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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영 May 06. 2019

17. ‘라일락’ 향기를 남기고 떠난 첫사랑 ‘미스 김

따스했던 봄볕이 살짝 따갑게 느껴질 때쯤이면, 라디오 음악 방송에선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자주 들리곤 합니다. 동화를 닮은 전주가 끝나면 이어지는 서정시를 방불케 하는 노랫말과 멜로디, 그리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유장한 후주. 특히 이 곡의 첫 소절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은 감히 비교를 하자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만큼 공감각적입니다. 첫 소절만으로도 향기가 짙게 느껴지니 말이죠.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첫 소절 하나만으로 향기로운 봄을 선명하게 소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라일락의 짙은 향기 때문 아닐까요? 언어 바깥의 언어를 해독하는 열쇠는 결국 비언어적인 무엇이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라일락이 연보랏빛 화사한 색깔만 가지고 있었다면, 이 곡이 이토록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그만큼 라일락은 향기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꽃입니다.


서울 문화일보 본사에서 촬영한 라일락.


누가 봐도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라일락은 사실 우리나라와 깊은 사이입니다. 전 세계 라일락 시장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품종의 고향이 바로 우리나라이기 때문이죠. 이야기는 지난 1947년 미군정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미군정청 소속 식물학자 엘윈 M. 미더(Elwin M. Meader)는 북한산에서 자생하는 털개회나무 종자 12개를 채집해 본국으로 가져가 개량했습니다. 


서울 문화일보 본사에서 촬영한 라일락.

그는 이 개량 품종에 한국에서 자신의 일을 도왔던 여직원의 성을 따 ‘미스킴라일락(MissKim Lilac)’이란 이름을 지어 1954년 세상에 첫 선을 보였죠. 기존의 라일락보다 빨리 개화하고 추위도 잘 견디며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미스 김 라일락’은 빠르게 시장을 점령해 70년대에 한국으로 역수입되기에 이릅니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라일락을 종자주권 상실의 대표적인 예로 들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는 이들도 많죠.


사실 라일락은 서로 비슷한 식물이 많아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일락의 순우리말 이름으로 알고 있는 수수꽃다리는 한국 자생종으로 ‘미스킴라일락’과 친척 관계이죠. 이밖에도 ‘미스킴라일락’의 아버지인 털개회나무를 비롯해, 정향나무, 개회나무, 꽃개회나무, 섬개회나무, 털개회나무, 버들개회 등 라일락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식물들이 많습니다. 또한 본디 라일락이라고 불리는 ‘서양수수꽃다리’의 원산지는 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입니다. 라일락을 마냥 잃어버린 자식으로 취급하기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입니다. 불행히도 첫사랑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죠. ‘미스킴’과의 첫사랑은 아쉽게도 끝났습니다. 역수입된 ‘미스킴라일락’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기보다, 종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 더욱 발전적인 자세 아닐까요?




라일락을 만나는 방법 : 라일락은 매년 4월 말부터 길가에서 마주치지 않는 일이 어려울 정도로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는 꽃입니다. 꽃이 눈에 띄지 않으면 바람이 불 때 향기를 따라 가보세요. 그곳에 어김없이 보라색 혹은 하얀색 라일락꽃이 가득 피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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