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쥐꼬리망초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더운 여름날들을 보내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제법 살 만하다고 느끼는 시간, 마음은 또 저만치 달려가며 다가올 가을, 그 쓸쓸함을 미리 쓸쓸해합니다. 아직 혼이 덜 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봅니다. 게다가 아직 한낮에는 30도 가까이 오르는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산책길에 아껴두고(?) 보던 쥐꼬리망초의 꽃도 다 지고 이제 굵은 쥐꼬리만 남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도 하지만 선명하게 글이 되어 나오지 않는 이 꽃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긴 했습니다. 크랙 정원의 소박한 꽃들을 찍으려면 자주 거쳐야 하는 ‘관문’까지 통과하여 몇 컷 사진으로 남겨둔 이 꽃, 다 지기 전에 ‘내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능력이 되질 않아서였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이왕 관문이란 말이 나왔으니 그 관문에 대한 얘기를 해 보려 합니다.
도시의 시멘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꽃 사진을 찍다 보면 꽤나 많은 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가오십니다. 여자 노인이 하는 짓이 이상해 보인 탓이겠지요.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뭐 하시는 거예요?’ 또는 ‘뭘 잃어버리셨나요. 뭘 찾고 있나요?’
‘아니요, 그냥 꽃 사진 찍는데요!’
‘아, (요 대목에서 흘낏 꽃을 보십니다.) 귀한 꽃이에요?’
‘아니에요, 흔한 꽃인걸요!’
‘아아~~ (말꼬리가 길어지며 대놓고 심드렁하다는 표정이 됩니다.)
이게 호기심 혹은 오지랖의 5단계입니다. 가끔은 몇 단계가 생략되기도 하고, 아예 말은 하지 않지만 온몸으로 궁금증을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집 마당에는 더 예쁜 꽃이 있는데...’라는 자랑 비슷한 첨언으로 대화가 끝나기도 합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나도 상냥하게 대꾸해 드립니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이런 사정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지혜가 아직도 부족한 나는 자주 짜증이 나고,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큰 장소에 피어있는 꽃인 경우 사진 찍기를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최악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시선, 심심한 데 이게 무슨 일?이라는 표정과 함께 ‘카메라 좋은 것 같은 데 얼마 주고 샀나?’라든가 ‘나도 며칠 전 꽃 사진 한 장 찍었는데 좀 봐주쇼!’라는 말까지 내뱉는 할아버지들을 만날 때입니다. 이럴 때면 취미생활은 이내 재난이 되고 맙니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뒤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쯧쯧 혀 차는 소리마저 생생하게 들릴라치면 제 풀에 어이없는 웃음도 나옵니다. 아마도 ‘집구석에서 밥이나 할 일이지 뭐 하러 저러고 나다니나, 세상 참...’라는 말이 삼켜진 것이겠지요.
우리 사회에서 ‘예쁘지도 않은 늙은 여자’로 산다는 것은 때로 기본적인 프라이버시나 자존감을 버려야 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쁘지 않은 늙은 여자는 그냥 늙은 존재일 뿐,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관공서에 가서 일을 보려 할 때도 무조건 달려와 무언가를 설명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나마 친절한 사람들이어서 고맙게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는 전제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늙은 여자라는 카테고리 안으로 밀려들어가면 그녀는 순식간에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 사회에 은연중 존재하는 ‘늙은 여자’라는 분류가 날카롭게 느껴집니다. 이런 일들을 자주 경험하며 나는 스스로를 ‘여자’, ‘예쁘지 않은 사람’, ‘노인’이라는 ‘트리플 마이너리티’라고 표현해 봅니다. 내가 만든 용어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차별’의 범주가 비단 이것뿐일까요? 더 날카롭고, 더 아프고, 더 적나라한 가지가지 범주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세상을 더욱 건조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나라고 해서 예외일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견고한 인식의 틀을 돌이켜보며 반성합니다. 까칠한 도시 할망구, 하지만 까칠하게 군다고 내가 다시 젊고 예쁜 여자가 되거나 격조 있게 늙은 남자가 될 일은 없으니 어쩌면 그냥 익숙해져야 하는 풍경이겠지요. 귀여운 꽃잎을 떨어뜨리고 이제 까슬까슬한 쥐꼬리만 남긴 쥐꼬리망초를 보며 이 아침, 요런 까칠한 생각을 해봅니다. 쯧쯧, 스스로에게 혀를 차면서요.
쥐꼬리망초는 다른 많은 크랙 정원의 꽃들이 그렇듯 그냥 스쳐 지나가기 십상인 꽃입니다. 꽃이 아주 작기 때문이지요. 가을이 가까워지며 크랙 정원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의 크기는 커지고, 그에 따라 꽃은 상대적으로 더 작게 느껴집니다. 마치 예쁘지도 않은 늙은 여자가 그러하듯 이 꽃, 그 존재 자체도 두드러지지 않지만 일단 꽃이 눈에 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정도는 아니지요. 꽃이 진 후 남은 이삭은 투박하기 짝이 없는 거칠거칠한 모습이어서 예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모양이 바로 쥐꼬리를 닮아 쥐꼬리망초가 되었답니다. ‘작은 꽃’, ‘흔하게 피어나는 잡초’, ‘쥐꼬리를 닮은 꽃 진 후의 모습’, 이 녀석도 내가 보기에는 트리플 마이너리티입니다.
사실 쥐꼬리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쥐라도 보게 되면 꺄악~ 하는 비명과 함께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기 일쑤였으니까요. 하물며 죽은 쥐를 볼 때야 말할 것도 없고요. 쥐꼬리망초의 꽃은 존재감이 없지만 도시의 길에 누운 죽은 쥐의 꼬리는 존재감이 꽤나 강렬하지요. 어쨌거나 이 꽃의 꽃차례는 확실히 쥐꼬리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에 ‘망초’는 왜 붙었을까요? 국화과의 꽃인 망초와는 생김새뿐 아니라 그 족보까지도 전혀 다른 데 말입니다.
<위는 개망초, 아래 사진은 망초입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이 꽃이 망초처럼 아무 데서나 흔하게 자라는, 하찮은 풀꽃이라고 하여 성의 없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설도 생뚱맞은 그 이름만큼이나 이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쥐꼬리망초는 예로부터 우리 땅에서 피고 졌던 자생식물이니 그 이름이 이미 있었을 터이고, 반면 망초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어서 늦게야 이 땅에 나타났는데 그 망초에 빗대어 원주민인 식물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선후가 바뀐듯하여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제가 찾아본 자료 중 가장 상세하고 믿음이 가는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진범에 대해 우리의 전통적 명칭으로 망초(網草)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사용되었기 때문에 진범은 곧 망초이었다. 쥐꼬리망초는 망초로 오해되었지만 꽃차례가 쥐꼬리를 닮은, 실제로는 망초가 아닌 가짜 망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출처 : http://www.indica.or.kr/xe/flower_story/10778550)
그렇다면 망초는 亡草 (나라가 망할 무렵에 유입된 꽃이라는 의미 - 망국초) 또는 휴경지에 마구 피어나는 잡초라는 의미에서 莽草이고, 쥐꼬리망초의 망초는 網草이므로 사실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다는 것이네요. 이제 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이름의 유래를 찾는 일은 너무 어렵습니다.
쥐꼬리망초의 꽃에서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아랫입술 꽃잎의 색과 또 그에 대비되어 눈길을 확 끄는 흰색 무늬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꿀이 있음을 알려주어 곤충을 유도하는 활주로지요. (허니 가이드 - Honey Guide) 윗입술 꽃잎에는 수술이 아래쪽을 향해 나와 있어서 꽃가루받이를 해 줄 곤충이 꿀을 빨기 위해 꽃 속에 머리를 들이밀 때 등 쪽에 꽃가루가 묻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영리하고 효율적인 디자인이라 그런지 많은 꽃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위는 ‘나도송이풀’, 아래쪽은 ‘털향유’입니다.)
같은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의 해결책이 서로 비슷할 때가 많은 것처럼, 식물들도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조건을 찾아 진화하다 보면 비슷한 해결책을 내놓는 경우가 많나 봅니다. '수렴진화'라고 하지요.
좀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던 이 꽃이 최근 매스컴을 타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코로나19 치료제의 개발 과정에서 DW2008S라는 물질이 높은 항바이러스 활성을 나타내어서 임상 2상 시험의 추진 대상이 되었다는 보도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DW2008S는 쥐꼬리망초의 성분에서 유래한 신약후보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이야 전문적 영역이라 알 수가 없지만 흔하고 작아서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 그 식물에서 인류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물질을 찾아냈다니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식물도 대견하고 또 그걸 찾아낸 연구자들도 대단합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현재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길고 긴 세월 동안 숱한 환경적 난관에 부딪히며 그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은 영웅들입니다. 어디 쥐꼬리망초뿐이겠습니까? 모든 종의 생명체들은 그 유전자 안에 그들이 극복해 온 문제들을 풀어낸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지구 환경이 고정된 것이라면 그런 열쇠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아직도 불타고 있는 젊은 행성입니다. 그러기에 환경은 자주 바뀌고 그 변화가 생명체들에게 치명적일 경우도 많습니다. 생명의 역사를 통틀어 모든 생명체들은 그런 변화에 맞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환경 자체까지 바꿔왔습니다. 그 엄숙하고도 지난한 발자국이 모든 생명들의 유전자 속에 남아있겠지요. 그러기에 하나의 언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하나의 박물관이 통째로 사라짐과 같은 것처럼, 하나의 생물종이 이 행성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맞닥뜨릴 수도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식의 시각 자체가 여전히 생명들에 대한 지극히 인간중심적 소비관이고 인간중심적 이기주의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미안해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하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려 봅니다. 어쨌든 너희 모두는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하다고 말입니다. 예쁘거나 예쁘지 않거나, 크거나 혹은 작거나, 그 기세가 왕성하거나 또는 멸종해 가고 있는 존재이거나 말이지요.
‘다양성’의 발현이야말로 생명진화에 있어서 존재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지표입니다. 생명의 진화에서 ‘발전’이나 ‘진보’를 찾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진작에 판가름 났습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능력별 ‘줄 세우기’를 생명의 세계에 들이대어서 안됩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살아있는 모두가 생명의 기적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고 하찮은 쥐꼬리망초가 인간들의 세상을 통째로 뒤흔든 그 무서운 질병을 물리칠 마법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쁘지도 않은 늙은 여자들이 한 끼의 밥상을 차려 가족을 건강하게 먹여 살리고, 이제 막 등단한 젊은 소설가의 작품을 읽어 그 또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문화 콘텐츠를 좀 더 우아하게 소비하여 품격 있는 사회 만들기에 도움을 주며, 수많은 상품 중 환경적으로 더 나은 상품을 찾아 소비하고, 사회의 어려운 계층을 위해 작은 돈이나마 기부를 하고, 선거에서 진지하게 한 표를 행사하고...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합니다만 많은 그녀들이 그런 소소한 실천을 통해 이 세상을 조금씩 나아지게 하는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
모두가 소중한 존재가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내게 쥐꼬리망초가 소중하듯 나도 그 꽃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 꼭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식물의 이름에 늘 관심이 가기는 하지만 공부가 짧아 어려움이 큽니다. 사족입니다만 제가 가장 신뢰하고 참조하는 것은 ‘인디카’ 카페(http://www.indica.or.kr)의 '푸른솔7’님과 '화우'님의 글인데 이 허접한 글을 통해서나마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참조하거나 인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