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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Aug 29. 2024

저 작은 꽃에 모든 세상이 들어있네!

                               -  좀네잎갈퀴











내가 꽃을 보러 자주 나다니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남편이지만, 지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우연히 꽃 이야기를 하는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몰리고 제법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은 대견하게 느끼는 눈치입니다. 그런데 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산과 들로 꽃을 보러 다녀야 하고, 책과 다른 자료들도 뒤적거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모습은 별로지만 그 결과는 괜찮다 하는 셈이니 때로는 속이 상합니다. 보기 어렵고 귀한 꽃들은 그 피는 자리 또한 일종의 중요 정보라서 인맥(?)을 통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자리를 안다고 해도 함부로 달려갈 수는 없는 법이지요. 멀기도 하지만 외지고 험한 산길에서 그 작은 꽃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혼자 가는 것이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맞는 꽃친구들은 꽃을 사랑하고, 흔치 않은 꽃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멸종위기의 꽃만큼이나 소중하고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꽃친구들이 있고, 보고 싶은 꽃이 있다 해도 친구 중 누구라도 여건이 안 되면 꽃을 보러 갈 수가 없습니다. 또 모든 여건이 다 갖추어진다 해도 꽃이 피는 시기는 대충 정해져 있기에 봄꽃의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고 나면 여름의 귀한 난초들이 나오기까지 소위 ‘꽃궁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꽃궁기 끝에 가을이 찾아오면 꽃들이 다시 피어나지만 추석 명절도 끼어 있고 이래저래 시간을 내는 것이 늘 쉽지만은 않습니다. 10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꽃들도 사라져 이제 길고 긴 기다림이 남게 되지요. 한 해의 꽃의 시계는 그렇게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꽃은 늘 멀리에만 있는 것일까요? 내 주위에 꽃은 영 없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장에 오가거나 때로 하릴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다 보면 모퉁이마다 있는 작은 공원들, 조그마한 화단이나 주인이 정성껏 기르는 화분에는 물론 가로수를 둘러싸고 있는 흙, 벽돌담 틈, 보도블록이나 깨진 시멘트 사이에도 식재한 원예종 꽃이 아닌, 그런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음먹고 조금만 열심히 찾는다면 꽃은 어디에나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지요.  



식물이 살아가려면 몇 가지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광합성에 필요한 물과 햇빛, 이산화탄소 이외에도 흙에서만 섭취할 수 있는 미량의 영양소들이 그것입니다. 물속에서 자라는 수생식물들도 있지만 대체로 식물들은 흙에서 살아갑니다.

‘흙’은 참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지구 행성의 긴 역사를 상상해 봅니다. 펄펄 끓는 마그마 덩어리였던 원시 지구가 오랜 시간을 거쳐 서서히 식어가면서 암석이 만들어졌겠지요. 그리고 그 암석들은 여러 가지 침식 작용을 통해 조금 더 작게 쪼개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잘게 쪼개진 암석 조각이 곧 흙인 것은 아닙니다. 암석 조각은 암석 조각일 뿐 아무리 작고 심지어 부드럽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식물들이 자랄 수는 없습니다. 물속에서 육지로 올라온 초기의 식물들이 땅에 줄기를 세우기 위해 뿌리를 만들었을 때, 그리고 그 뿌리가 암석을 뚫고 들어가 그 암석을 더 잘게 부수었을 때 비로소 ‘흙’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초 재료가 갖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직은 흙이 아닙니다. 곰팡이를 비롯한 미생물들이 그 알갱이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생명활동을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살아있는 흙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여기에 적당한 양의 물과 공기가 섞여 들어감으로써 식물이나 동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진짜 흙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지구 전체로 볼 때 흙의 양은 정말 적습니다. 지구의 반지름을 대충 6,300km라고 보았을 때 흙이 존재하는 지각의 평균 두께는 약 30km에 불과합니다. 이 얇은 지각의 대부분은 여전히 암석층이고 흙은 그 위를 살짝, 아주 살짝 덮고 있는 베일과도 같은 것입니다. 토양이 형성된 것은 약 3억 6,000만 년 전부터라고 합니다. 45억 년 지구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흙이라는 것이 얼마나 새롭고,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중한 흙은 한번 유실되면 다시 만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어떤 식물도 피어나지 않은 맨땅을 본 적이 있는지요? 물론 겨울은 예외입니다. 모래땅, 완전한 진흙땅, 오염된 땅, 일부러 식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린 학교 운동장 등등을 제외하면 모든 흙에서는 놀랍게도 식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흙은 지구의 피부입니다. 우리의 몸을 보호해 주는 1차 방어막이자 가장 강력한 조직이 피부인 것처럼 흙은 지구 환경의 항상성과 안정성을 유지해 주면서 그 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삶의 토대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모든 것이 그러하듯 흔하게 눈에 띈다고 하여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존재조차 잊을 만큼 친숙한 것들이 정말로 소중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흙이 풍부하고 상태도 좋은 곳에서 뿌리내렸다면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식물도 자신의 토양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 양이 적고 척박해도 어쩌겠습니까? 흙수저라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곳이 흙이기만 하다면 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주인공 ‘좀네잎갈퀴’는 드디어 도시의 어설픈 순례자인 내 눈에 띄게 됩니다.  



이름부터 살펴봅니다.

‘좀’이라는 접두어가 붙었네요. 작다는 뜻이겠지요? ‘좀’이 붙은 꽃이름은 꽤나 많습니다. 좀바위솔, 좀꿩의다리, 좀고추나물, 좀딱취, 좀딸기, 좀여리연꽃, 좀개미취 등등... 좀네잎갈퀴, 작습니다. 정말 작습니다. ‘좀’ 자가 붙은 꽃들 중에서도 정말 작습니다. 그렇다면 ‘네잎갈퀴’의 작은 버전이라는 것일 텐데 문제는 정작 내가 네잎갈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지요. 하지만 이름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잎사귀가 넷인 갈퀴덩굴류이라는 의미? 맞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잎사귀가 넷인 식물은 많습니다. 이 경우 ‘네잎’이라는 이름은 잎사귀의 수가 넷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그 잎사귀의 모양이 굉장히 특징적이어서 그 식물 자체의 인상을 좌우한다는 의미 아닐까요? 사진을 봅니다. 4장의 잎이 줄기에 돌려나 있네요. (돌려나기, 윤생) 보통의 식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어긋나기나 마주나기에 비해 꽤나 눈에 띄는 모양입니다. 식물의 이름 중에서는 그나마 꽤 직설적이어서 찬찬히 살펴보니 이해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름 풀이의 결과를 정리해 보면 ‘잎사귀가 네 개씩 줄기에 돌려나기로 달려 있으며, 아주 아주 작은 갈퀴덩굴 가족 중 하나’라는 것이네요. 



이제 꽃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연녹색의 꽃은 줄기 끝이나 잎겨드랑이에 달리는데 의외로 꽃자루가 길어서 사진을 찍기에는 힘들지만 매우 우아해 보입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꽃부리는 4개로 제법 날카롭게 갈라져서 꽃의 깔끔한 인상을 더해줍니다. 그 안에 노란 꽃가루를 잔뜩 준비해 달고 있는 4개의 수술이 보이네요. 가운데에는 두 개의 암술대가 들어 있답니다. (3번 사진 참조) 재미있는 것은 열매의 모양인데 2개씩 합쳐진 데다 작은 돌기가 빽빽하게 나있어서, 멀리서 보면 귀여운 아기의 궁둥이 같고, 가까이 다가가 본다면 영락없는 꼬마 도깨비방망이 모양입니다. 꽃은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는 것이 늘 신기하기만 합니다. 



식물의 이름 중에는 ‘큰’이란 접두어를 달고 있는 것도 많고, 또 반대로 좀네잎갈퀴처럼 ‘좀’이라던가 ‘애기’, ‘꼬마’, ‘새끼’라는 접두어가 달린 것들도 많습니다. 여기서 ‘크다’라든가 ‘작다’는 것, 도대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대체로는 기본이 되는 종의 식물과 비교해서 크거나 작다는 의미이겠지요. 예를 들면 '큰바늘꽃'은 확실히 ‘바늘꽃’에 비해 식물체가 큽니다. ‘꼬마은난초’는 ‘은난초’에 비해 작고요. 그러나 어떤 식물들의 경우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웃음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애고야~ 이게 ‘큰’ 거야? 라든가 그리 ‘작지도 않구먼...’이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내 뇌는 끊임없이 감각 신호들을 해석하고 연결하여 어떤 의미, 맥락을 만들어 냅니다. 정작 자신은 내 단단한 머리뼈속 암흑공간에 들어앉아서요. 어차피 ‘진실’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내 밖의 세상이 ‘실재’인지조차 나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나의 성실한 뇌는 나를 기준으로 나의 감각, 신체 조건에 맞춰 이것은 크고 저것은 작은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작으면 무언가 생략되어 단순하고 내게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편안한 느낌, 큰 것은 상대적으로 대단한 존재이고 때로 내게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경보도 울리고...... 

그러나 식물들을 보며, 또 그들의 사진을 찍으며 내가 깨달은 한 가지는 크기와는 상관없이 모든 식물들은 하나하나 그 나름으로 완벽한 생명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단순하든 복잡하든, 크든 작든 하나의 우주이고 완결체입니다. 다만 그 우주들은 닫혀있고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우주들과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거대한 생명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지요. 생명의 우주에는 하나의 중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 하찮은 것, 유익한 것, 유해한 것, 큰 것, 작은 것... 모두가 중심입니다. 서로를 향해 열린 중심들... 나도 그렇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어느 아파트 담장 아래 벽돌과 갈라진 시멘트 사이에서 피어난 저 작은 꽃이 내 크랙 정원으로 성큼 들어서던 그 순간 무료했던 내 하루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이제 무의미 속으로 사라져 가던 나의 시간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산다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건네줍니다. 무력함만 가득했던 갇힌 시간과 공간... 그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함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나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진실로 많은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고, 내게는 그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날 내가 생각했듯 삶이란 그것이 ‘나의 삶’이라 하더라도 나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꽃이 없었다면, 꽃을 보지 못했다면, 꽃을 보러 다니는 시간조차 없었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더 삭막하고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요? 나의 빚은 또 얼마나 더 버겁게 느껴졌을까요? 그 꽃이 저토록 작고 작은 좀네잎갈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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