운 상사에게는 “넵!” 대신 “네 알겠습니다!”를 즐겨 쓴다. 장문의 업무 지시에 달랑 ‘네’라고 답하면 무성의해 보이고, ‘알겠습니다’라고만 답하면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네 알겠습니다’에 느낌표까지 붙여서 ‘당신의 말을 확실하게 알아들었고 당장 실행하겠습니다!’라는 뜻을 예의 바르게 전달하고자 한다. 느낌표는 절제해서 쓰면 효과적이지만, 남발하면 반항적인 느낌을 풍기니 주의해야 한다.


마침표도 마찬가지다. 현실과 동떨어진 지시에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마침표를 붙이고, 말도 안 되는 지시에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마침표를 빼버리고 답하기도 한다. 입은 웃고 눈은 우는 피에로처럼 직장인은 ‘답정너’ 상사에게 언제나 알겠다고 답하며 웃지만, 마침표 하나에 속마음을 담아 운다.



무기력한 직장인,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업무 스트레스로 심한 피로감과 무기력증을 겪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이런 증상을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직장인 10명 중 9명이 겪는 것으로 드러났다. 직장인 앱 블라인드와 온라인 취미 클래스 플랫폼 마이비스킷이 전국 직장인 1만 9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9%가 ‘최근에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답했고, 가장 큰 원인을 ‘과도한 업무량’(46%)으로 꼽았다.


넵병이 심해질수록 무기력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분명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업무 지시에도 ‘넵넵’거리다 보면 어느새 일은 산더미처럼 쌓인다. 예전에 나도 번아웃 증후군을 겪을 때 “일이 너무 재미없네요. 열심히 해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네요.”라고 직장 동료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의 답변이 놀라웠다. “제가 아는 분이 그러는데 직장이 돈 주면서 재미까지 줄 수는 없대요.” 나는 더 무기력해졌다.


직장인 대부분이 무기력증에 빠진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정말 과도한 업무량 때문일까?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인간이 사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밝힌다. 그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에 갇힌 우리가 ‘완제품으로 제공된 목표’에 쫓기면서 존재를 잃고 사물이 되어버렸다고 진단한다.


“나라는 존재가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저자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곱씹어 보면 무기력은 결국 주체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직장인은 내가 '일하는 사람'이 아닌 '회사의 부품'이 되었을 때 동력을 잃는다. 이런 세태에 탄식하며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회사의 부품이 되어버린 직장인은 어떻게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평등을 오해해서 생긴 무기력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곡된 평등의 개념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평등의 본질은 인간 존재로서 가치가 동등하다는 것이지 소유의 수준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아파트에 사니까 나도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남들이 대학을 나오니까 나도 대학에 가는 것은 평등이 아닌 집착이다.


소유에서 존재를 찾으려고 하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바닷물로는 갈증을 해소할 수 없듯이 최고급 세단, 명품백 등으로 아무리 치장한들 인간 내면의 공허함은 채울 수 없다. 소유에는 생명도 영혼도 없다. 오직 물질만 있을 뿐이다. 소유에서 존재는 찾는 행위는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려는 헛수고일 뿐이다.


복잡한 삶의 문제를 단순하게 ‘소유냐 존재냐’로 압축해낸 저자의 통찰력이 놀랍다. 아이가 두 명이 되고 서른보다 마흔에 가까워질수록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는 내게 더욱 피부로 와 닿는다. 딸린 식구가 없었을 때는 비교적 소유가 중요하지 않았다. 셋방살이 신세에도 위기의식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 식구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고생하는 아내를 편하게 해 주고 아이들을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 내 집 마련으로 더 이상 집주인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아이들에게 삶의 경험을 확장하는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아낌없이 지원하고픈 의지가 용솟음친다. 불현듯 존재를 탐구하는 수도자가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 식구가 생기면 존재가 끊임없이 소유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의 여유가 점점 사라지는 나에게 에리히 프롬은 물질적 평등이 아닌 존재적 평등을 추구하라는 처방을 내렸다. 존재 밖의 소유는 무기력을 유발하지만, 존재 안에서의 소유는 희망을 준다. 미성숙한 인간의 소유는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쓰이다가 결국 똥이 되겠지만, 성숙한 인간의 소유는 타인을 돕고 생명을 살리는 데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무기력을 벗어나는 진짜 삶의 세 가지 조건

저자는 또한 무기력에서 자유로워지는 진짜 삶의 조건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감탄의 능력이다. 그는 감탄의 능력이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직장인은 감정 노동의 노예다. 평가 권한을 가진 상사의 비합리적인 지시에도 예스맨이 되길 강요받고 마음의 분노를 억지 미소로 분칠해야 한다. 인사고과에 따라 회사에서 받는 돈의 액수와 근무 기간이 달라지기에 더러워도 참아야 한다. 갑질 하는 진상 고객에게도 직장인은 그저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다. 회사의 부품이기 때문이다.

덜 상처 받기 위해 직장인은 가면을 쓰고 자기감정을 무시하려 애쓴다. 출근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회사가 원하는 대로 스스로 기계가 되고 사물이 된다. 그렇게 감탄하는 능력을 상실하면 무기력이 찾아온다. 타인이 원하는 감정이 아닌 온전한 자기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존재로서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얼마 전 매출 실적으로 회사에서 심하게 압박을 받았다. 잔뜩 예민해진 나는 상한 기분으로 오전 시간을 망치고 점심시간에야 정신을 차렸다. 개천을 걸으니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다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새하얀 벚꽃잎이 흩날리는 봄날을 즐기고 있었다. 불청객 같은 코로나19에도 봄은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와 주었다. 온몸으로 봄을 느끼며 감탄의 시간 속에서 회사의 부품이었던 나는 다시 일하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짜 삶의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저자는 진정으로 집중하면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해진다고 강조한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끼라는 것이다. 처음 책을 쓰며 내가 느낀 점도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나의 지금을 사랑하자’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읽으며 이 다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우리는 남과 자신을 비교할 때가 아닌 나 자신을 극복할 때 진정한 만족을 느낀다. 지금 부족하더라도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때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된다. 이렇게 ‘지금의 나’를 사랑하면 ‘나의 지금’을 사랑하게 된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 하는 일, 추구하는 가치, 열망하는 꿈, 함께 사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함으로써 성숙한 존재가 되어가지 않을까?


진짜 삶의 세 번째 조건은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우리는 갈등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개발하는 원천이다. 갈등을 피하면 인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메기 효과’는 노르웨이의 어느 어부가 정어리 수족관에 메기를 집어넣은 데서 유래하였다.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들은 항구에 도착하는 동안 대부분 죽는다. 그런데 천적인 메기를 넣어주면 정어리들이 싱싱한 활어 상태로 항구에 도착한다.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갈등과 긴장 속에 살아간다. 삶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갈등과 긴장의 메기 효과 덕분에 건강한 존재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자식이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가 된 우리에게 꼰대들은 말한다. 너무 풍족해서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진정으로 바라고 노력하면 되는데 핑계 대지 말라고 말이다. 이에 에리히 프롬은 '팩트 폭격'을 가한다.


“우리 사회의 성인들은 사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자신이 약한 것이 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믿게 될수록 무기력이 더욱 심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전혀 없다. 그가 어떤 능력을 갖출 수 있는지를 출생의 우연이 결정한다. 일자리를 구할 수는 있을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 수 있을지도 본질적으로 그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는 요인들이 결정한다. 심지어 파트너를 선택하는 자유조차 경제적, 사회적 경계의 제약을 받는다. 기분, 의견, 취향은 주입된 것이며, 어떤 일탈을 저지르면 더 심한 고립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179쪽)


우리의 무기력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든 패러다임에 세뇌당해 이리 치이고 꼰대들의 기득권에 짓밟혀 저리 치이며 우리는 수동적 사물이 되었다. 남 탓하며 현실을 회피하자는 것이 아니다. 억울한 무기력을 자각해야 내가 원하는 자기 자신이 되는 첫걸음 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진짜 삶의 세 가지 조건을 통해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라고 권고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기는 순간 무기력은 우리를 습격한다. 우리 모두 용기를 잃지 않으면 좋겠다. 진짜 나의 삶을 사는 주체적 존재로 매일 매일 조금씩 거듭날 때 무기력은 점점 무기력해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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