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거리는 전복과 실험용 쥐
1,500번이 넘는 밥상을 차려내며 나는 온갖 식재료를 다뤄왔다. 밀키트나 레토르트처럼 완벽히 가공된 무기물 형태의 재료를 쓰기도 하고, 펄떡이는 생명이 붙어있는 상태의 식재료를 마주하기도 한다.
며칠 전, 여자친구의 지인으로부터 전복 한 상자를 선물 받았다. 온라인 몰에서 5~6만 원쯤 하는 제법 실한 구성이었다. 전복 몇 개를 꺼내어 껍질을 빡빡 문질러 씻고, 숟가락을 밀어 넣어 껍질로부터 살과 내장을 조심스레 분리했다. 도마 위에 올려진 싱싱한 전복들은 살기 위해 꿈틀거렸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떤 녀석의 살결에는 칼집을 내어 줄을 긋고, 어떤 녀석은 전복죽을 끓이기 위해 잔인하게 깍둑썰기를 했다. 나를 위한 훌륭한 한 끼가 완성되는 순간이었지만, 전복의 입장에서 나는 자비 없는 악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제는 여자친구와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실없이 웃었다.
그때는 참 맹목적이고 이유 없는 악의가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학교 화장실에서 똥을 싸면 그날은 온종일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여자아이들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거나 앞자리 친구의 등짝에 분필로 낙서를 하는 아이들도 널려 있었다. 어떤 선생님은 졸고 있는 아이의 이마에 분필을 기가 막히게 명중시키곤 했는데, 나 역시 그 분필의 희생양이 된 적이 있었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폭력이자 악습이지만, 그때는 그저 일상이었다.
결혼 후 첫 차를 샀던 이십 대 무렵의 일도 떠오른다. 나와 그녀가 앞자리에 탔고, 내 절친과 그의 여자친구가 뒷자리에 동승한 채 드라이브를 하던 참이었다. 한창 철이 없던 나는 운전석 창문을 열고 코를 푼 휴지를 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그러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의 여자친구가 난리 부르스를 쳤다. 어떻게 길가에 쓰레기를 그냥 버릴 수 있냐며 정색을 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녀는 당시 술도 입에 대지 않을 만큼 도덕적이고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삶이란 참 우습다. 그렇게 무결해 보이던 그녀도 시간이 흘러 술을 진탕 마시고, 스스로 타락했다며 자백하던 날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과거, 작은 선교회 모임에 매주 참석했던 적이 있다.
독실한 집사님도 있었고, 큰 믿음 없이 나가는 사람도 섞여 있는 작은 모임이었다. 다들 친절했고, 다과를 나누고 밥을 먹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내 흥미를 끈 것은 그 평화로운 사람들이 두 손을 모아 '비는 소원'의 내용이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사업이 번창하게 해달라거나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욕망의 기도였고, 타인의 안녕을 비는 기도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나는 신이 왜 저런 세속적인 소원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느 날 모임을 관장하는 리더에게 묵혀둔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돼지나 소를 마음대로 죽여서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생명과 선악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답은 허무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 삶의 많은 곳에서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가 샘솟는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며 열을 올렸고, 어떤 이들은 인간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류의 주장을 설파하기도 한다. 마이클 샌델의 강연을 듣다 보면 '정의(Justice)'라는 것이 곧 절대적인 '선(Good)'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종교적 프레임으로 보면 죽어서 천국에 가는 방식이 선이고, 사이코패스나 지옥에 가는 방식이 악이다.
원래 이 글을 적기 전에 나는 '정의(Definition)'에 대해서 먼저 적고자 했다. 우리 삶에서 어떤 문제들을 다룰 때, 가장 먼저 분별력 있게 그 개념을 '정의(규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진짜 본질은 정의하지 않은 채 피상적인 '정의(Justice)'만을 부르짖곤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정의(Definition)해 보자. 도대체 선과 악은 무엇인가?
어려서는 그것이 아주 분명해 보였다. 나쁜 짓을 하면 악, 착한 일을 하면 선. 하지만 48년을 살아온 지금, 선과 악은 그저 '우리가 그렇다고 믿기로 합의한 질서'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얇고 얄팍한 개념이다.
범위를 우주로 넓혀보자. 지구에는 수많은 생명이 살아간다. 그렇다면 생명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땅,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죽은 행성과 항성들은 '악'일까? 당장 지구와 가까운 화성은 생명체가 살기에 적당하지 않으니 악의 땅인가?
아니다. 그저 물리적인 상태일 뿐이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가 문제일까? 누군가를 해하려는 의도는 모두 악인가?
트럼프가 집권하던 미국이 이란으로 미사일을 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죽은 자들 중에는 다른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경시하던 악당도 있었겠지만, 아무 죄 없는 선량한 시민이나 어린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악당을 죽이려는 의도에 무고한 희생이 뒤따를 때, 이 행위는 선인가 악인가? 이 정도 구분에서조차 인간이 그어놓은 선과 악의 경계는 처참히 무너진다.
일부러 프레임을 인간의 세계로만 국한했지만, 시선을 생물학 전체로 돌리면 모순은 더 기괴해진다. 미사일이 폭발하며 불타 없어진 생명체가 과연 인간뿐이었을까? 이미 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동식물이 터전과 목숨을 잃는다.
무기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즉 인간의 관점에서 가장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의약품 개발 단계에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실험용 쥐의 생명을 갈아 넣는다.
인간의 생존과 안위를 지켜주면 선이고, 그것을 위협하면 악인가?
내가 맛있게 먹어 치운 전복에게 나는 정의로운가?
선과 악의 구별이 이토록 모호하고 어렵다는 것을 증명할 사례는 며칠 밤을 새워도 다 나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얄팍한 잣대로 너무나 쉽게 선과 악을 규정하고, 함부로 타인을 단죄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도덕과 선악이라는 것이, 거대한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저 인간이라는 한 종(種)이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아주 얇고 위태로운 매뉴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도마 위에서 꿈틀거리는 전복의 칼집 사이로, 나는 그 얄팍함을 본다.
도마 위에서 꿈틀거리던 전복은 결국 버터와 함께 노릇하게 구워져 내 위장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행한 이 잔인한 '악'의 대가로, 나는 오늘 하루를 거뜬히 버텨낼 훌륭한 생물학적 에너지를 얻었다. 참으로 모순적이고도 완벽한 생존이다.
어차피 거대한 우주와 영겁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얄팍한 매뉴얼을 쥐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시한부 생존자일 뿐이다. 그러니 타인을 향해 너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얄팍한 옳고 그름(Justice)을 부르짖기보다는,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의 질서와 나만의 행복을 묵묵히 규정(Definition)하며 살아가는 편이 훨씬 현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