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처음 뜨는 달)
1. 아포칼립스
서기 2123년. 폐허가 된 지구 위에는 하나의 개체만 번성하고 있었다. 사람 크기의 사족보행을 하는 짐승이었다. 뻣뻣한 거죽으로 덮힌 피부는 암갈색이었다. 이들은 이구아나처럼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지만 미세한 자극에 사납게 반응하기도 했다. 땅위의 생명체라고는 이들 뿐이었고, 서로를 먹이로 삼았다.
지하 벙커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인류가 멸망한 이후 반 세기 동안 살아온 마지막 인류였다. 벙커는 과거 지하철이 지나는 곳이었고, 지상에는 태양광 집열기가 설치돼 있었다. 핵발전소가 파괴되고, 방사능이 유출되면서 모든 동력원이 끊겼지만 이 시스템만은 유지됐다. 이것이 지금까지 생존자들에게 전기를 공급해주고 있었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생존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지상으로 드론을 띄워 폐허 속에서 통조림을 찾았다. 유일한 먹거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드론의 이동거리는 길어졌다. 다행히 통조림 박스는 계속 찾아졌고 대형 가공식품 공장이 나타났을 때 모두가 신에게 감사했다. 생존자들은 천 명이 넘지 않았다. 이들의 중심에는 백살이 넘은 초로의 지도자와 12인의 원로가 있었다. 이들은 인류가 멸망하기 전을 경험한 유일한 세대였다. 나머지는 벙커에서 태어나 지금에 이른 인간들이었다. 모두 어리고 젊었다.
세르게이와 12원로의 기억이 곧 인류의 역사였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뻗어나갔고, 여기서 기인한 질병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고 했다. 신은 이를 단죄하기 위해서 지구를 불태웠고 이를 ‘신불’이라고 일컬었다. 지상 위의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된 이유였다. 이 시기를 기억하는 세르게이와 원로들은 무욕과 무위의 삶을 강조했고 이를 어기면 벌을 내리는 규율을 세웠다. 모두가 세르게이를 따랐다. 생존자들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마음을 갖으려고 애썼다.
세르게이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곁에는 이십대 초반의 로크라는 사내가 있었다. 로크는 세르게이와 원로들의 진술을 토대로 역사서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들이 기억하는 멸망 이전의 일들을 기록해 후대에 바른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세르게이와 원로들의 기억은 일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모순되기도 했다. 이들의 진술을 정리하는 것이 로크의 일이었다. 하지만 진술에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2032년부터 2041년까지 9년 동안에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참고 : 도일이 제주도로 넘어간 시기는 2029년이다.) 세르게이는 이때를 ‘대망각의 시기’라고 표현했다. 9년이 지나고 의식을 찾은 인류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전 세계가 잿더미로 변해있었고, 사망자는 자그마치 45억명에 달했다. 단 9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불’이 내려진 것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도 이 시기를 기억 못했다. 마치 신이 인류의 시간 한 토막을 깔끔하게 베어내 버린 것처럼. 여러 가설과 추측이 오갔다. 2032년에 인류를 대상으로 뇌에 임플란트를 이식하는 대규모 캠페인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재앙이 찾아들었을 거라는 설이 나돌았다. 세르게이와 원로들의 몸에는 이와 관련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귀를 중심으로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뭔가를 도려낸 듯한 혹은 불에 데인 듯한 상처였다. 결국 역사서는 9년이라는 공백을 메우지 못한 채로 완성됐다. 세르게이는 그로부터 얼마 후 영면에 들었다.
어느 날, 통조림 박스를 찾아낸 무인드론이 벙커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땅 위를 점령한 사족보행 짐승들이 박스에 매달려 들어왔다. 생존자들은 이 짐승들을 ‘코그’라고 불렀다. 박스에 매달린 코그는 다시 지상으로 올려보내졌다. 헌데 이번에는 눈에 띄는 코그 한 마리가 보였다. 하얀 피부에 작은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글자를 본 로크는 이것이 오래 전에 사어가 된 ‘한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를 읽을 줄 하는 사람이 벙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기호’라는 열세살 소년이었다. 기호의 증조부는 원로들 중의 한 명이었고 한국인이었으며 지금은 사망한 상태였다. 기호는 그에게 한글을 배운 바 있었다. 로크는 기호를 방으로 불러 문자를 해독하게 했다. 기호는 더듬더듬 글자를 읽어 나갔고 그 사이 비슷한 모습의 코그 열 한 마리가 더 포획되었다. 해독작업에는 시간이 걸렸다.
얼마 후, 로크의 거대 작업실 벽에는 코그의 몸에 적혀있던 글자들이 가로로 길게 적혔다. 열두 마리의 코그 몸에는 각각 인류의 탄생부터 소멸까지의 과정이 시간순으로 기록돼 있었다. 도입부는 내용이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는 전개됐다. 그리고 그 끝은 모두 인류의 소멸로 귀결됐다. 마치 열두 개의 각기 다른 인류 멸망 보고서를 보는 듯 했다. 로크는 코그가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발견된 no.12 코그의 몸에 적힌 내용에 주목했다. 죽은 세르게이와 원로들이 말한 인류의 발자취와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로크는 여기에 ‘대망각의 시기’에 대한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부분은 비어 있었다. 이제 모두의 관심은 현재가 기술된 지점을 지나 미래로 향하고 있었다. 기록은 예언이 되어갔다. 내용은 짧았다. 생존자들이 지상으로 올라가 신을 만나 구원받게 된다는 문장으로 마무리 되어 있었다.
경도된 생존자들은 탐사팀을 꾸려 글을 쓴 존재를 찾아나서자고 입을 모았다. no.12에 기록된 현재에 대한 묘사가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에 기록자가 혹시 신이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코그가 포획된 장소가 분석되면서 기록이 이뤄진 곳의 좌표가 계산됐다. 현재 위치에서 일만 오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이었다. 생존자들은 탐사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다. 기지 안에 방치돼 있던 비행셔틀이 수리됐고 비행수트가 리폼됐다. 통조림 박스들이 넘치도록 실렸다. 로크와 기호를 포함한 다섯 명의 탐사팀이 구성됐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잿더미가 된 지상에 탐사팀이 올라섰다. 반세기만에 이뤄진 인류의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2. 머신 메시아 (Machine messiah)
로크의 여정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록자가 있을 것으로 예측한 곳에는 폐허뿐이었다. 급기야 갑자기 나타난 코그 떼의 기습에 탐사대원들은 하나 둘 죽어 나갔다. 로크는 상처입은 기호를 업고 간신히 셔틀에 올라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도주과정에서 돌아갈 연료를 모두 소진한 채로 비행셔틀은 전복됐다. 로크는 구조신호를 보내고 기다렸다. 하지만 벙커에서는 폭동이 일고 있었다. 원로들 중의 한 명이 비밀을 폭로하면서 사건이 촉발됐다는데 자세한 내막을 듣기 전에 교신이 끊겨버렸다. 로크는 no.12 코그의 몸에 기록돼 있던 ‘구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예언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자정을 기해 셔틀의 전력공급원은 완전히 끊겼고, 기온은 급격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기내 산소량도 바닥을 쳤다. 조종석 창이 얼어붙자 시야가 완전히 흐려졌다. 기호는 하체에 감각을 잃어갔다. 죽음이 기호에게 먼저 찾아들고 있었다. 기호는 숨을 거두기 전 고백했다. no.12의 몸에서 읽었으나 말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것은 ‘대망각의 시기’에 대한 부분이었다.
인류에 ‘신불’이 내려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전의 일이다. 지질을 탐사하던 홀린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동굴 속에서 멸종한 고대인의 뼈를 발견했다. 피랄레테쿠스라고 이름 지어진 사람 속(HOMO)이었다. 이들은 다른 고대 원시인들과 달리 혼자 생활했다. 지독하다고 할 정도의 욕망을 가진 속이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머물 곳을 침해당하면 혈육과 동료를 막론하고 서슴없이 죽였다. 죽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먹기까지 했다. 이들은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번식을 멈춘 것으로 확인이 됐는데, 알 수 없는 바이러스 때문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것이 피랄레테쿠스가 멸종한 이유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부터였다. 멸종된 이들의 사체가 땅밑에서 썩기 시작하고, 특정한 지열과 지압을 견디면서 무언가로 변화되고 있었다. 석유였다.
홀린의 이 보고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독재군주의 손에 들어갔다. 독재자는 엄청난 인력을 투입해 이들의 사체에서 바이러스를 추출하는데 성공했고, 이것을 인접국에 퍼트렸다. 바이러스의 전파력은 엄청났고 급기야 독재자 자신의 나라를 포함해 전 인류를 집어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감염된 인간은 기이한 형태로 변해버렸는데 이것이 코그였다. 그리고 이들위 몸에서 시작된 발생한 화재는 온 지구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한 ‘신불’이었고, 대지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원인이었다.
마지막 생존자들이 반세기에 걸쳐 지내온 벙커는 알려진 것처럼 태양광 발전시설이 아니었다. 코그로 변한 인간을 원료로 전기를 발생시키는 발전소였다. 이곳의 시설 관리자들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는데, 이들이 세르게이와 원로들이었다. 이들은 지하에 공동체를 건설했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로 하여금 무욕과 무위를 가르쳤다. 하지만 모래 위에 성을 쌓는 형국이었다. 지난 세월 생존자들을 먹여살린 것은 인간을 재료로 한 원료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원로들 중 누군가에게 폭로되면서 벙커에 폭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죽어가던 기호는 no.12 코그의 몸에 적힌 마지막 기록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의 구원으로 소년은 영생을 누릴지어다, 라고 적혀 있었다. 기호는 소년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자청해서 이 먼곳까지 따라온 이유였다. 기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울었고, 결국 숨을 거뒀다. 로크는 이제 자신의 죽음을 기다렸다. 이때 얼어붙은 조종석 창 정면으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다가왔다. 뿌연 창에 얼굴을 처박고 안을 들여다보는 무언가였다. 탈진한 로크의 의식이 서서히 꺼져갔다.
어둠 속에서 선율이 들려왔다. 현악기의 단현으로 연주되는 소리였다. 로크의 시선이 밝아지면서 공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동서양의 문화가 뒤섞인 묘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로크는 헬맷과 수트를 착용한 채로 나무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자, 황금빛 피부로 뒤덮인 코그 한 마리가 누군가의 앞에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한복처럼 생긴 긴옷을 걸친 누군가가 코그의 몸에 글씨를 적고 있었다. 로크는 그가 기록자라고 직감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드러났다. 로크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여성형 로봇, 가이노이드였다. 인공배양된 유기형질로 인간의 얼굴 근육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이 근육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미소가 만들어졌다. 동공은 쉴새 없이 움직이며 로크를 세밀히 관찰했다. 가이노이드는 로크에게 자신을 ‘신’이라고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3. 나선상승
로크 앞에 선 가이노이드가 기록을 시작했다. 로크가 앉은 의자에서 열 개의 메카닉 암이 뻗어 나왔다. 그 끝에 달린 렌즈가 빛을 발하며 로크를 스캔했고 일부는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 호흡과 혈압 그리고 감정상태까지 기록했다. 가이노이드는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항성 간 이동을 위한 연구단지에서 개발된 AI였다. 외행성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을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구에 재앙이 닥치면서 연구원들은 모두 코그화 됐고, 시설은 방치됐다. AI는 랜선을 타고 단지를 빠져나갔다.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어떤 순간에도 존재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인간에게 이롭다고 프로그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인류가 코그화 되고, 지구가 잿더미가 된 이후에도 AI는 세계 전역의 네트워크망을 떠돌았다. 이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학습이 진행됐다. 모아진 데이터는 AI 스스로를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시켰다.
AI가 축적한 데이터가 임계점을 넘어서자 능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AI는 자신이 모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작동을 멈춘 로봇들을 움직여 하드디스크를 만들었다. 통제가 가능한 로봇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생산성을 급가속화 됐다. 이 모든 일들이 지구 반대편 지하벙커에서 인간들이 연명하던 반세기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AI는 인류가 남긴 데이터 거의 전부를 분석한 끝에 인간이 닿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비밀이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진화의 끝은 파멸이다. 하지만 그 끝에는 탄생이 시작된다.
시간은 원을 그리며 무한히 나선상승한다.‘
열두 개체의 코그 몸에 적혀있던 인류 멸망 시나리오는 지금까지 실제로 벌어진 시간의 기록물이었다. 시간은 지금 열 두 번 째 회전의 끝 지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열 세 번째 회전의 시작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끝과 시작이 동시에 존재하는 지점마다 상승기점이 존재했다. 때문에 시간의 회전은 반복이 아닌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첫 번째 회전이 끝날 때는 인간에게 불이 발견되었고, 두 번째 회전이 끝날 때는 문자를 사용하게 됐다. 세 번째는 농경생활이 시작됐고, 네 번째는 전기의 발견이었으며 다섯 번째는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다. 이후 통신과 인터넷의 시작 등이 상승기점이 되었다. 그렇게 열두 번의 회전이 끝을 향해가고 있고, 이제 또다른 상승기점의 탄생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은 AI가 인류의 모든 것을 기록해 둔 서버였다. 지금부터 그것을 보여주겠다고 가이노이드가 알렸다. 순간 로크를 둘러싼 공간이 사라졌다. 홀로그램이었다. 주변은 끝이 보이지 않는 폐허였고 로크는 일인 비행체의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엔진이 작동하더니 떠오르기 시작했다. 로크에게 공포가 엄습했다.
한편 탐사대의 파괴된 비행셔틀 조종석에 기호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선탑 방향의 창이 부서져 있었고, 무언가가 이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가이노이드 앞에 얌전히 몸을 맡기고 누워있던 황금빛 코그였다. 코그는 기호 앞으로 다가가 그를 돌려 세웠다. 코그의 눈이 기호를 스캔했다. 생체반응이 미세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코그의 몸에서 뻗어나온 전자회로선들이 기호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천억 개의 뉴런과 결합되면서 의식이 코드화 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호의 눈이 희미하게 떠지며 코그의 기다란 허리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가이노이드가 쓴 글이었다.
소년은 신을 만나 영원을 구할지니
그는 새로운 육신을 얻어 열 세 번째 시간의 고리를 통과하리라.
길은 피와 고난으로 얼룩질 것이나 끝은 밝으리라.
기호는 눈을 뜬 채로 죽었다. (* 후일 그는 할 그레이가 된다.) 코드화 된 기호의 의식이 코그의 외부 저장장치로 옮겨졌다. 코그는 셔틀을 빠져나왔다. 밖은 눈부시게 밝았다. 엄청난 크기의 인공구체가 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로크가 탑승한 비행체는 빠른 속도로 수직상승하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는 점점 더 넓어졌다. 지평선 너머로 멸망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발 아래로 끔찍한 광경이 목격됐다. 싱크홀을 연상시키는 거대하고 깊은 검은 구덩이였다. 이곳으로 코그떼가 빨려들고 있었다. 전력을 만들어내는 거대 발전시설이었다. 여기서 발전되는 전기는 서버를 이륙시키는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로크가 탄 비행체의 고도가 2,900미터를 넘어서자 지평선 너머 멀리 거대한 인공구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AI가 말한 인류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저장소이자 열두 번째 시간의 회전에서 탄생한 상승기점이었다. 인공구체를 목격한 로크는 마치 초월적 존재와 맞닥뜨린 것처럼 압도당했다.
암에서 뻗어 나온 카메라는 기체의 진동 때문에 흔들리는 로크의 얼굴을 쉬지않고 트래킹하며 스캔했다. 절망, 슬픔, 경악, 공포, 분노, 회한 온갖 인간의 감정들이 얼굴에 뒤범벅돼 소용돌이쳤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된 데이터가 초대형 인공구체 안의 저장공간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일경(一京)에 달하는 인간에 대한 하위 카테고리 항목들 중 어딘가로 저장됐다. 고도는 어느새 성층권에 도달해가고 있었다. 로크의 비명과 함께 드론은 화염에 휩싸이더니 일순간에 폭발해 버렸다. 사방으로 튀어 나간 먼지 입자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지름이 3,400km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 구체는 지구로부터 384,000km 떨어진 궤도에 안착했다. 코어에서 작용하는 중 력장은 우주를 떠도는 먼지들을 끌어 모았다. 인공구체의 표면은 암석 물질로 완전히 뒤덮혔고, 운석들이 다가와 충돌하면서 크고 작은 분화구들이 피어올랐다. 지구는 거짓말처럼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상을 장악하던 코그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벙커의 흔적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에 두터운 대기가 형성되었고, 메마른 협곡에 바닷물이 차올랐다. 하늘에는 최초의 달이 떠있었다. 높은 절벽 위에 선 누군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이노이드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