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호찬과 운영자는 텅 빈 아파트 공원 놀이터에서 만났다. 철 지난 양복에 이대팔 가르마를 탄 운영자의 나이는 오십 대 초 중반으로 보였다. 어깨에는 트레이드마크인 빨간색 확성기가 걸려 있었다. 호찬이 빤히 바라보자, 운영자는 눈시울이 촉촉해지며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게 아니라면 누가보아도 그는 진심을 다해 소회를 전하는 것 같았다. 호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말하자 운영자는 팬심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건 처음이라고, 지금 자신은 드디어 성덕이가 된 기분이라고. 성덕… 자신이 좋아하고 몰두해 온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어디서 뭘 주워듣긴 한 것 같은데, 성덕이라니... 성덕은 사람 이름이 아니외다 이 꼰대 양반아,라고 한 마디 던지고 싶었지만 운영자로부터 정보를 얻어내야 했던 호찬은 순조롭게 진도를 빼야 했다. 덕분에 토끼 모텔에서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고, 감사하다고. 운영자는 겸손을 떨었다. 그런 말씀 마시라고. 박호찬 형사님께서 지금까지 구한 생명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 그날 밤 자신이 한 일은 그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라고. 호찬이 표정을 가만 보아하니, 그저 겸손을 위한 겸손은 아닌 듯 보였다. 운영자는 호찬의 찐 팬이 분명했다. 이만하면 인사 치례가 끝났다고 여긴 호찬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유튜브를 통해 들은 말에 대해서 물었다. 최근 호찬에게 불어닥친 일련의 사건들에서, 경찰이 개입해 사건을 조작한 정황이 밝혀졌고 이를 뒷받침해 줄 증거도 찾았다던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덧붙여, 토끼 모텔에서 사자와 자신을 촬영하던 운영자의 모습이 기억나는데 그날 녹화된 장면도 볼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쏟아냈다. 호찬은 마음이 급했지만 운영자는 느긋했다. 호찬과 마주한 이 시간을 최대한 즐기려는 듯, 같이 저녁을 드시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호찬은 고개를 내저으며 일단 얘기부터 듣고, 먹을지 말지 정하자고 잘라 말했다. 한층 꽃을 피워가던 운영자의 기분이 한풀 꺾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쎄한 공기가 텅 빈 놀이터를 감쌌다. 운영자는 다시금 미소로 분위기를 환기시며 여기서 자신의 작업실이 멀지 않으니 가서 얘기하자고 말했다. 호찬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얘기를 들어야 했다.
운영자가 호찬을 데려간 곳은 서울과 수도권 경계에 위치한 컨테이너 보관 장소였다. 수많은 컨테이너들이 임대인과 매수자를 기대리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운영자의 작업실은 이 컨테이너들 중 한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유튜버답게 방송 및 촬영 장비들이 세팅돼 있었고, 한편에 먹고 자는 생활공간도 보였다. 영세한 것을 넘어 누추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 까진 레자 소파에 걸터앉은 호찬은 파티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운영자가 부스럭 소리를 내더니 운동화 상자 하나를 양손에 들고 다가왔다. 이어 호찬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상자 안에, 사자와는 별개로 경찰청에서 박호찬을 작업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던 호찬은 급한 마음에 상자를 열고자 했고, 운영자는 주방용 비닐장갑을 내밀며 증거물이 오염될 수 있으니 착용하라고 말했다. 호찬은 눈앞의 이 남자가 하는 말과 행동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키는 대로 양손에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극세사 천에 돌돌 말린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천을 펼친 호찬은 수초 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자 안에 있던 것은 호찬의 잃어버린 권총이었다. 호찬은 설마 하는 마음에 총기 몸통에 각인된 총번을 확인했다. 호찬이 분실한 권총과 총번이 일치했다. 호찬은 놀란 눈으로 권총과 운영자를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당신 대체 누구며, 이 권총이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해. 그러자 운영자는 그날 밤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호찬의 등에 흉한 타투 문구 (나는 ㅈ)가 새겨지던 그날 밤, 사자가 갑자기 나타나 타투이스트 여자를 공격하던 그때였다. 운영자는 벌거벗겨진 채로 바닥을 버둥대던 호찬을 등에 업고, 살해 현장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리고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에 진입할 때였다. 등 뒤에서 타투이스트 여자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고, 어쩌면 끔찍한 살인이 저질러질 수도 있겠단 생각에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모텔방으로 들어갔다. 타투이스트는 이미 목이 졸려 숨진 상태였고 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바닥 한 구석에 호찬의 권총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던 것이다. 호찬의 뇌리에 당시 상황이 영화처럼 스쳤다. 피가 낭자한 카펫 위에 떨어진 호찬의 권총 그리고 그 위로 포개지는 운영자의 그림자와 권총을 집어드는 손까지. 호찬은 결국 화를 터트렸다. 그냥 두면 될 걸 왜 굳이 가지고 나와서 사람 병신을 만들었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운영자의 입에서 이상한 이름이 나왔다. 모든 게 홍식이 때문이라는데... 홍식이는 또 누구란 말인가. 운영자가 말하길, 홍식이는 자신과 유튜브 채널을 함께 운영하는 동업자라 했다. 그리고 그가 사는 곳은 바로 옆 컨테이너라고 덧붙였다. 운영자가 가리키는 방향에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칸이 연결돼 있었다.
탁- 불을 켜자 또 다른 컨테이너 내부에 홍식이의 공간이 드러났다. 지저분한 살림살이로 가득할 거라고 짐작했던 이 공간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그리고 내부는 낯익은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호찬과 관련한 사진과 기사 그리고 각종 활동 사진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사건 현장에서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까지 수거돼 전시돼 있었다. 호찬을 대상으로 한 미니멀한 박물관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운영자가 다가와 덧붙였다. 홍식이가 진짜 박호찬 형사님의 찐 팬이라고. 형사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고. 호찬은 모텔에서의 당시 상황이 얼추 짐작됐다. 이 정도의 팬심이라면, 자신이 두고 간 권총을 발견하고는 보물이라도 찾은 듯 흥분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숨겨뒀던 것이리라... 호찬은 마치 독백하듯 중얼댔다. 그니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사자와는 별개로 위에서 나를 공사 친 거다. 평소 눈에 가시였던 내가 권총을 잃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쳐 버리자, 옳다쿠나 사자의 3차 범행에 자신을 엮어서 소위, 짬을 시켜 버린 것이었다. 호찬은 방송에 나와 모자이크 뒤에 숨어 자신의 뒷담화를 해대던 동료 선배놈들의 면상을 떠올렸다. 어디 이들뿐이랴... 경찰 조직 내에서 나를 시기 질투하는 놈들만 모아도 한 개 소대 정도는 거뜬히 나올 것이다. 호찬은 결국 참지 못하고 권총을 집어 들었고, 그대로 컨테이너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당장에 경찰청으로 달려가 등에 칼 꽂은 것들을 색출해 내고 싶었다. 녹슨 컨테이너 철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서 까마귀 떼가 후두두- 날아올랐다. 눈앞에 타오르는 듯한 노을이 펼쳐져 있는데 순간, 침착하자는 생각이 흥분을 누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니지. 아니야. 일단 사자부터 잡자. 그게 순서다."
호찬은 사자를 검거하고 난 이후의 상황들을 그렸다. 기자들로 북적이는 실내 회견장에서 자신의 진짜 권총을 손에 움켜쥐고, 경찰 놈들 보란 듯이 무고를 외치는 자신을 말이다. 단상 아래에는 수갑이 채워진 사자가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위로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와 스포트 라이트가 쏟아졌다. 드라마틱한 역전의 순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래, 이런 게 고수의 복수고 풍모다. 하나씩 뽀개면서 가자. 체계적으루다. 호찬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고 운영자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날 밤, 토끼 모텔에서 직접 촬영하신 영상들 좀 볼 수 있겠느냐고. 운영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러십시다."
호찬은 다시금 운영자의 컨테이너로 자리를 옮겼다. 운영자는 모텔에서 촬영된 영상 소스를 노트북에 띄웠다. 헌데, 운영자가 찍은 그날 영상은 안타깝게도 나이트비전 모드(흑과 백)로 촬영돼 있었다. 이래선 사자의 얼굴 확인이 안 됐다. 분위기를 감지한 운영자는 코에 걸친 돋보기안경을 밀어 올리며 변명했다. 촬영 때 너무 깜깜해서 아쉬운 대로 나이트 비전 모드로 촬영을 하게 됐노라고. 호찬은 화를 꾹 참고 일단 영상을 재생해 보라고 말했다. 화면 속에는 불 꺼진 모텔방 안에서 사자와 타투이스트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고 구석 바닥에서 버둥대는 호찬도 있었다. 화면 속, 악다구니를 쓰며 사자에게 달려드는 타투이스트를 주시하던 호찬이 스톱을 외쳤다. 운영자는 영상을 멈췄고 호찬은 모니터 속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정지된 화면에는 사자의 등에 올라타 타투머신의 바늘을 내리찍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호찬이 화면을 조금 더 크고 선명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흐릿하게 번져있던 영상이 선명해지면서 사자의 목에 꽂힌 뭔가가 또렷해졌다. 바늘이었다. 여자가 내리꽂은 타투머신에 결합돼 있던 바늘. 호찬은 다시금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러자 사자는 자신의 목덜미에 박힌 바늘을 뽑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순간, 호찬의 눈이 번뜩였다. 머릿속에는 한 음절의 단어가 떠올랐다.
피...
사건 현장에서 채증 된 범인의 피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엄청난 단서였다. 사자가 창 밖으로 내던진 바늘을 찾아야 했다.
호찬은 이학사와 조석사를 토끼 모텔로 불러들였고, 운영자도 합세한 상황에서 바늘이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샅샅이 뒤졌다. 바늘은 구멍이 송송 뚫린 배수로 시멘트 덮개 밑 진흙에서 발견됐다. 다행히 물에는 쓸려 내려가지 않았고, 젖은 흙에 세로로 꽂혀 있었다. 비닐장갑을 낀 호찬의 손이 조심스럽게 바늘을 뽑았다. 달빛에 비춰보자, 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붉은 혈흔이 말라 붙어 있었다. 모두의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호찬은 산삼이라도 캔 얼굴로 바늘을 조심히 비닐팩에 담아 국과수로 향했다.
새벽 두 시. 국립과학 수사 연구소, 혈흔 분석실로 들어온 호찬은 연구원이자 후배인 원오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손에는 비닐팩에 담긴 바늘이 쥐어져 있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선배의 방문에 적잖이 당황한 원오는 영 마뜩잖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국과수가 무슨 편의점도 아니고 새벽 두 시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혈흔 분석을 해달라니, 안 된다고 거절했다. 안 되겠는지, 호찬은 운영자와 이학사 뒤에 서 있는 조석사를 가리키며 원오에게 목청을 높였다. 어린 저 것이 친부를 찾겠다고 데려온 거라면서, 혈흔하고 DNA 분석만 좀 해달라고 구라를 쳐댔다. 원오는 불량끼 다분한 행색의 이학사와 조석사를 훑어보더니, 영 안 되겠는지 다시 거절했다. 여긴 국과수이고, 게다가 박형사 님은 이제 경찰도 아니고 민간인이 아니잖느냐며. 출입증 없이 여기 들어온 것부터가 불법이지 않느냐며 따져 묻기 시작했다.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호찬의 외마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원오야! “ 흠칫 놀란 원오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호찬을 바라봤다. 호찬의 눈가가 촉촉해지고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원오는 내심, 이 형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데... 호찬은 격양된 표정과 목소리로 처량 맞게 입을 열었다. 경찰 잘리고서 반성하고 있다고. 그래서 지금 다 내려놨다고. 봉사하면서 남은 여생 살려고 그러는데 힘 좀 보태달라고. 원오는 더욱 난처해져 이러지 좀 마시라며 애원하고, 기세를 탄 호찬은 팔등에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끼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사자한테 총 맞아 죽은 피해자 유족들한테 지금 민사 소송까지 걸린 상태라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고. 다 큰 어른이 눈물 콧물을 짜자 마음이 짠해진 원오는 호찬이 가져온 증거물을 보며 되물었다. 그니까 이 바늘이 뭐냐고. 피는 또 누구 거냐고. 호찬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쳐들더니 저만치 선 조석사를 다시금 가리키며 외쳤다. ”저 새끼 아빠 찾으러 왔다고, 인마! 친부가 맞는지 혈흔 분석 좀 해달라고오!! “ 원오와 눈이 마주친 조학사는 분위기에 맞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원오는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노라 말하며 채증 된 비닐팩을 받았다. 호찬은 원오를 와락 끌어안으며 고맙다고, 잘 되면 박씨라도 물어다 주겠다며 되지도 않는 농을 늘어놓았다. 원오는 얼굴을 찡그리며 호찬을 밀어냈고, 박씨는 됐으니 가서 좀 씻으라 말했다. 어제부터 집에 물이 안 나온다고, 단수라며 호찬이 한술 더 뜨자, 원오는 등 떠밀며 제발 좀 가 계시라며 애원에서 애걸로 단계를 높였다. 운영자를 비롯한 이학사와 조석사는 박호찬의 원맨쇼를 짠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석사가 운전하는 승합차가 국도변을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에는 호찬이, 뒷좌석에는 운영자와 이학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학사는 운영자의 빨간색 확성기를 만지작댔는데, 뜻하지 않게 사이렌음이 터져 나오자 호찬이 타박했다. 가만히 좀 있으라고. 선생님 꺼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해도 호칭이 아저씨였는데, 수사가 이쯤 진전되다 보니 호찬은 어느새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운영자는 차분히 앉아 만면에 미소를 띠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학사와 조석사는 사자의 혈흔이 찾아졌고 분석만 끝나면 신원이 나올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사실 미지수였다. 국과수 DNA 데이터 베이스에 등록된 대조군은 다 합해봐야 이십만 명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인구 숫자를 생각해 보면 댈 것도 아니었다. 운수가 트여서 사자의 DNA 샘플이 저장돼 있을 수도 있었지만, 가능성은 낮았다. 그럼에도 일말의 단서라도 붙잡고 싶은 게 호찬의 바람이었다. 운영자는 창 밖으로 버스 정류장이 보이자, 여기서 내리겠다고 했다. 호찬이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며 전에 없던 예의를 차려 보지만, 운영자의 뜻은 굳건했다. 결국 승합차는 버스 정류장 인근에 멈추고, 운영자가 내렸다. 인사를 나눈 운영자가 돌아서려는데, 호찬이 물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되겠느냐고. 그러자 운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보십시오,라고 답했다. 호찬의 질문의 요는 다음과 같았다. 왜 자신을 오랜 시간 동안 스토커처럼 쫓아다녔는지에 대해서. 팬심이라 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 그러기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고. 운영자이 답변은 간단했다. 박호찬 형사가 자신이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다는 것. 그뿐이었다. 여전히 질문이 남는 답이었다. 묻기도 전에 운영자가 되물었다. 퇴직 선언은 왜 갑자기 하게 된 것이냐고. 호찬의 답도 간단했다. 재미가 없어서라는 답변에 짤막한 이유 두 가지를 더 덧붙였다. 몸만 상하는 것 같고 돈도 안 되고... 운영자는 호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또 뵙겠습니다, 말하고 돌아섰다. 호찬은 운영자의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낙담한 기색을 포착했는데, 그래도 어쩌겠나 싶었다. 진심이었으니까. 이때, 호찬의 아파트에서 홀로 피해자들과 관련한 자료들과 씨름하던 양광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았던 광준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흥분된 기색이 느껴졌다. 피해자들 간에 놀라운 공통점을 찾았다는데... 승합차는 호찬의 아파트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그날 밤, 운영자는 홍식이의 공간이라고 소개했던, 호찬의 소형 박물관 컨테이너 안에서 자신의 허벅지를 몽둥이로 내려치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피부가 터지면서 피가 흘렀다. 운영자의 등과 허리는 자해 흉터로 이미 가득했는데, 호찬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등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내려치는 운영자의 모습은 마치 그 옛날 중세시대 성직자들이 욕망을 억누르고 수행에 정진하려던 모습과 일견 유사해 보였다. 운영자의 머릿속에는 오늘 호찬과 나눈 대화들이 스쳐지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히지 않는 건, 국민영웅답지 않은, 호찬의 사사롭다 못해 하찮기까지 한 퇴직 사유였다. 돈이 안되고 몸도 상해서라니…. 이때, 컨테이너 문이 열리더니 삐쩍 마르고 키가 백 팔십이 넘는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홍식이었다. 기름진 올백 헤어로 넘겨진 머리칼이 뒷목을 덮었고, 얇은 셔츠를 걸치고 눈을 번들대는 이 사내는 운영자를 보자마자 또 병이 도졌냐며 혀를 찼다.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운영자는 입가에 미소를 만들며 홍식이에게 늦었다며 인사했다. 홍식은 대꾸하지 않고 지나쳐 냉장고 문을 열더니 소주를 한 병 꺼내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소주를 병째 한 모금 들이키더니 물었다. 말 섞어 보니 어떻더냐고. 생각이랑 다르지 않더냐고. 홍식은 박호찬 형사와의 만남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운영자는, 생각했던 대로 사람이 맑고 순수한 것 같다며 호찬을 두둔했다. 홍식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젓더니, 손가락을 들어 몹시 안타깝다는 듯이 운영자를 가리키며 흔들어댔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 놈들이 사고를 치면 무섭게 친다고. 눈이 돌면 칼로 수십 번을 찌르고 아무렇지 않게 시체 앞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기도 한다고. 운영자는 그런 부류와 다르다며 호찬을 계속 두둔했고 홍식은 비웃었다. 사람 다 거기서 거기라고, 궁지에 몰리면 본색이 다 나오게 돼 있다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운영자의 몸 곳곳에 난 상처 자국들이 딱해 보였는지 선심 쓰듯 말했다. 자신이 직접 알아봐 주겠다고. 그 형사 놈 밑장을 제대로 까뒤집어서 뭐가 나오는지 보여주겠다고. 홍식의 비릿한 웃음에 운영자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홍식은 손에 쥔 라이터를 껐다 켰다를 반복하면서 기다란 불기둥을 만들었다 꺼트리기를 반복했다. 이때, 컨테이너 밖에서 창을 통해 바라본 내부에는 운영자 한 사람뿐이었다. 운영자는 마치 자신의 눈앞에 누군가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홀로 중얼대고 있었다. 혼자 묻고 답하고 또 묻고. 홍식은 운영자의 분열된 자아였다. 그리고, 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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