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털별꽃아재비
2021년 12월 3일 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편찮기는 하셨지만 생각보다 빨리 닥친 상실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까닭에 가까스로 병원 측의 허락을 얻어 바로 몇 시간 전에야 엄마의 모습을 본 후, 병원 가까이에 있는 남동생의 집에서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편해 보였고, 그저 늘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기에 그 사이 돌아가셨다 것이 실감 나질 않았습니다. 병실을 돌아 나오며 “엄마, 편히 쉬고 있어. 나 또 올게!”라고 말하는 내게 엄마는 “그래, 바쁜데 어서 가 보거라. 엄마가 항상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잊지 말고...”라고 말하셨죠. 평생 바쁘게 돌아치던 딸년, 언제나 이해하고 받아줄 수밖에 없던 엄마의 그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자책은 하지 않습니다. 그게 내 삶이었고, 나름대로는 순간순간 열심히 살았고, 항상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했다는 것만은 진심이었습니다. 엄마와 나는 여느 엄마와 딸처럼 서로를 사랑했고, 많은 순간 너무 많이 사랑했고, 다툼마저도 애정의 일부였다지만 내 사랑의 방식이 자주 잘못된 것이었음을 아는 나는 홀로 가슴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거두어야 할 시간입니다. 엄마는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실테니까요. 엄마를 떠나보내며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이것으로 충분했어.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만약 다음 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엄마, 우리 각각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 태어나
이 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자!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다르게 사랑해 보고 싶어.
의미가 없다 해도 삶은 너무 흥미진진한 거잖아.
엄마도 그렇게 해.
더 예쁜 딸, 더 착한 딸 낳아서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엄마와 함께 했던 삶이 내 삶의 전부이기에
‘엄마가 내 엄마여서 좋았어!’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엄마, 잘 가!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엄마, 나의 엄마 잘 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상실감은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밤늦은 산책길에서 물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고, 엄마가 쓰시던 부엌칼로 된장찌개에 넣을 호박을 썰다가 눈물이 나왔습니다. 앨범을 정리하다 발견한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에는 그 사진의 이면에 감춰진 아픔과 슬픔이 사라지고 조금은 과장된 소녀 감성의 모습만이 남아 있어 나도 모르게 미소 짓기도 했습니다. 키워주셨던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수시로 울음이 터진다는 딸아이의 전화를 받고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일로 마음이 답답했던 어느 날 허공에 대고 말했습니다. “엄마, 죽었으면 다야? 엄마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외손녀, 외손자 어쩔 거야? 걔들 잘 되게 보살펴줘.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야, 제발 잘 되길 빌어줘!” 난 정말 못 돼먹은 이기적인 딸입니다. 내 머리는 ‘죽음은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심장은 그게 결코 끝일 수는 없다고 믿었나 봅니다.
엄마를 보내고 1주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늦가을, 길을 걷습니다. 가을을 떠나보내는 11월의 햇살은 불같은 성깔을 다 버리고 이제 부드러운 색으로 길을 비춥니다. 꽃들은 산에서든 거리에서든 자취를 감추고 마지막 남은 몇몇 꽃들만이 시든 듯, 아직 시들지 않은 듯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꽃들 사이에는 어김없이 ‘털별꽃아재비’가 있었습니다.
한 여름에 피기 시작하여 이제는 기울어져 가는 햇살에 살짝 몸을 맡긴 그 꽃, 사진으로 담아보니 온통 털투성이입니다. 정말 ‘털’별꽃아재비입니다. (4번 사진) 내가 본 털별꽃아재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크게 존재감 없는 작은 꽃, 나무 둥치에 기대어 조용히 피어났다가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꽃들이 다 사라지고 난 그곳에서도 여전히 마지막 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모습...... 문득 엄마가, 그리고 그 엄마를 닮은 내 삶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꽃은 꽃이되 한 번도 눈부신 적 없는 꽃... 이제는 어느 하늘에서 여전히 그리 빛나지도 않는 별이 되어 계실 나의 엄마!
꽃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별을 떠올립니다. 하늘에 뜬 별이 마치 땅으로 내려와 꽃으로 피어난 듯한 모습에 감동하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꽃의 이름 중에는 ‘별’이 들어간 것이 참 많습니다. 대놓고 ‘별꽃’인 식물은 빼고라도 쇠별꽃, 왕별꽃, 개별꽃, 뚜껑별꽃, 노랑별수선, 별나팔꽃, 별이끼, 덩굴별꽃, 별사초 등등. 또 굳이 이름에 ‘별’ 자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별을 연상케 하는 꽃들도 많습니다. 특히 나는 끝이 뾰족한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꽃들을 보며 ‘마치 땅에서 솟아나는 별’ 같다고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별꽃이라는 이름이 붙은 꽃 몇 가지를 소개해 봅니다.
<덩굴별꽃>
<태백개별꽃>
<뚜껑별꽃>
<왕별꽃>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울 만큼 모두 다르게 생겼지요? 그래도 모두가 '별'입니다.
자 이제 털별꽃아재비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그 꽃의 이름에도 ‘별꽃’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네요. 그런데 솔직하게 얘기하면 다른 별꽃들에 비해 그 미모가 조금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좀 더 순박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 눈에만 그런가요? 결코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는 수수하고 그 존재조차 희미한 별......
이름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털’이 붙은 것을 보니 털이 많겠네요. 그렇습니다. 또 이런 이름의 경우 흔히 털이 없는 유사종이 있을 가능성도 큽니다. 찾아보니 ‘별꽃아재비’라는 꽃이 있네요. 이제 두 번째 분석으로 들어갑니다. 꽃 모양이 별을 닮았나 봅니다. 닮았나? 닮았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 ‘아재비’는? 낯선 용어라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봅니다. 아하, ‘아저씨’의 낮춤말이라네요. 이제 퍼즐을 맞춰 살펴봅니다. 별처럼 생긴 꽃인데 조금 덜 예쁘고(아재비) 털이 많은 꽃! 그러나 아직 뭔가 좀 깔끔한 느낌이 들지 않네요. 이 꽃이 별꽃이라는 부분이 말입니다. 실제로 진짜 별꽃은 이 꽃과는 거의 닮은 곳이 없을뿐더러 분류학적으로도 ‘석죽과’에 속하여 (덩굴별꽃, 왕별꽃, 태백개별꽃도 마찬가지입니다.) 국화과에 속하는 털별꽃아재비와는 한참 거리가 먼 꽃이지요. 참고로 뚜껑별꽃은 아예 앵초과에 속한 꽃이기에 더 말할 필요도 없고요. 여기서 무슨 ‘과’다 무슨 ‘과’다 하는 것은 분류학적인 용어라서 나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유용한 경우도 있어서 나중에 여건이 되면 살짝 설명해 볼까 합니다.
자, 이제 다시 털별꽃아재비로 돌아가 봅시다.
이 꽃이 국화과의 꽃이라면 ‘중대가리풀’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롱꽃(관상화)과 혀꽃(설상화)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최소한 둘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진을 확인해 보니 이 꽃은 다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군요. 혀꽃 5장이 보입니다. 3갈래로 갈라져서 꽃잎 수가 더 많아 보입니다. 이빨이 빠진 것 같은 모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혀꽃은 혀꽃입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대롱꽃 뭉치가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는 딱히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위에서 소개한 별꽃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꽃들을 다시 봅니다. 모두가 너무 다른 모습... 결국 사람들은 꽃을 바라보며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엄밀한 명명 규칙에 따라 지어진 이름인 ‘학명’과는 다른 우리가 보통 부르는 꽃이름에는 이처럼 바라보는 이의 감성과 애정과 욕망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습니다.
남의 아이가 아무리 귀엽더라도 ‘내 강아지!’라던가 ‘뽀시래기’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정중하게 본명을 불러주지요. 꽃이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꽃의 이름은 직관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꽃과 잎에 얼룩얼룩한 무늬가 있어서 ‘얼레지’, 줄기를 자르면 젖 잘 먹은 애기의 똥처럼 고운 노란즙이 나온다 하여 ‘애기똥풀’, 여느 여뀌 종류와는 달리 씹어도 매운맛이 나지 않는다 하여 ‘바보여뀌’, 시어머니의 구박에 배고파 죽은 며느리가 꽃으로 피어나 그 가련한 꽃잎 아래쪽에 밥풀 2개를 붙인 것 같다 하여 ‘며느리밥풀’... 서러움마저 정겹게 만드는 이름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분류학적으로는 어찌 되었든 내 눈에 별처럼 어여뻐 보인다면 그 꽃은 바로 별꽃인 것이지요. 물론 이건 내가 쓰는, 나만의 동화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이야기에서처럼 임금님이 벌거벗은 게 보였다면 그게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꼭 그렇게 큰 소리로 ‘임금님은 벌거벗었어!’라고 크게 외칠 필요는 없습니다. 꽃의 세상에서는 어떤 꽃에서건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별을 보면 됩니다. 그러나 끝내 별을 찾지 못했다면 그 또한 괜찮습니다. 털별꽃아재비의 별은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뜨고 지는 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꼭 눈 맑고 마음 착한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별도 아닙니다. 보아도 좋고 보지 못해도 괜찮은 별입니다. 볼 수 있었던 이도 끝내 볼 수 없었던 이도, 모두가 딱히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각기 품은 사연이 달랐을 뿐입니다.
털별꽃아재비에서 별을 찾지 못했던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1년이 다 간 어느 날에야 비로소 꽃 속에서 엄마를 보고, 이윽고 별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별을 보지 못했을 때에도 늘 털별꽃아재비였던 그 꽃, 내가 그 꽃에서 무엇을 보았던 상관없이 여전히 털별꽃아재비네요.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늘 내 엄마였던 엄마는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는 엄마입니다.
내친김에 이 꽃에 대해 한 가지만 추가해 보려 합니다. 이 꽃은 ‘털쓰레기국화’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가축 사료 및 퇴비로 쓰기 위해 남아메리카에서 우리나라에 들여와 심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부지방 전역에 퍼져나갔고 특히 쓰레기장처럼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국화라는 의미에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귀화식물인 것이지요. 꽃은 꽃인데 쓰레기꽃이라...... 어쩌면 털별꽃아재비라는 점잖은 이름보다 오히려 이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꽃을 낮춰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돼지새끼!'라고 부르는 그 마음 비슷한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늦은 가을날까지 조용히 피고 지는 그 꽃, 털별꽃아재비가 핀 도시의 길을 걷는 것은 작은 기쁨, 크나큰 축복입니다. 머나먼 곳에서 이곳까지 와 우리들의 작은 별이 되어 준 꽃, 털별꽃아재비입니다. 나와 나의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별이었던 내 엄마 같은 꽃입니다. 이제 그 꽃은 졌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먼 우주 공간 어딘가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 별,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새끼들, 잘 지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