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따로 또 같이 성장해가는 성숙한 관계

어버이날을 앞두고 아버지를 찾아뵙기 위해 연락을 드렸다가 봉변을 당했다. “하늘 같은 시아버지를 무시하는 며느리 따위 필요 없다!” 아버지는 둘째 출산 후 아들 내외가 연락이 뜸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헌신한 아들 내외의 노력까지 도매급으로 넘기려 했다.


'남자가 부엌에 가면 뭐 떨어진다', '나는 아기 똥기저귀 한번 갈아보지 않았다' 등을 훈장처럼 여기는 아버지 세대에게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물론 내게도 잘못이 있기에 아버지를 서운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아버지에게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지난 36년간 참아온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아버지, 언제까지 권리만 주장하며 남 탓만 하실 거예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아버지는 항상 욕하셨죠. 외도로 가정 파탄이 난 것도 전부 어머니 책임이라며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을 합리화했어요. 가장이란 가정의 리더이고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전부 아버지 책임이에요. 책임이 없는 권위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네요. 이제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까지 욕하시네요.”


‘하늘 같은 시아버지라는 시대착오적인 남성우월주의와 ‘무시하는’에 담긴 내로남불식 피해망상, 그리고 나와 한 몸인 아내에게 ‘며느리 따위’라고 모욕한 권위주의에 구역질이 났다. 1984년생인 나와 1948년생인 아버지 사이에는 36년의 세월이 흐른다.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속 깊고 착한 아들’이라는 프레임에 스스로 갇혀 나는 단 한 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어쩌면 아버지의 제왕적 권력에 감히 맞설 엄두가 안 나서 타협한 자기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전체주의' 안에서 마치 일제 치하 36년 같았던 시간이었다.

부모의 세계관이 어린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나의 아버지 눈에 비친 세상은 비극이었다. 아버지의 언어와 행동은 온갖 비난과 폭력의 집합체였다. ‘니 할애비 때문에’, ‘니 엄마 때문에’로 시작하는 단골 멘트는 아버지가 저질렀던 폭력과 위법, 외도로 인한 가정 파탄 등을 모두 합리화시키는 마법의 가루였다. 끊임없이 원망의 대상을 찾아 타인을 부정해야만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았다.

사진=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374&replyAll=&reply_sc_order_by=C


하지만 아버지는 자녀만큼은 초긍정했다. 자신의 한을 풀어줄 유일한 통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는 끔찍한 공격을 퍼붓는 아버지가 나한테 만큼은 끔찍한 애정을 퍼부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자상한 아버지인 동시에 추악한 남편의 두 얼굴을 가진 아버지의 존재를 긍정하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은 반드시 망한다.’ 책임은 없고 권위만 내세우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전체주의가 던지는 메시지에 나는 세뇌당했다. 동시에 타인을 향한 아버지의 분노가 혹시 나를 향하면 어찌 될지 두려웠다. 그렇게 나는 저항의 살얼음판 위를 살금살금 걷는 순종적인 아들로 자랐다.


아버지는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나를 여전히 통제하려 했다. 피해망상과 자격지심으로 아버지는 나의 아내마저 원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미 가정을 파탄 낸 아버지가 나의 가정마저 파괴하려 든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속 심연의 저항의식이 36년 동안 단단해진 얼음판을 뚫고 솟구쳤다. 나는 더 이상 아바타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종속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나는 나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저항의 바다에 빠져도 죽지 않고 유유히 헤엄칠 수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버지와 3개월간 냉전을 치르고 며칠 전에 극적인 화해를 했다. 36년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나누었다. 그 과정은 ‘8월’ 이야기에 담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나처럼 올해 태어난 딸과 나도 36살 차이다.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될 것인가? 그리고 36년 후 딸내미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까? 위력에 의한 성범죄로 고통받고 국민을 우롱한 지도자 때문에 촛불을 들며 이게 나라냐면서 울분을 토하는 일은 절대로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사진=영화 <분노의 질주 7: 더 세븐>에서 등장한 최첨단 감시 체계 '신의 눈'


위력은 감시받거나 통제되지 않는 권력이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할 때 발생한다. 국가 권력,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CCTV, 휴대전화 위치정보 등 우리를 24시간 지켜보는 눈이 공기처럼 존재한다. 또한, 팬데믹 시대를 맞이해 우리는 새롭게 등장한 '은밀한 전체주의'를 경험한다. 위기대응과 K방역 과정에서 빅데이터를 통한 개개인 추적 관리가 강화되었고 우리는 더욱 치밀한 감시 아래 강력히 통제당하고 있다.


전체주의에 잠식되지 않는 개인의 건강한 저항의식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가정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스캇 펙은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사랑의 유일한 참된 목적은 영적 성장이나 인간의 발전인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건강한 사랑은 따로 또 같이 성장해가는 성숙한 관계에서 피어난다. 부모는 시류를 거슬러 오르는 어른다운 삶을 통해서만 자녀에게 건강한 저항의식을 가르칠 수 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나는 다 잊은 줄 알았던 가정의 상처와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아빠이자 아들이자 남편인 '빠들남'으로서 참전한 첫 전투였다. 지혜가 부족한 나는 균형 감각이라는 고지를 탈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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