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스노어가 물었다.
"이 그림 어때?"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추운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막내를 품에 안고 다른 두 아이와 거친 칼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다. 덴마크의 혹독한 겨울이 이 그림 속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던 중 책에서 읽었던 hygee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춥고 어둡고 긴 겨울 날씨 탓에 바깥 활동보다는 가족과 친구들끼리 실내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덴마크의 문화.
- hygee라는 단어 있잖아. 나 그거 좀 궁금해. 그게 정확히 뭐야? 함께 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거야? 아님 그 행위를 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거야?
- 전부 다야. 그냥 여러 가지 표현이 가능해.
- hygee가 덴마크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된 이유가 뭘까?
- 덴마크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를 찾다가 나온 게 아닐까?
- hygee가 행복이랑 관련이 있어?
- 행복이란, ‘얼마나 많은 돈과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가’ 보다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얼마나 자주 시간을 보내는가’와 관련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덴마크 문화 속에 있는 hygee가 주목받은 게 아닐까 해.
- 설명 들으니까 더 궁금해진다.
- 그럼, 우리 hygee 해볼래?
- 그래, 좋아!
- 준비 다 됐어. 어때? 이제 hygee 하자.
- 오! 좋다 좋아. 조명과 촛불로 집안을 아늑하게 만드는 거구나. 덴마크 사람들은 이렇게 겨울을 보내는 거야?
- 잠깐, 기다려봐. 여기에다 따뜻한 차 한 잔 해야지.
https://youtu.be/r9Iz3cxwcwI
우린 Jose Gonzalez의 앨범 In Our Nature를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덴마크에서 돌아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난 가끔 노란 간접 조명을 켜고 차를 마시며 Jose Gonzalez의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나는 언제든 스노어네 집 소파에 있게 된다.
- 네가 우리 집에 오면 같이 보려고 도서관에서 덴마크 영화 DVD 빌렸는데 볼래? 영어자막 있어.
- 그래. 나 덴마크 영화 보고 싶었어.
영화 제목이 'Oldboys'였다.
내용인즉슨 할아버지들로 구성된 덴마크 축구팀이 스웨덴으로 원정경기를 떠나는데, 주인공 할아버지가 휴게소에서 낙오되며 겪는 로드무비이다. 영화 중간쯤, 멤버 한 명이 없는 것을 알게 된 다른 팀원들이 버스 안에서 왁자지껄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스노어가 웃으면서 저것이 바로 전형적인 덴마크 사람들이라고 했다. 주인공을 데리러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람, 혼자서도 올 수 있을테니 괜찮을 거라고 하는 사람,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사람, 괜히 문제 만들지 말자는 사람, 코치한테 전화가 올 거니까 여기서 기다려보자는 사람, 자기는 부인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화를 하겠냐며 반박하는 사람. 결국 투표로 결정하자는데 그럼, 거수로 할 건지 비밀투표로 할 건지로 한바탕 시끌시끌한 토론이 벌어지는 장면이다.
영화가 끝나고, 그 장면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 달라고 했더니, 어렸을 때부터 학교교육은 비판적 사고와 토론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그 장면에서와 같은 그런 토론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국은 어때?" 스노어가 물었다.
한국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