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마중
열흘 남짓 다녀온 여행, 잠옷으로 갈아입다 내려다보니 다리에 자그마한 멍 자국이 몇 군데 보입니다. 언제 생겼는지, 어쩌다 생겼는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구간 구간 깎아지른 절벽을 탈 수밖에 없던 여정이었고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는 아마도 겁에 질려 허둥지둥 정신없이 다니다 이곳저곳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절벽길을 덜덜 떨며 오르고 나서 바라본 아래쪽 강의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옅은 푸른색의 강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그 강변 저쪽으로는 현대식 도시 경관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쪽의 ‘과거’와 저쪽의 ‘현재’를 잇는 다리가 연약하지만 아름답게 놓여 있는 풍경 속에서 과거의 흔적인 유적이 주는 감동과는 다른 감흥이 느껴집니다. 바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주는 내밀한 기쁨입니다. 그 사이 내 다리에는 크고 작은 멍들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생긴 지 며칠이 지나서인지 멍은 작은 구슬처럼 까맣고 동그란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옅게 변하고 곧 연두색으로 그리고 노란색으로 변해가다가 어느 날, 그것이 생겼을 때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겠지요.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길게 남는 상처가 아니기에 크게 신경이 쓰이지도 않지만 멍은 ‘상처’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고요한 아픔’, ‘소리 없는 통증’... 생겼다가는 이내 사라지는 소심한 흔적들... 내 삶은 이런 숱한 멍들과 함께 한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오랜만에 길을 나섭니다. 여행길에서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던 소설 한 권을 찾으러 도서관으로 가는 길입니다. 출발할 때 이미 꽃으로 피어있던 까마중에도 어느새 초록의 열매가 달리고, 그중 몇 알은 검은색으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 열매를 보며 문득 어젯밤 내 다리의 멍을 떠올립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습니다. 그저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아주 먼 옛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지칠 무렵 따먹던 그 비릿하고도 달짝지근한 열매의 맛이 떠올랐습니다.
길에서 피기 시작한 까마중을 보게 된 지는 사실 좀 되었지요.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는 까마중을 보며 새삼 질긴 생명력과 생명의 자유분방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곳 내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언젠가 먼 나라 이탈리아의 야외원형극장, 그 돌틈 사이에서 피어난 까마중(혹은 까마중 비슷한 식물?)을 보고 반가웠던 기억도 납니다. 이번의 해외 여행길에서도 까마중은 자주 그 모습을 드러냈었지요. 식물계의 코즈모폴리턴으로 불러주고 싶을 만큼 저토록 여러 곳에서, 저토록 크기도 다양하게, 그리고 저토록 다르게 생긴 잎사귀로 피어나다니... 사족이 되겠지만 잎의 모양이 너무도 다르게 보이기에 혹시나 내가 다른 종의 식물을 같은 종(種)으로 혼동하고 있지나 않은지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미국까마중’이라는 식물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는 소식도 들었고요. 그러나 찍어 온 사진들을 보니 모두 까마중인 것 같아 일견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마국까마중에 대한 공부도 좀 해볼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뭐 잘 된 일이지요. 공부에는 힘이 들고 나는 놀고만 싶으니까요.
까마중의 꽃은 전형적인 ‘가지과’ 식물들의 꽃 모양 그대로입니다. 특히 가지과 식물들 중에는 우리가 일상의 먹거리로 이용하는 것이 많기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지, 고추, 토마토, 감자 등이 그런 종류의 꽃들이지요. 또 야생식물 중 도심에서든 빈 터에서든 혹은 산기슭에서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배풍등’도 가지과의 꽃을 피웁니다.
< 좁은잎배풍등>
까마중과는 달리 덩굴성 식물이기에 얼핏 보면 매우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꽃’의 모양에만 집중해서 보면 두 식물의 꽃이 매우 닮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다만 배풍등의 경우 꽃부리의 갈래조각이 뒤로 완전히 젖혀지는 데다가 길게 꽃부리 바깥쪽으로 뻗어 나와 있는 암술 주위로 5개의 수술이 모여 있는 모양이 마치 배드민턴의 셔틀콕같이 보인다는 점이 까마중과의 차이라고 할까요? 비슷한 식물 중 ‘좁은잎배풍등’은 꽃의 색이 보랏빛이어서 배풍등과도 쉽게 구분됩니다. 다만 배풍등과는 달리 쉽게 눈에 띄는 식물은 아니어서 소개해 보았습니다.
아래는 까마중의 꽃 접사 사진입니다. 배풍등과 거의 같은 모양이지요?
그러나 까마중의 친근함과 익숙함은 그 꽃에서만이 아니라 열매에서 오는 느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초록의 열매가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까맣게 익어갈 때 그 열매의 유혹에 한 번쯤 빠져들지 않은 아이가 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이지만 단맛의 낌새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단맛이 그만큼 귀했던 그 시절 밖에서 뛰놀다 보면 목도 마르고 배도 출출하고... 그래서 그 까만 까마중 열매를 따서 입속에 넣곤 했던 기억이 내게도 있습니다. 달짝지근하기도 했지만 비릿하고도 아릿했던 그 맛! 경상도 사람인 남편은 이 열매를 ‘개땡깔’이라 부르더군요.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향토색이 가득합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삶과 가까웠다는 증거도 되겠네요.
까마중이라는 이름은 까만 이 열매가 스님들의 까까머리를 닳아서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 백과) 학명 중 종소명인 nigrum도 ‘검다’는 의미이니 까마중의 인상은 꽃이나 잎보다는 그 열매가 결정짓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왜 하필 검은색일까? 대부분 먹음직스러운 열매들은 빨간색인데 말이지요. 하기야 블루베리나 오디 등도 ‘깜장’에 가까운 보라색이니 놀랄 정도로 신기한 것은 아니지요.
열매는 식물들의 소중한 결실인 씨앗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많은 식물들의 씨앗은 동물들에게 ‘먹힘’으로써 멀리까지 퍼질 수 있지요. 그래서 식물들은 많은 에너지를 들여 정성껏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열매 속 씨앗이 채 성숙하기도 전에 성급하고 배고픈 동물들에게 먹힐 수 있다는 점이지요. 이렇게 되면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식물들은 방어책을 만들어냅니다. 익지 않은 열매는 대부분 녹색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익을 때까지 기다려!’라는 시각 신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배고픈 동물들을 달래기에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 맛은 시거나 떫거나 쓰거나... 아무튼 맛이 없기에 음식으로서의 매력도 떨어지도록 조절합니다. 조심성 많은 식물에게는 이러한 방책조차 2%가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덜 익은 열매에는 독을 만들어 두기도 합니다. ‘이래도 먹을래?’ 뭐 이런 경고겠지요. 열매가 익어감에 따라 독성도 약해지고 특히 열매의 색은 빨갛게 변해갑니다. ‘이제는 먹어도 돼!’라는 OK 사인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식물과 동물들 사이의 이런 약속은 마치 도로의 신호등이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처럼 생태계의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보장해 줍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이러한 경험 때문에 우리 인간들에게 ‘빨강’은 맛있게 익은 열매, 영양가 풍부한 먹거리, 삶의 즐거움... 을 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시각은 빨간색에 매우 민감합니다. 빨간색의 옷은 다른 어떤 색의 옷보다 강한 인상, 오래 지속되는 인상을 만듭니다.
비슷한 모양으로 피어났던 까마중과 배풍등 열매의 사진입니다. 어떤 열매가 더 유혹적인지요?
까마중 열매가 유독 진한 까만색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초록의 열매가 익어감에 따라 색이 변하는 과정은 여느 열매와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채 익지 않은 초록의 열매는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니까요.
까마중만이 아니라 가지과 식물들은 흔히 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널리 알려진 것은 ‘솔라닌’입니다. 까마중 열매의 성분이기도 한 이 솔라닌은 감자의 싹 속에 들어있는 성분으로도 유명한데 많이 섭취했을 경우 혀와 입안이 얼얼해지고 감각이 둔해지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익지 않은 까마중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이와 비숫한 경험을 해 보신 분들이 있을 것 같네요. 이런 증상은 금방 사라지기는 하지만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두통, 설사, 복통, 심하면 마비, 경련 등의 증상까지도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한 때 까마중 열매가 몸에 좋다고 하여 유리병에 담아 상품화된 적도 있었습니다. 조금은 위험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모든 좋은 일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식물이 우리들에게 베푸는 열매 한 알에도 생명의 네트워크와 서로 간에 지켜야 할 규칙은 존재합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억지를 부리거나, 나눠야 할 것들을 나누지 않고 홀로 독점하는 것은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결국은 내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멍’, 특히 자잘한 멍은 사실 생길 때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얕은 상처입니다. 그 사라짐이 색의 스펙트럼으로, 즉 시각화되어 나타난다는 점도 생각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인간의 삶에서 우리에게 아픔이 되었던 것들은 일순간에 사라지는 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아픔이 크고 깊은 것이었다면 도드라진 피부의 상처로 오래오래 남겠지요. 그러나 작은 아픔이었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소리 없이 바스러져 내 몸속으로 흡수되어 마침내 새로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굳이 아픔이 아니라도 모든 기억은 그렇습니다. 배풍등의 붉은 열매가 언제나 잊히지 않은 채 깊어가는 가을을 기다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상처’ 같은 기억이라면, 까마중 까만 열매, 잊힌 듯 흔적 없던 그 맛의 추억은 크랙 정원의 그 허름한 틈 사이에서 피어나 익어가는 열매를 보고서야 간신히 떠올리는 아련한 ‘멍’의 기억일 것입니다. 아프지 않아 다행이고, 너무 예뻐 소중한 기억들입니다.
이제 까맣게 익어가는 까마중의 가을 위로 노란 은행잎들이 소복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접어두고 다시는 펼치지 않으리라 포기했던, 이제는 짧아진 내 소망의 리스트를 떠올려 봅니다. 발목까지 쌓인 은행잎을 밟으며 걸었던 기억들 사이로 나는 다시 가슴 벅찬 꿈을 꿉니다. 다시 한번 아름다운 삶의 한 페이지를 열어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스러지고 소멸해 가는 이 가을에 말입니다! 왜냐하면 소멸처럼 보이는 이 가을의 진실이 결코 소멸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땅으로 들어가 쉬며 꿈꾸며 내년을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