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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빈 터를 채우는 하찮은 꽃

- 벼룩이자리

by 나우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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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저 남도 산사(山寺)로의 여행은 하나의 로망이 됩니다. ‘올해는 꼭 가야지, 올해는 꼭 갈 테야!’ 숱하게 갈망했던 그 남도의 산사 방문은 올해도 또 물거품이 되는 듯했습니다. 1박 2일의 템플스테이를 신청해 놓고 부푼 희망에 가슴 설레던 바로 그 순간 몇 년 만의 심한 감기로 도저히 출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취소 전화를 걸어 남녘 행을 포기하고 있던 그날 저녁 늦게 함께 가기로 했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남녘의 산야가 산불로 초토화되고 있는 이때 봄나들이 삼아 그곳에 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한편으로는 나만 생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솔직히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절의 담당자분들께 사연을 이야기하자 그분도 흔쾌히 이해하시고 스테이 날짜를 연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 남짓 지난 어느 날, 중단되었던 그 여행길로 나설 수 있었었습니다. 기차여행은 여전히 낭만을 한가득 담고 있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산과 들을 바라보며 달리는 그 길은 그대로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차에서 내려 절집을 향하는 길은 도시의 출퇴근 시간의 모습을 방불케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택시에서 내려 보도도 제대로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섶에는 자잘한 봄의 풀꽃들이 가득했습니다. 냉이, 꽃다지는 물론 살갈퀴, 제비꽃, 뽀리뱅이, 큰개불알풀, 선개불알풀 또 누군가 심어 놓은 앵초까지... 작은 꽃들의 잔치, 소박한 꽃들의 천국... 그 길 위의 봄꽃들이 도시의 크랙 정원에 피어난 꽃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조금 놀랍고도 크게 즐거웠습니다.


사실 크랙 정원의 꽃들 중에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널리 퍼져 피어나는 꽃들이 많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다양한 지구 환경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는, 최고의 생존자인 셈이지요. 그중에는 며칠 전 동네의 크랙 정원에서 만났던 ‘벼룩이자리’도 있었습니다.


벼룩이자리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그야말로 봄의 천국이었던 그 산사의 모습 몇 장면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그 시기, 그 절집에 그런 꽃(겹벚꽃)들이 핀다는 정보를 알지 못하고 찾아간 탓도 있었기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아름다움은 마취제와도 같습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모든 복잡한 감정, 부정적인 생각조차 멀리 날려버립니다. 봄은 가장 봄다운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고, 그 모습은 그곳을 찾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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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절인지 금방 눈치 채셨지요? 그러나 어느 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봄 풍경이라 생각되어 소개해 보았습니다.


벼룩이자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벼룩이자리라는 이름 자체에서 이미 그 꽃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것인지 눈치 챌 수 있습니다. 하찮기는 하지만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보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꽃이 피기 전의 어여쁜 모습입니다. 잎자루가 없는 달걀형의 마주난 잎, 잎겨드랑이에서 길게 벋어 나오는 꽃대들이 어울린 그 모습이 제게는 꽃 못지않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꽃이 피기 전 이른 봄부터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곤 했답니다. 첫 번째 사진을 보면 꽃이 피기 전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 흰색의 꽃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고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녹색의 다른 꽃이 피어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꽃을 접사하여 보니(1번 사진) 흰색의 꽃잎이 5장이고, 그 끝은 동글동글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역시 5장의 꽃받침조각은 그 끝이 뾰족하고 꽃잎보다 길어서 흰색의 꽃잎과 어울려 환상의 콤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꽃잎의 모양은 비슷한 이름의 ‘벼룩나물’과 비교할 때 특히 중요한 차이점이 됩니다.


다음은 비슷한 이름의 꽃인 ‘벼룩나물’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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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보면 벼룩나물의 꽃잎은 얼핏 10장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꽃잎이 깊이 갈라져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사실은 5장입니다. 5장보다는 10장이 화려해 보여서 곤충을 유혹하기에도 좋겠지요. 꽃밥이 터지기 전 수술의 진한 노란색이 특히 눈에 띕니다. 이에 비해 벼룩이자리의 수술은 연한 분홍빛을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두 꽃 모두 암술의 모양이 특이하고 예쁩니다. 특히 벼룩이자리의 암술 3대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마치 바람개비처럼 굽어 바깥으로 휘돌아 나가는 모양입니다. 암술머리에 꽃밥을 묻힐 수 있는 확률을 높이고자 하는 구조이겠지요. 가장 효율적인 구조가 가장 멋지고 예술적인 모양을 보여주는 놀라움!

이왕 벼룩이자리와 벼룩나물을 비교해 살펴보았으니 마지막으로 큰 차이점 하나를 지적해 봅니다. 벼룩이자리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줄기와 꽃받침조각에 털이 빽빽합니다만 벼룩나물의 줄기는 털 없이 매끈합니다.


벼룩이자리와 벼룩나물 이외에도 벼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벼룩이울타리, 벼룩아재비, 큰벼룩아제비들이 그것들이지요. 대체로 아주 작은 꽃을 피우는 식물들입니다. 그중에서 비교적 덜 알려져 있고 만나기도 쉽지 않은 꽃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물벼룩이자리 (Elatine triandra Schkuhr)’가 그것입니다. 물론 벼룩이가 아니라 물벼룩이고 바로 이 ‘물’이야말로 이 식물의 서식지를 잘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메마른 크랙 정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꽃이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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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바닥이나 얕은 물속에 잠겨서 자라는 수생식물인데 옆으로 벋는 줄기의 군데군데 뿌리를 내려 헐거운 습지의 흙을 붙잡고 있기에 얼핏 보면 진땅을 덮고 있는 카펫처럼 보입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잎겨드랑이에서 피는 꽃은 3장의 꽃잎, 3개의 수술과 3개의 암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물속에서는 ‘닫힌꽃’(폐쇄화 - 꽃잎이 벌어지지 않아 주로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꽃)으로 피었다가 물이 빠지면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은 ‘열린꽃’(개방화 - 꽃잎이 열려 있어서 안에 있는 암술과 수술이 밖으로 보이는 꽃)을 피운다고 하네요. 물속에서는 딴꽃가루받이가 어렵기 때문이겠지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수생식물의 생태는 당연히 뭍의 식물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두 식물은 분류학적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벼룩이자리는 석죽목-석죽과의 식물이고, 물벼룩이자리는 차나무목-물별과의 식물입니다.) 단지 그 이름에 똑같이 ‘벼룩’이가 들어가 있기에 내가 떼를 쓰듯 억지로 묶어 본 것입니다. 보기 쉽지 않은 꽃, 특이한 생식 전략도 소개해 드리고 싶었고요.


벼룩은 아주 작은 해충인데 서민들의 생활과 밀착되어 함께 살아갔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속담에 자주 등장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속담으로는 ‘벼룩이 간을 내어 먹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작은 벼룩의 간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작을까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속담은 그저 비유일 뿐 실제로 벼룩에게는 간이 없답니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는 속담에서는 어려운 삶을 사는 우리들의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해충의 파렴치함에 대한 분노가 느껴집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속담은 동물들 중에서도 몸의 크기에 비해 가장 높이 뛸 수 있는 벼룩의 특징에 주목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워낙 몸집이 작다 보니 뛰어봤자 티도 나지 않았겠지요.

그러고 보니 벼룩과 관계 깊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벼룩의 높이뛰기’ 이야기 말입니다.

과학자 한 사람이 벼룩의 능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벼룩의 다리 하나를 없앤 후 벼룩에게 ‘뛰어!’라고 명령했지요. 벼룩은 다 리가 온전했을 때보다 높이 뛰지를 못했습니다. 다시 하나를 떼어낸 후 뛰라는 명령을 내렸더니 벼룩이가 뛴 높이는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하 나씩 다리를 제거해 나가다가 드디어 모든 다리가 없어지니 벼룩은 더 이상 뛰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드디어 결론을 내리지요.

‘벼룩의 다리를 제거하면 벼룩은 듣기 능력을 잃게 된다.’


귀납적 사고의 함정을 꼬집는 우스갯소리일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과학적이며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 방법론... 그러나 아무리 개별적인 증거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다 해도 완벽한 진리에 이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귀납적 사고의 함정입니다. ‘사실’을 가볍게 생각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만 사실의 축적이 바로 ‘참(진리)’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로부터 나의 삶의 태도가 사회적,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간 내가 거두었던 개인적, 사회적 성취를 하나하나 다 합쳐서 보면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결론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리하여 그 성취들을 돌이켜 보며 내가 스스로에 대해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해도 좋은 것일까요?


새벽 3시 도량석을 행하는 소리가 고요한 산사에 울려 퍼지고,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스님들이 모여 본존불 앞에서 예불을 올릴 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그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저 그분들을 따라 절을 하며 남몰래 지극히 이기적 소원을 빌 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하는 자괴감도 들었습니다. 도량을 넓히고 나를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바로 그 순간에도 온통 사심에 사로잡혀 온전히 몰두할 수 없는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 화단 모서리에서 겸손하게 피어나고 있는 벼룩이자리를 봅니다. 이 하찮은 꽃이야말로 소란스러운 인간들보다 부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피어나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세상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조용하고 작은 꽃... 애초 하찮은 생명체란 없고, 또한 특별하게 귀한 생명도 따로 없음을 알려주고 있기에 촉촉한 안개 속에 조금씩 밝아왔던 봄 산사의 아침은 그대로 축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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