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하기 1은 정말 2일까?

다름과 틀림을 측량하는 낡은 잣대에 대하여

by 카피츄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책들이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그리고 회계학 서적들까지 수많은 책이 나를 관통했지만, 그중에서도 내 가치관 전체를 흔들어 놓은 최애를 꼽자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이 책들을 관통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나는 누구인가?"


180cm, 85~90kg의 건장한 체격, 나쁘지 않은 운동신경과 외모. IQ 132에 스피치, 글쓰기, 눈치, 매너도 제법 갖췄다. 눈에 보이고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나'의 스펙은 대략 이러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인성, 성격, 타인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EQ, 그리고 삶을 관통하는 행운과 타이밍의 흐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삶에 운이 좋은지 나쁜지를 스스로 객관화하여 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거대한 행운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국민학교) 저학년 시절의 일이다. 그 시절 아이들의 세계에서 최고의 권위는 '아버지'였다. "우리 아빠가 말해줬는데, 이건 이런 거야!"라고 말하면, 친구들의 눈빛은 신뢰로 반짝였다. 그 정보가 팩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라는 절대적 잣대가 모든 것을 증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우리 아빠가 말했는데~"라며 떠들던 내게 한 친구가 툭 던졌다. "그건 그냥 너네 아빠 말이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 세상의 절대적 진리였던 '아빠의 말'이, 타인의 프레임에서는 그저 '한 개인의 의견(다름)'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무리에 휩쓸렸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후, 아버지와 종종 장기와 바둑을 두며 담소를 나누었다. 하지만 대화는 종종 논쟁으로 번졌다. 아버지는 역사적 팩트를 무시한 채, 대한민국이 중국의 속국이자 아우였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곤 했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기 힘든 명백한 '틀림(Wrong)'의 연속이었다. 단군 신화나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같은 다른 프레임을 가져와 그의 논리를 부수면, 아버지는 이내 꼬리를 내리며 "TV에서 그렇게 나오더라"며 자신의 생각이 아닌 양 숨어버렸다. 스스로의 철학도 아니면서, 타인의 생각(TV)을 빌려와 화를 내는 모순. 그 맹목적인 고집 앞에서 나는 지쳐갔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도, 틀림을 바로잡는 것도 소모적일 뿐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름'은 때로 매우 교묘하게 '틀림'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중학교 시절부터 십수 년을 친하게 지내온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표면적으로 늘 안정감 있던 그의 가정환경을 나는 꽤 동경했었다. 수학자이자 수학 교사였던 그는 어느 날 내게 업무적인 부탁을 해왔다. 학교 예산 200만 원으로 필요한 물품을 내 사업자를 통해 구매하고, 내게 약간의 수수료를 챙겨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세금 10%와 수수료 10%를 떼고 160만 원어치의 물품을 맞춰주기로 한 구두 합의. 하루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은 USB, 블루투스 기기, 상품권 등 자잘한 요구사항이 끝없이 추가되며 며칠을 질질 끌었다. 그는 저렴한 매입 단가를 원하면서도 완벽한 워런티를 요구했고, 상품권 금액은 한 푼도 깎이지 않기를 바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쥐고 있는 자는 본능적으로 '갑'이 되려 한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예외는 없었다. 행정 처리로 이미 며칠을 고생한 내게, 발품을 팔아 지류 상품권까지 사 오라는 그의 태도에 결국 내 뚜껑이 열렸다.


수학 교사였던 그는 1+1=2라는 절대적 진리(틀림 없음)를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인간관계의 회계 장부에서는 명백한 오답을 적어내고 있었다. 20만 원이라는 알량한 수수료로 친구의 노동력을 쥐어짜려는 얄팍한 이기심. 나는 그가 부탁한 모든 물품과 모바일 상품권을 차갑게 전송해 주고 거래를, 아니 관계 자체를 종료해 버렸다. 그가 선을 넘지 않고 정중하게 부탁했다면 오랜 우정의 이름으로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관계의 선을 명백히 '틀리게' 넘었다.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를 하나 가지고 있다. 내 곳간이 차기 전까지는 철저히 계산적이지만, 곳간이 차면 타인에게 계산 없이 베푼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이 내 선을 넘지 않는 것만큼, 나도 타인의 선을 함부로 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그 수학 교사 친구와 놀러 갔던 강원랜드 카지노가 떠오른다. 나는 도박의 확률을 계산해 내는 그의 수치적 결과물을 무척 신뢰했다. 1+1은 2라는 명제는 그곳에서 절대적으로 옳아 보였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서 진정 1+1은 2일까? 프레임에 따라 결과물은 완전히 달라진다. 물 한 컵에 물 한 컵을 더하면 어떻게 되는가? 물 두 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 더 큰 물 한 컵'이 될 뿐이다. 심지어 컵에 따르는 순간 수증기로 증발해 버리거나, 화학적 작용에 의해 수소와 산소로 분리되어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서 각자가 가진 낡고 편협한 잣대로 끊임없이 타인의 '다름'과 '틀림'을 측량하려 든다. 제대로 된 측량 도구를 갖추지도 못한 채 말이다.


어려서부터 던졌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꺼내본다. 학창 시절의 나와 영창에 있던 군인 시절의 나, 부모님 앞에서의 나와 연인 앞에서의 나, 비즈니스 현장에서의 나는 무척이나 다르게 행동한다. 그럼에도 나는 나 스스로를 '같은 인물'이라고 자각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틀린 자각일까? 생물학적으로 보면, 10년 전의 나를 구성하던 세포는 이미 모두 죽고 새로운 세포로 대체되었다. 물리적으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벽히 '다른(Different)' 존재다. 나라는 하나의 표본조차 시간과 환경에 따라 이토록 유동적이고 다르게 변하는데, 우리가 감히 타인을 향해 다름과 틀림을 명확히 논할 자격이 있을까?


1+1이 2가 아닐 수도 있다는 힌트 정도는 이제 알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을 향해 들이대는 그 무수한 잣대들이 과연 다름을 재는 자인지, 틀림을 재는 자인지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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