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정체성
사람이 있다. 그의 하루가 카메라를 통해 송출된다. 킹 사이즈 정도 되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누군가의 로망이지 않나 생각한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커다란 철제 냉장고로 향한다. 메탈릭 디자인이 입혀진 최신형 제품인 것 같다. 냉장고 안에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무엇이 들었는지 잘 보이지 않는 스테인리스 반찬동이 가득하지만 그 어떤 곳에도 낭비가 없다. 유리병에서 물을 꺼내어 마신다. 깔끔하게 씻겨진 유리잔에 물을 따른다. 벌컥, 벌컥. 고개를 왼쪽으로 45도 정도 기울이고 양 팔을 위로 들어 기지개를 켠다. 왼쪽 눈을 찡그리는 것은 그만의 버릇인 듯하다.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의식한 듯한 눈빛. 자연스럽지만 망가지지 않게. 과연 자연스러움이 그런 것일까?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은 모습은 불가능할까? 안타깝게도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관측의 세계에는 '관측'이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관측이라는 존재만으로 우리는 자연스러울 수 없게 된다.
최근(이란 말을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관찰 예능이 늘어났다. 개인의 삶을 조명한다는 주제가 연예인에서 이제는 일반인으로 확장되었다. 개중에는 화려하고 무언가 귀감이 되는 존재들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도 볼품없고 위협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방송이 제공하는 창이 넓어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간 TV를 바보상자라고 불렀다면, 이제는 그냥 상자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비추기 시작했다.
방송에 잡히는(유튜브를 포함해서) 타인의 삶을 보면 무언가 괴리감이 들 때가 있다. 무언가 억지가 살짝 섞인 것 같은 느낌.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카메라에 대한 저항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카메라가 익숙해서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인지는 몰라도. 정말? 정말로?라는 질문을 되뇌게 된다. 누구에게나 보이고 싶은 모습이 있을 테니까. 관찰이라고 말하지만, 100%를 제공할 수 없는 방송 매체의 한계일까. 타인에게 보이는 것은 그만큼 뿌듯하고 수치스러울 테니까. 아, 이건 괴리감이 아니라 기시감이었다.
전 직장에서 심리테스트를 만들었다고 내게 보내주었다. '노잼 종합 검진'라는 테스트인데. 회사에 있을 때부터 고심해서 만들더니, 어느새 완성된 모습이 괜히 자랑스러웠다.(물론 나는 거의 관여하지 않은 프로젝트지만.) 그리고 내게 은근한 기대를 보내더니. 어서 테스트를 해 보라고 한다.
링크 : https://jejodo.life/jamstore/nojamtest/
몇 번을 반복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지. "너 이름으로 된 유형이 있는데. 그게 나와야 해."라고 실토했다. 며칠이 지나 알고리즘에 버그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를 수정한 뒤에야 내 결과를 올바르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나를 찾는 데 1주일이 걸렸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타인의 인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를 페르소나로 삼아 만든 유형이라더니, 내가 평소에 하는 생각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소신과 사회적 인정 두 가지를 모두 이루고 싶은 욕심을 들킨 기분이었다.
말이 참 어렵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것과 남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둘 다 비슷한 의미인데. 조금 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또 누가, 누구에게 하냐에 따라 다르다. 무엇이든 과하면 안 좋다는 것처럼 눈치도 과하니까 문제였던 것이지. 눈치 자체가 문제였던가? 오히려 원활하게 사회라는 물결을 흐르게 만드는 것 아니던가?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산다는 것 자체가 나는 모순이었다. 내가 가장 중요해? 애초에 나와 우리를 구분 짓는 선이 무엇인지도 불확실한데? 따지고 들고 싶었다. 책에서 주어지는 대로, 현자들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담아 듣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 이해가 안 된단 말이에요." 기회만 있다면 철학자들을 붙잡고 물어뜯고 싶었다. 물론 그들은 나의 지식 부족을 이유로 나를 무시하려 들 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너는 무인도에서도 잘 살 것 같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왜?라는 내 질문에 "적응력이 좋으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인도에서는 잘 살 자신이 없다. 왜냐면 사람이 없으니까. 내 적응력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만 사용된다. 낯선 사람, 어려운 사람, 불편한 사람이라도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니면 나는 살고 싶지 않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확신했다. 내게 무인도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질문은 무인도라는 단어의 깊이를 너무 얕게 생각한다. 질문의 깊이를 더하려면 정말 아무도 없는, 아무도 만날 가능성이 없는 공간을 말하는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런 공간에서는 살고 싶지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살고 싶어 지려면, 이 지구에 있어야 하고, 언젠가 발견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사회라는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살겠다. 하지만, 사회가 없고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시간이던 공간이던 어떤 축에서도) 나는 그냥 죽겠다. 그런 곳에서 살 이유는 없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정체성'은 타인과 나 사이의 줄다리기처럼 느껴진다. 시라노가 자신을 관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샹탈에게는 쾌감이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는 자신을 지켜보는 존재가 부족했으니까. 그렇지만 관음의 정도가 진해질수록 샹탈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했다. 장 마르크가 시라노와 동일시되는 순간이 그랬을 것이다. 보인다는 것은 그토록 바라 왔어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수치심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샹탈은 그 문제를 장 마르크의 존재로 바라봤다. 그건 오류였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샹탈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샹탈에게 중요한 건 장 마르크였다. 그건 장 마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체성은 타인으로부터 정의된다는 이야기의 흐름처럼,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정의되고 판단된다. 이 사실을 부정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타인들이 내게 관여되어 있고, 나 또한 그들의 시선을 바란 것이니까. 그래서 최소한의 보호구역이 존재하는 것 같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어리광, 우울, 섹스, 생리 현상 등이 그렇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녀석들이 나의 정체성을 가장 구체화시키곤 한다. 아마, 그 자리에는 사랑하는 것들이 함께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달았단다.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우리 앞에 있는 타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 자신의 주인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나무 아래 선 남자, 나무 이미지로 충만한 남자,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바로 그 나무에 대한 은유 때문이었다.
두 번째 편지를 쓰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시라노가 된 거야, 시라노.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연정을 고백한 남자. 이름의 무게에서 벗어나자 돌연 달변이 폭발했던 사람, 그래서 편지 맨 아래에 그는 C. D. B라는 서명을 했던 것이다.
내가 예전에 이 아파트를 산 것은 자유롭고, 염탐당하지 않고, 내 물건을 내가 원하는 곳에 두고, 내가 두었던 그 자리에 확실히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걸 거의 잊고 있었네.
두 사람 모두 사랑의 영토 위에 있을 때 강한 사람은 사실 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사랑의 영토가 그들 발밑에서 사라진다면 강한자는 그녀고 약한 자는 그다.
우리의 운명이 먹는 것, 성교, 생리대에 달렸다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고작 이런 것만 할 수 있다면 흔히 말하듯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에 어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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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참혹한 현실을 겪으면서 당신은 불행할 수도 있고, 혹은 행복할 수도 있지. 당신의 자유란 바로 그 선택에 있는 거야. 다수의 용광로 속에 당신의 개별성을 용해하면서 패배감을 맛보느냐, 아니면 황홀경에 빠지느냐는 당신 자유야. 우리 선택은 바로 황홀경이지, 부인.
자, 내 말이 맞았지. 그냥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정말 이런 사람, 주변인, 집 없는 사람, 노숙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