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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 Jan 27. 2022

덴마크에서 길을 잃다

집 떠나면 개고생

나의 덴마크 친구 스노어는 얼마 전 대학을 졸업했고 아직 직업이 없다. 덴마크 정부는 일정기간 무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직업센터'라는 곳으로 불러서 취업을 도와준다. 오늘 스노어는 그 직업센터에 가는 날이고 그동안 나는 코펜하겐 당일치기 자전거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한참 열차를 타고 가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모험을 하고 싶었던 걸까? 코펜하겐 외곽지역에서 코펜하겐까지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한 정거장 전인 Valby 역에서 무작정 내렸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코펜하겐 외곽은 낮은 건물들이 많았고 한적했다. 그리고 자전거 도로는 코펜하겐처럼 완벽했다. 이런 곳에서 매일 자전거 타는 삶은 어떨지 상상하며 2시간 정도 구석구석 달렸다. 그렇게 저녁 6시가 되었고, 이제 저녁을 먹고 돌아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눈에 뜨이는 예쁜 식당에서 괜찮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왔다. 노선표에서 코펜하겐 중앙역 발견. 그리고 아까 처음 내렸던 Valby역도 찾았다. 그곳에서 2시간 남짓 자전거를 탔으니까 근처 어딘가에 지금 내가 있는 Glostrup 역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남성에게 물었다.


나 - 저기요, 지금 이 역이 왜 노선표에 없죠?

남성 - 아! 이 노선표는 광역 기차 노선표고요, 여긴 메트로 전철역이에요. 어디 가시는데요?

나 - Vordingborg 역이요.

남성 - 거기 가는 열차는 이 역에 안 서요.

나 - 아, 그럼 어떻게 하죠?

남성 - 음, 잠시만요. 제가 좀 찾아볼게요.


그러더니 스마트폰을 꺼내서 어플을 실행시켰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여성이 다가와서 한 마디 거들었다.


여성 - 여기서 Hoje Taastrup 역으로 가시면 그곳에서 Vordingborg로 가는 열차를 타실 수 있어요.

남성 - (나에게 어플을 보여주며) 여기서 000행 열차를 타고 000역에 가서 거기서 000행 열차를 갈아타고 어쩌고 저쩌고.

여성 - (남성에게) 그렇게 가면 빨리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행자에게는 너무 복잡하니까 그냥 Hoje Taastrup 역으로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남성 - 이 어플을 깔면 쉽게 갈 수 있을걸요?

여성 - 하지만 그 어플은 덴마크어만 지원하는데 이 사람은 덴마크 말을 모르잖아요.

남성 - 이 사람도 아이폰 쓰고 있는데 덴마크어 키보드 깔고 그냥 역 이름 치면 되잖아요.


우리를 지켜보던 또 다른 중년 커플이 다가와 대화에 참여했다.


중년 남성 -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그래도 저 여성분의 말대로 Hoje Taastrup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거기서 열차를 한 번만 갈아타면 되니까요.


옆에서 구경하던 두 세명의 시민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씩 거든 끝에, 내가 Hoje Taastrup로 가는 것으로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나의 질문에 족히 예닐곱 명이 잠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바로 어제 스노어랑 같이 본 덴마크 영화 'Old boys'에서 할아버지들이 논쟁하던 바로 그 장면처럼.


Hoje Taastrup 역으로 가는 열차에 타자마자 마주친 여성의 압도적인 스타일에 그만 얼어버렸다. 건너편에는 팔뚝에 큼지막한 문신을 한 일행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의자 3개에 다리 펴고 앉아 있다. 사진 왼편에 십 대로 보이는 남자애들 두 명이 뭐라 뭐라 했다. 그리고 그 여성은 나를 보며,


- 자전거 멋지다.

- 고맙습니다.

- 우리 아들이 그거 얼마인지 궁금하대?

- 1,500달러 정도 하겠네요.

- 우리 아들이 나중에 돈 모아서 그거 사겠대. 그거 어디서 사니?

- 브롬톤이라고 하는데요. 영국 브랜드라 여기서 쉽게 구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근데요. 아줌마 지금 타고 계신 자전거는 얼마예요?

- 하하하. 이거 마음에 드니? 이것도 1,000달러 좀 넘는다.

- 그거 혹시 크리스티아니아 자전거인가요?

- 그래 맞아. 좀 아는구나.

- 네, 제가 여기 덴마크랑 자전거에 관심이 많아서요. 그럼 혹시 크리스티아니아에 사세요?

- 응, 우리 식구들 모두.

- 아! 그렇군요. 여기 오기 전에 책에서 봤어요. 궁금한 게 많은 동네예요. 가보고 싶어요.

- 언제든 환영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떤 역에 도착했는데, 창밖으로 Taastrup이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이 보였다. 급히 인사를 하고 서둘러 내렸다. 그리고 열차를 갈아타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역의 규모가 굉장히 작았다. 환승역의 번잡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런! 여기는 Taastrup 역이고 내가 내렸어야 할 역은 바로 다음 역인 Hoje Taastrup 역이다. 한 정거장 일찍 내려버린 거다. 신용산역에 가야 하는데 용산역에서 내려버린 거다.


그렇게 또 시간 허비하며 다음 열차를 탔고 Hoje Taastrup 역에 도착. 목적지인 Vordingborg 행 열차 시간 확인하고 플랫폼에서 기다리는데. 열차가 예정 시간보다 3분 정도 일찍 왔다. 미리 와서 기다리다가 시간 되면 출발하는 거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열차에 타자마자 문이 닫히더니 바로 출발하는 거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옆에 있는 승객에게 물으니 이 열차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다. 힘이 쭉 빠지며 몸안에 있던 영혼이 스르륵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또 다음 역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Hedehusene 역이다.

반복되는 헛발질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기차역이 좀 으스스하다.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직원도 안 보인다. 공포영화에 자주 나오는 그런 분위기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가. 해가 지기 전에 집에 갈 수 있을까? 스노어네 동네는 시골이라 가로등도 없단 말이다. 해 떨어지면 정말 답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역 밖으로 나와봤는데, 길거리에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이게 말이 되나? 하염없이 길거리를 헤매다가 젊은 남성 한 명 발견했지만 (공포영화를 너무 많이 봤는지) 이 황량한 길거리에 딱 한 명의 사람이 나타나니 더 무서웠다. 용기를 내서 도움을 청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절망적이었다. 아까 그 Hoje Taastrup 역으로 다시 가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 역으로 가는 열차가 40분 후에나 온다고 했다.


난 끝났다. 해지기 전에 Vordingborg 역에 도착하긴 글렀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 라이딩을 해야 한다. 생각만으로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40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 Hoje Taastrup 역으로 갔다. 정말 이제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역에서 그리고 플랫폼에서 총 3명의 덴마크 사람에게 지금 들어오는 열차가 Vordingborg 행 열차인지 물어봤다. 이번에는 시간에 딱 맞춰오는 열차를 탔고 이미 탑승한 승객에게 또 한 번 확인했다.


아! 이제 됐다.


그나저나 암흑 라이딩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라이트를 챙겨 오지 않은 게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그때 마침 스노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내일도 일찍 직업센터에 가야 해서 지금 자려고 하는데 넌 어디야?

-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지금 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 그런데 있잖아.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열차 말이야. 우리가 지난번에 탔던 열차랑 좀 다르게 생겼어.

- 그럴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 안심이 되자 피곤이 몰려왔다. 너무 긴장했었나 보다.


잠시 후, 역무원이 표 검사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한 마디 건넸다.


- 저건 당신 자전거입니까?

- 네.

- 이 열차에 자전거를 가지고 탈 수 없습니다.

- 네? 그럴 리가요? 이미 자전거를 가지고 여러 열차를 탔었는데요?

- 이것은 독일 열차입니다. 다른 승객들이 보시면 항의하실 거예요.

- 아!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요. 어쩌죠?

- 아무튼 자전거는 안돼요.

- 아니, 그럼 내려야 한다는 말인가요?

- 네. 다음 역에서 내리세요.


뭐야! 오늘 왜 이래! 말도 안 돼!


결국 내렸다. 밤 11시. 여긴 도대체 어디지?

Ringsted 역이라는데, 와! 미치겠네.

다행히 역 대합실에 젊은 남녀가 있었다.


나 - 저기요. Vordingborg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여성 - 방금 도착한 열차 타야 돼요. 빨리 뛰세요.

나 - 그게 말이에요. 제가 지금 그 기차에서 쫓겨났거든요.

여성 - 네? 왜요?

나 - 자전거 때문에요. 자전거를 가지고는 탑승이 안된대요. 독일 열차라나 뭐라나.

여성 - 말도 안 돼요. 처음 듣는 말인데요! 그래도 그렇지 지금 이 늦은 시간에 내리라고 하는 건 너무 심하잖아요.

나 - 어쩔 수 없죠. 다음 열차를 타야겠는데요. 좀 도와주세요.

여성 - 아, 잠시만요. (스마트폰으로 잠시 검색을 하더니 금방 표정이 굳어진다) 아... 이런... 유감스럽게도 1시간 더 기다리셔야겠네요. 다음 열차는 12시 10분이에요.

나 - 네? 아... 네... 어쨌든 감사합니다.


체념하고 벤치로 돌아가 앉아있는데, 그녀가 다가와서는,


여성 - 그런데 말이에요. 다음 열차에서는 혹시 모르니까 자전거를 지금처럼 접어 놓는 게 좋겠어요.

나 - 아까 쫓겨난 열차에서도 이렇게 접어놨었어요.

여성 - 정말요? 아! 이건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자전거야. 내 가방보다 작은데.


정말 그랬다. 폴딩 되어있는 내 브롬톤 자전거는 그녀가 들고 있던 가방과 크기가 비슷했다.


언성을 높이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일행이 전화를 끊고는 나에게 왔다.


남성 - 저기요. 방금 열차 회사 직원과 통화를 했는데요. 12시 10분에 오는 열차에는 자전거 실을 수 있다네요. 다행이에요. 같이 있어주고 싶지만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열차 회사에는 일단 항의는 해 두었어요. 오늘 일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앞으로는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랄게요.

나 - 아! 정말 고마워요. 정말 친절하시네요.


이렇게 그 젊은 남녀가 떠나고 나니 기차역 대합실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50m 정도 떨어진 곳 의자에 앉아있는 어떤 아저씨는 허리를 숙이고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기이했다. 잠시 후 키가 2m 20cm 은 훌쩍 넘어 보이는 사내가 들어왔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아주 익숙하게 한 손으로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다른 손으로는 쓰레기를 뒤졌다. 거대한 몸의 상반신이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갔다. 별 소득을 얻지 못하자 다른 쓰레기통으로… 이렇게 대합실에 있는 5개의 모든 쓰레기통을 뒤진 후 몇 가지 아이템을 얻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역무원도 없고 cctv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여기서 내가 무슨일을 당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스노어에게 문자를 보내 기록을 남겼다. 잠시 후, 스노어에게서 답장이 왔다.


- 말도 안 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외국인 관광객을 열차에서 내쫓아! 이럴 수는 없어. 이건 정말 아니야! 그건 그렇고, 나 자다 깨도 괜찮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꼭 전화해. 아니면 내가 역으로 나갈까?

- (헉! 이 녀석은 너무 심하게 친절하다) 아니야. 스마트폰 라이트 켜놓고 가면 돼. 그리고 지난번에 다녀봐서 가는 길 알아. GPS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난 좀 늦을 거야.


1시간 3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오는데 5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결국 Vordingborg 역에 무사히 도착.

역 앞 놀이터를 비추고 있는 (범죄 예방 효과가 있다는) 파란색 조명이 인상적이었고 밤하늘에 별도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역을 벗어나니 '칠흑 같은 어둠',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이란 설명이 딱 들어맞는 그런 상황을 마주했다. 바닥에 똥이 있어도 밟을 수밖에 없는, 맨홀 뚜껑이 열려있어도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어둠이었다. 아이폰에 있는 라이트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두운 시골길을 기억에만 의존한 채 달려 겨우겨우 스노어네 집에 도착했다. 씻을 정신도 체력도 없었다. 그냥 침대에 쓰러졌다.


만약, 오늘의 이 개고생이 이번 여행의 액땜이라면 내일부터는 엄청나게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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