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을 졸업하는 법

by 마른틈

글을 얼마 만에 쓰는 건지 잘 모르겠다. 최근에 발행한 것들은 전부 미리 써두고 날짜에 맞춰 올리기만 했으니 벌써 달이 훌쩍 넘어갔다.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던 시기를 지나 보내니 글을 쓸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빠 죽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말 죽으란 법은 없는 법이지, 사람이 이토록 간사하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너무 오랜만에 쓰는 탓에 정처 없이 나부끼는 손가락 끝이 키보드 위에서 휘청이는 것뿐이다.

바빴다. 길고 긴 가을 매거진의 북 작업을 마치고 그것이 물성을 가진 책 형태가 되는 동안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움텄다. 언제나 그렇듯 욕심이 많은 나는 양손에 그득그득 무언가를 쥐고 진전이 나지 않는 속도에 한숨만 푹푹 내쉬는 꼴에 치를 떠니, 올해는 그 손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로 한다.


그래, 한때는. 전업주부, 대학생, 개인사업자 대표, 작가.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았지만, 스스로 밥벌이 하나 똑바로 하지 못하는 ‘방구석 무직 백수’라 여기며 그 ‘쓸모’를 인정하지 못하던 나날들이 있었다.

아이 없는 전업주부라 딱히 ‘현모양처’라 부르기엔 부족한 것 같다. 국가장학금에 기대 겨우 강의나 듣는 대학생 신분도 어딘가 어정쩡했다. 개인사업자 ‘대표’라는 허울 좋은 신분을 달고 있지만 수입은 공개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오랫동안 ‘작가 지망생’이라 불리다 자가 출판을 하고서야 조심스레 ‘작가’라 불렸지만, 결국 그것들은 남편이 벌어오는 돈 위에서 유지되는 ‘고상한 취미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 일찍 사회에 진출했다. 열아홉의 겨울, 손이 얼어붙을 듯한 바람 속에서 10cm 굽의 구두를 신고 첫 출근을 했다. 아직 젖살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경력도 나이도 내세울 것 없던 나는 그 높은 굽으로 어른임을 증명해야 했다.

조금은 부당한 대우에 설움을 꾹 눌러 삼키면서도 주중엔 회사, 주말엔 서빙 아르바이트로 청춘을 갈아 넣으며 버텼다. 물려받을 것 하나 없는 조금 서러운 생이라 그랬다. 그러다 어느 연말 건강검진에서 들었던 한마디가 일상을 뒤흔들었다.


“소견서 써줄 테니 대학 병원엘 가보세요.”


급격히 나빠진 몸을 회복하는 동안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그사이 나는 이뤄 놓은 것 하나 없는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직 젊으니 하고 싶은 것을 찾으라”면서도, 도무지 제자리걸음인 통장 잔액을 볼 때마다 초조함을 숨길 수 없어했다. 그러면 나는 어쩐지 죄인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내 나이 서른. 내 또래의 친구들은 “대리님” 소리를 들으며 커리어를 쌓아나가거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뭐지. 늘 양손 가득 무엇하나 놓치지 않으려 욕심 많은 삶을 살아왔음에도 그 손에 쥐어 무색하게 모래알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고작 6년의 공백, 그리고 고용주로서는 영 껄끄러운 ‘개인사업자’라는 이력뿐.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뒤 재취업을 시도했지만 서른이 넘은 신입은 회사에게도 영 부담스러운 것이고, 경력으로 보기에도 조금 애매한 것이 나의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면접 일정이 잡히면 감사한 마음으로 옷을 단정히 다려 입고 심기일전하여 찾아갔다.

당연하게도 날아드는 임신과 출산의 질문은 어느덧 익숙해졌다. 농담을 가장한 무례와 성희롱, 노골적인 편견 또한 감당해야 했다. 어렵게 취직했으나 근무 환경은 늘 열악했으며 부당한 대우는 언제나 반복됐다.

처음엔 그 모든 원인을 그들에게 두었다. 주변 사람들도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수없이 반복되면 결국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법이다.


‘어쩌면 내가 참을성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내가 사회 부적응자인 건 아닐까. 혹시 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도 ‘내 일’을 갖고 싶었다.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사람이고 싶었다. 실로 간절한 마음이었다.


큰 기대 없이 향한 또 한 번의 면접에서, 대표는 전혀 다른 제안을 했다.


“혹시 지원하신 직군 외에도 이쪽에 관심 있어요? 이력 보니까 개인 사업을 A부터 Z까지 직접 운영하신 경험이 있으시길래, 저는 이걸 좋게 봤어요”


얼떨떨했다. 나의 이력을 마치 대표 본인에게 거는 도전장처럼 받아들여 거슬려하거나, ‘어디 한번 불러 구경이나 해보자’는 심산의 군상은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었지 않나. 그들은 내게 스스럼없이 무례를 범했으며, 아랑곳 않고 “취직하고 싶으면 ‘폐업’을 하라”며 종용키도 했다. 나의 경험과 이력을 순수하게 ‘가능성’으로 바라보아주는 대표는 처음이었다.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잠시 너저분한 방을 둘러본다. 버리고 또 버렸다. 길고 긴 미련과 시간만큼 쌓인 것들은 아무리 비워도 계속 쓰레기봉투 속을 채워나간다.

뼈아픈 인생의 두 번째 고난을 겪으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선순위’ 분배를 잘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택’과 ‘집중’ 말이다.


나는 늘 바빴다. 타고나길 욕심이 많은 성정이었는지, 환경이 나를 그렇게 몰아붙였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오롯이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한 만큼 어떤 결과에도 온전히 만족하진 못했던 것 같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고 바빠 예민했으니, 누적된 스트레스와 짜증은 결국 가까운 사람에게 향했을 것이다. 나는 참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미련과 서툰 감정을 졸업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문득 그리 자멸하는 꼴이 못 이기게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그따위로 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괜찮은 인간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이 절한 미련을 정리해야 할 때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나는 고민은 하염없이 늘어져도 실행력만큼은 독보적인 편이다. 몇 년의 고민이 무색하게 단 하루 만에 여러 플랫폼의 퇴점 절차를 밟고 사업자 폐업 신고를 마쳤다.

곧바로 작업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서랍을 모조리 쏟아내고, 부자재를 담아 중고 사이트에 헐값에 내놓았다. 시간을 끌어봤자 결국 지리멸렬한 미련만 남을 뿐이다.


고작 사업을 정리한다고 해서 이 삶에 특별히 여유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 여전히 바쁘겠지. 줄곧 꿈꿔왔던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존경하는 대표님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틈틈이 책도 쓰겠지.

나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다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기로 했다. 한때는 고작 3천 원짜리의 싸구려 행운 반지에 목매는 나날을 보냈다. 미신 따위 아무렴 믿지 않지만, 그저 나의 안온과 행운을 바라던 당신의 애정 한 자락을 믿으며 매일을 버텼다. 그렇게 버텨낸 요즘은 문득 누군가에게 애정과 행운을 담아 이 싸구려 행운 반지를 전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꺼내놓는 것조차 죄악스럽던 어느 날엔 그저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나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때는 그것만을 애타게 바랐다. 다만 언젠가 “그래도 이제는 꽤 괜찮아, 나 잘 해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그 모든 일들이 과거형이 되기만을 소망하고 또 소원했던 날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나의 사랑하는 여름에게 “나 이제 좋아, 그동안은 차마 출산을 앞둔 네게 내 절망을 아낼 수 없었어. 이제 정말로 괜찮아져서, 이렇게 네게 연락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고 털어놓으며 울었다.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끝내 나를 좀먹는 내 안의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당당해져야 한다는 것을, 초조해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아,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겠다.

마치 비워져 가는 이 작업실처럼,

그럼에도 다시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나만의 작은 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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