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불행 중 다행으로 어린이집은 긴급 보육 중이라 등원하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아예 교사 한 명이 잔뜩 예민해진 선강이를 전담 마크했다. 질투심 많은 것도 어쩜 그리 아빠를 쏙 빼닮았는지. 예전에 아내가 TV에 나오는 남자 연예인을 보고 “어머, 잘생겼다.”라고 했다가 엄근진 모드가 된 나의 핀잔을 들어야 했던 건 안 비밀. 어린이집에서 가장 어린 여자아이를 선강이가 깨문 적도 있는데 아마 동생과 그 아이를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비상 대책 회의를 했다. 아내와 첫째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나는 둘째를 전담 마크했다. 한 번은 둘째를 처제들에게 잠시 맡기고 셋만의 시간을 보냈는데 첫째가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다.
첫째는 찰거머리처럼 아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행여나 아내가 둘째에게 분유라도 먹이려고 하면 첫째가 날뛰며 울부짖었다. 둘째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아내는 둘째를 낳았는데 계속 첫째만 돌보니 둘째의 엄마가 아닌 느낌이 든다고 했다. 아내가 복잡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아내에게도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아내는 젖몸살 때문에도 힘들어했다. 조리원에 있을 때도 불어난 젖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아내가 첫째 출산 때는 2주간 조리원에 있었는데 둘째 때는 1주밖에 있지 못했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아내에게 출장 마사지를 받도록 했다. 1주일에 한 번씩 2시간 동안 전신 마사지를 받으며 아내는 점차 컨디션을 회복했다. (산후 우울증 예방에 마사지만한 게 없다고 한다. 남편들은 참조하시길!)
우리 부부와 첫째는 안방에서 같이 자고 둘째는 아기 전용 침대를 렌트해서 거실에 따로 재웠다. 예민해진 첫째가 둘째 우는 소리에 깰까 봐 나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2~3시간마다 분유를 먹였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첫째는 종종 자다 깨서 이유 없이 한참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질투심에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군대에서 야간 근무를 선 이후로 10년 만에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야 했다. 아이가 너무 예쁘지만, 육아가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엽기 떡볶이 매운맛을 먹는 느낌이다. 먹을 땐 혀 전체가 마비되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만, 돌아서면 또 생각나는 그 맛. 바로 육아의 맛이다.
육아라는 전시 상황에서 미리 정해 놓은 가사 분담은 무의미하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여력이 되는 사람이 가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빨래, 청소, 설거지, 정리정돈, 요리 등 조신한 남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들을 하나씩 장착할 수 있었다. 물론 아내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겠지만.
요리실력만큼은 일취월장했는데 아내가 음식을 잘 챙겨줘서 고맙다며 만족해했다. 닭볶음탕, 김치찌개, 전복죽, 김치 치즈 오믈렛은 아내의 엄지척을 인증받은 나의 대표 요리다. 요리할 때 나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미소 지을 아내를 생각하면 흥분된다. 하지만 기껏 정성 들인 요리가 맛없을 때는 정말 속상하다. 고향의 맛 다시다와 최후의 수단 라면 스프로도 맛이 살아나지 않을 때는 애도하며 떠나보내는 수밖에.
둘째의 탄생이라는 예상보다 훨씬 큰 변화 속에서 우리 가족은 서로의 감정선이 뒤엉킨, 잔혹한 4월을 보냈다. 그 끝에 기쁜 결실이 있었으니 바로 내가 첫 책을 출간한 것이었다. 2020년 4월 30일, 《서른 넘어 찾아온 다섯 가지 기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 나에게는 셋째 출산과도 같은 기쁨이었다.
2년 전 원고를 쓰기 시작했던 첫 번째 육아휴직을 추억했다. 당시 전원주택에서 맞이했던 봄이 어른거린다. 아파트로 이사 와서 맞이한 올해 봄과는 사뭇 달랐다. 마음 한편에 고이 접어 간직했던 기억을 꺼내어 본다.
봄꽃 축제의 향연을 누리는 4월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꽃잎은 꽃비가 되어 감성을 촉촉이 적신다. 따스한 햇볕의 조명발을 제대로 받은 만개한 꽃 중에서도 4월의 주인공은 벚꽃이다. 순백의 신부 같은 벚꽃은 4월이면 그 아름다움으로 전국을 매혹한다.
우리 집 마당에도 벚꽃이 피었다. 농가 주택으로 이사 와서 처음 맞이하는 봄이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보내고 마주한 벚꽃의 함박웃음에 마음이 녹는다. 감탄의 시간도 잠시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할 새도 없이 초 치는 생각이 들었다. 감성에서 이성으로 생각이 전환된 나는 천천히 걸으며 벚꽃의 일생을 곱씹기 시작했다.
1년을 준비해 겨우 2주간 영광을 누리는 벚꽃은 7년을 땅속에서 준비해 땅 위에서 겨우 두 달을 사는 매미를 연상하게 했다. 매미는 또한 2년을 준비해 성충으로는 겨우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를 떠올리게 했다. '이들의 일생은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인생과 흡사하지 않은가.' 자연의 섭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세월이 정말 유수와 같다. 꽃다운 청춘도 잠시"라고 말한다. 바야흐로 백세 시대를 사는 우리는 저마다 꽃 피웠던, 꽃 피우는, 꽃 피울 인생을 살고 있다. 그 기간이 하루살이처럼 하루 일수도, 벚꽃처럼 2주 일수도, 매미처럼 두 달 일수도 있다.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하루라도 인생의 하루하루가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하루살이처럼, 2주라도 따스한 마음을 소생시켜주는 벚꽃처럼, 두 달이라도 무더운 여름을 시원한 울음소리로 노래하는 매미처럼 소중한 존재로서, 존재의 소중함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당연하다‘라는 생각이 가장 무섭다. 당연했던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아플 때만 쓰던 마스크가 당연한 일상복이 되었고 반가운 인사로 다가가도 경계하며 거리를 둔다. 눈만 드러내는 것이 당연해진 이때,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으로 다가가는 가장 좋은 기회일 지도 모른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꽃다운 삶의 향기로 기억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