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다 한 한 줄이, 열 줄의 장문보다 나을 때

컨셉진, 100일간의 글쓰기 67일 차

by 최광래

정오에 눈을 떴다. 아침에 일어날 계획이었지만 게으름을 피웠더니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일어나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턱걸이를 했다. 정신을 깨우는 데는 육체적 노동이 최고다. 온 힘을 다해 등근육을 조이니 잠이 깬다. 노트북을 켜고 아무 노래나 틀었다. 며칠 때 미뤄둔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폈다.


몇 분뒤 현관 비밀번호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와 동생이었다. 며칠 전 생일에 받은 기프티콘을 썼다고 한다.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 세 잔과 떠먹는 티라미스 한 덩이가 들려있다. 피워놓은 인센스를 놔둔 채로 주변의 종이를 정리했다. 한번 피운 향은 끄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위에 화기를 치웠다.


커피를 개인 잔에 옮겨 담았다. 커피가 많이 남았다. 그란데 사이즈를 담기에 부족한 잔이었다. 충분히 크다고 생각했는데, 유리잔은 눈속임이 심하다. 고작 톨 사이즈 하나 들어가면 다행이겠다.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공무원이 어떻고, 공기업이 어떻고... 얼마 전 퇴사한 동생은 다시 구직 시장에 내몰렸다. 대령 전역한 할아버지와 지방 경찰서장을 역임하는 외삼촌에 대해 말한다. "엄마, 그분들은 엘리트잖아요." 턱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뱉었다. 딱히 동생을 위한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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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로 돌아가려고 컵홀더를 챙겼다. 일회용 잔에 아직 커피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한 손에는 컵을 들고, 한 손에는 일회용 컵을 들었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덮었던 책을 들었다. 컵을 내려놓고 보니 홀더에 무언가 적혀있었다. "2021년에도 원하시는 모든 일이 잘 되시길 바랍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잘 되라니, '누구보다 지금 카페가 가장 힘든 사업 아닌가' 생각했다.


자리에 앉아 밀린 소설을 읽었다. 자꾸만 머릿속에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생각났다. '취준생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라던가, '어떻게 지낼 생각인데?'라는 식으로 물어볼 수 있었겠지. 그렇지만 하지 않았다. 엘리트인 친척들의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 잠시 생각했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길 잘했다.


"원하시는 모든 일이 잘 되시길 바랍니다." 자리에 놓은 컵홀더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이 한마디면 되는 것이었다. '잘 되길 바란다.' 그 한마디면 될 것을 뭐 그리 구구절절 말했는지. 말에 대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말을 줄이게 되는 것이 우스웠다. 결국 나는 말을 줄이려고 말을 공부하는구나.


글을 쓰면서 분량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충분히 설명됐을까?'라는 고민으로 덧붙이다 보면 어느새 몇 천자를 채우는 일은 금방이다. 남들은 채우기 어렵다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도 그랬다. 설명, 설명, 설명. 부차적인 설명이 없으면 나를 오해할 것만 같았다. 무언가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때로는 수식하지 않을 때 더 잘 전달되는 것들이 있다. 발표의 기술 중에는 '침묵'이라는 기술이 있다. 청중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중간에 의도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최근 배우기 시작한 소설 쓰기 수업에서도 '굳이 표현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어떤 가치들은 표현하지 않아도 전달된다. 만약 진심이란 말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정확히 표현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라고 쓰고 싶어 졌다.


'어떠어떠한 이유로 너를 좋아해.'라는 말보다는 천천히 지어지는 옅은 미소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정말', '진짜', '엄청' 등 부사를 쓰지 않아도 조심스럽게 전하는 꽃 한 송이가 더 뜨겁다고 생각한다. 나부터도 화려한 언변보다 진심 어린 한 마디를 더 좋아했다. 긴 수식어보다 잠깐의 눈빛, 흔들리는 손끝, 붉게 상기된 두 뺨에서 나는 진심을 느낀다.


조금 부족해도, 화려하지 않아도, 수식어가 없어도 전해질 수 있다. 진심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과업은 '전하는 일' 뿐이다. 너무나도 진심이라, 수식하지 않아도 충분히 크고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진한 마음을. 사람의 몸이 80%는 수분이라 다행이다. 진심이 잘 우러날 테니까.


오늘의 죽지 않을 이유, 삶에 대한 진심이 어느새 우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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