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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Oct 01. 2024

‘잡초’에서 ‘곡식’으로의 길, 그 길 위에서 서성이다

                               - 주름조개풀











거실 안까지 파고드는 햇살이 눈부시고 아침나절의 기온이 20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끈적거리던 피부의 감촉은 사라지고 이제 건조한 공기 탓에 온몸이 근질거리는 그 가을이 마침내 내게로 찾아온 것입니다. 햇살은 저토록 찬란한데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입니다. 이런 날에는 빨래를 하고 싶습니다.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고 청소를 끝낸 후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합니다. 건조기에 넣지 않고 그냥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어두니 마음이 뿌듯합니다. 이제 이 빨래들은 한 나절만 지나면 뽀독뽀독 깔끔하게 말라 제 몸 안에 햇살을 가득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 빨래를 개며 가끔씩 코를 묻어 햇살의 냄새도 맡게 될 것이고요. 


자, 이제 밥을 할 시간입니다.

얼마 전 여행길에 산 ‘호라산 밀’을 쌀과 섞어 씻은 후 솥에 안칩니다.

전기압력밥솥이 가쁜 숨을 뱉어내더니 이내 구수한 내음이 집안에 가득 차네요.

아무런 반찬도 없이 한입 가득 넣어 천천히 씹고 싶은 그 냄새, 아니 ‘밥의 향기’입니다. 평생 밥을 하고 살아왔건만 질리지도 않은지 늘 정겨운 바로 그 향기입니다. 한 때 유행했던 영화 속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 이 말속에 숨겨진 그 정겨움과 애틋함, 미움과 용서, 따스함과 내려놓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밥의 이 향기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일 것도 같습니다. 


이토록 내가 사랑하는 그 ‘밥’의 원천인 ‘벼’의 꽃을 아름답게 찍어보자고 결심한 지 꽤나 오래되었건만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유 시간이 나면 논이 너무 멀리 있거나, 논을 지나갈 기회가 있을 때면 카메라가 없거나... 인생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소망조차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벼의 꽃을 아름답게 담아내기가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닐 것입니다. 그 작은 꽃, 예술적인 꽃술, 적절한 타이밍... 언젠가는 그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네요.  



여기저기 피어난 ‘주름조개풀’이 눈에 띕니다. 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주름조개풀로 이야기가 비약하는 까닭은 이 녀석이 오랜만에 크랙 정원에 나타나 내 눈에 띈 ‘벼과’ 식물, 쉽게 말하면 ‘풀’의 한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풀은 ‘나무’와 대비되는 초본 식물을 말하므로 많은 속씨식물들이 이 분류군에 속하겠지만 보통 사람인 우리가 ‘풀’이라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인 풀은 벼과와 사초과 식물을 말하는 경우가 많지요. 잎이 두드러져 꽃은 잘 보이지 않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바로 그 풀 말입니다.

‘꽃’을 알아가는 것도 버거운 나에게 벼과와 사초과의 식물을 공부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고 그 핑계로 나는 일찌감치 이들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꽃들이 주위에 너무 많은 탓이라고 우겨가면서요. 사실 이 말은 틀린 것이지요. 우선은 풀들도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잘못된 말이고, 또 굳이 아이처럼 꽃과 풀을 구분한다 하더라도 사실 우리 주위에 꽃보다 많은 것이 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라고 툴툴대는 내게 어떤 꽃 공부 선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요. ‘풀 중에서 들에 피어나는 것은 벼과고, 산에 피어나는 것을 사초과야!’  맞는 얘기일까요?  


이제 나는 다른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소소한 것들의 아름다움, 작은 것들의 완벽함에 매료되는 나이에 이른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주름조개풀에 대해 공부도 해 볼 겸 간단하게나마 벼과 식물의 구조를 들여다봅니다.

 

< 사진은 벼과 · 사초과 생태도감의 것을 일부 캡처했습니다.>

 


오른쪽 그림부터 차례로 볼까요? 


낯선 용어도 몇 개 보이지만 대개는 비교적 낯익은 용어들입니다.

암술과 수술대(화사), 수술대 위에 얹힌 꽃밥... 수술대에서 꽃밥이 토독토독 튕기듯 비어져 나오는 장면은 정말이지 신비스럽습니다. 그중에서도 암술머리가 참으로 멋지지요? 내가 풀꽃에 반하는 이유는 바로 이 암술머리의 모양 때문입니다.     

        


< 왼쪽은 아직 이름을 모르고 있는 식물의 꽃이고, 오른쪽 사진은 벼목 골풀과에 속하는 ‘길골풀’입니다.>  



아기들 젖병을 닦는 솔처럼 보이기도 하고 작은 새의 깃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아마도 바람에 의존하여 꽃가루받이(풍매화)를 하는 식물의 특성상 날아가는 꽃가루를 가능한 많이 잡으려는 구조물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용어들입니다. 물론 내게 말이지요.

호영과 내영은 우리말로 바꾸면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낱꽃을 이루는 ‘겉껍질’이 호영이고 ‘속껍질’이 내영이지요. 수확하여 도정하기 전의 볍씨를 생각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호영과 내영을 볍씨에서는 ‘왕겨’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왼쪽의 그림입니다.

‘화축’이야 ‘꽃대’를 말하므로 새로울 것이 없고요, ‘포영’이라는 용어가 새롭습니다. 포영은 작은 이삭을 밑에서 받치는 기관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삭꽃차례로 꽃들이 피어나다 보니 든든하게 받쳐줄 받침대가 필요했나 봅니다. 보통 2개로 되어 있어서 각각 제1포영, 제2포영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까락’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이 밀밭 까락의 물결에 손을 대며 걸어서 가족에게로 가는 멋진 장면이 떠오릅니다. ‘까끄라기’라고도 불리며 특히 보리 이삭을 떠올리시면 바로 이해가 될 것 같네요. 밀, 벼 낟알 껍질에서 자라는 수염으로 피부에 닿으면 무척이나 깔끄럽지요. 새롭게 씨가 될 낟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바늘처럼 뾰족하고 긴 까락에는 보통 아주 작은 톱니가 촘촘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이를 함부로 만지거나 먹게 되면 상처가 날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다들 경험해 보셨지요? 내가 힘들여 만든 씨앗, 함부로 먹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지요. 또 까락은 가늘고 긴 모양으로 가벼워서 씨앗을 멀리 내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 까칠한 생김새를 보면 바로 이해가 되겠지만 동물이나 사람들 옷에 잘 붙습니다. 더욱이 열매를 맺게 되면 끈적거리는 물질을 만들어 더욱 잘 들러붙게 하여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 역할을 하게 되지요.  


                      < 확대하여 본 밀 이삭입니다. 포토샵 이미지 생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이삭의 아래 부분의 까락에 빼곡하게 들어찬 톱니가 보이지요? 작은 이슬방울들을 매달아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지만 이삭을 잘못 삼키면 입안에 상처가 나는 것은 기본, 한번 삼킨 이삭은 입 밖으로 뱉기도 어렵게 하고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고통을 더해줍니다. 정말 따끔한 교훈을 주는 셈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네요.

여러 번 언급했지만 식물들의 번식에 있어서 씨앗을 만드는 일과 더불어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씨앗을 멀리 보내는 것입니다. 벼과 식물들에게 있어서도 이 과정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래서 이들은 잘 익은 열매를 줄기로부터 떼어내어 멀리 흩어지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탈립성’이지요. 그런데 낟알을 모아 추수를 해야 하는 인간들에게 이 성질은 참으로 귀찮기 짝이 없는 노동을 강요합니다. 어느 해 우연히 익은 낟알을 떨어뜨리지 않는 돌연변이가 나타납니다. 추수가 쉬워집니다. 이들만을 모아 다음 해에 다시 심습니다. 종자 개량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탈립성이 없는 종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심지어 옥수수는 튼튼한 이로 열심히 뜯어내지 않는 한 꼼짝도 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식물들로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힘들여 씨앗을 멀리 보내지 않더라도 인간들이 알아서 심어 가꾸고 그 열매를 지구 곳곳으로 퍼뜨려 줍니다. 이제 인간의 식량으로 선택된 벼과 식물들은 ‘호모 사피엔스를 이용한 번식’ 방식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자연선택’과 성선택‘ 위에 훨씬 효율적인 '인간선택'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벼과 식물의 어떤 종들은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지구를 정복하게 됩니다. 기나긴, 그리고 멋진 서사시(敍事詩) 같지요? 벼와 밀, 그리고 옥수수의 지구정복기! 재미는 별로 없고 때로는 오싹하기도 한 이야기입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정작 주름조개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벼과 식물에 대한 지루한 설명이 되고 말았네요. 그러나 주름조개풀도 벼과 식물이므로 공통된 특성은 알아볼 수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3번 사진을 보면 아름다운 깃털 모양의 암술도, 귀여운 신발처럼 보이는 꽃밥을 가득 담고 있는 수술대도 잘 보이네요. 4번 사진에서는 이미 열매를 맺고 있는 주름조개풀의 날카롭고 멋진 까락도 확인할 수 있고요.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조개와는 닮은 구석이 없는데 왜 주름조개풀일까요? 그나마 ‘주름’은 이해가 됩니다. 2번 사진에서 보듯 잎의 가장자리 모양이 우글우글 주름 잡힌 것처럼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겠지요. 문제는 ‘조개’ 부분인데 조개풀의 중국 꽃이름이 바로 진차오(荩草 신초)라고 할 때, 그 이름을 이두식으로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출처 :http://www.indica.or.kr/xe/flower_story/5320774)   



사실 벼과의 식물들은 어디서나 흔하게 마주치는 아이들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눈에 ‘예쁘게’ 보이지는 않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뿐이지요. 실제로 벼과식물을 볼 수 없는 장소란 지상에 없을 정도로 지구상에 번성하고 있으며 또 가장 진화한 식물군이기도 합니다. 한 때 ‘나무’로 뒤덮였던 지구가 약 800만 년 전 기후 변화로 건조하게 된 이후 ‘풀’의 승리가 뚜렷해집니다. 이제는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풀을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커집니다. 숲에서 열매를 따먹고 살던 유인원들이 어떻게 초원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는지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의 풀들은 광합성으로 얻은 에너지를 탄수화물로 그대로 저장하여 다음 해 싹을 틔울 때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우리들에게는 훌륭한 식량자원이 되는 것이지요. 벼과 식물들을 이용하는 방법(농사)을 터득한 후에야 비로소 ‘문명’이라는 것이 나타날 수 있게 되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풀'들의 소중함이 바로 이해됩니다. 풀과 인류의 문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름조개풀의 꽃은 여전히 피고 있지만 이삭의 아래쪽에는 열매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이 열매 또한 탄수화물을 저장하고 있겠지요. 그렇다면 가을을 거쳐 길고 혹독한 겨울 동안 어떤 동물들이던 그들의 소중한 먹이로 사용되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동물들만이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는 여러 종류의 씨앗을 가루로 빻아 주식인 곡식의 가루와 함께 풍미를 더하는 데 사용했다는데 그 보조 씨앗에는 주름조개풀의 씨앗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벼과 식물인 강아지풀도 가난했던 시절에는 양식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물론 주식은 아니었지만 부족한 곡식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이용된 것이겠지요. 인류의 주식으로 등급을 올리는 시험에서 주름조개풀이나 강아지풀은 수많은 다른 풀들과 함께 예비합격자 명단에 들어있다가 결국은 불합격자로 강등됩니다. 인류의 주식이 되거나 그냥 잡초로 남거나의 갈림길에서 실제로 풀들은 어느 쪽의 선택지가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잡초에서 곡식으로의 길, 긴 생명의 역사에서 본다면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요. 이제 살아남은 조상 인류의 후손인 나는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주름조개풀의 어여쁜 암술과 수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잃어버린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려봅니다.  



한낮이 되어가는 가을날, 눈부신 햇살은 몇 걸음 뒤로 부드럽게 물러나고, 저 아래 보이는 텃밭에서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는 호모 사피엔스들이 보입니다. 이제 먹이는 넘치고, 넘치는 먹이가 넘치는 살이 되고, 그 살을 빼기 위해 남은 시간 거리를 달리거나 헬스장으로 가야 하는 시절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먹이를 마련하는 데 열심입니다. 설사 먹이 구하기가 ‘취미’가 되었다고는 해도 말입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바라보는’ 광경은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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