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예고 없이 전국 곳곳에 한파가 몰아치고, 기온은 영하권으로 뚝 떨어져 외출복을 고민하게 만들죠. 길가의 화단에서 가을의 끝을 붙들고 있던 관목들의 검푸른 잎사귀 위로 서리가 쌓입니다. 그러다가 첫눈이 내리면 메마른 가지의 겨드랑이 사이에 피어난 눈꽃이 새삼 올 한 해와 결별해야 할 시간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보내셨나요? 시작하는 듯 끝이 나버리는 한 해의 달력은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오후에 지고 마는 나팔꽃의 생처럼 짧은 것 같아 덧없게 느껴지곤 합니다.
나팔꽃은 개나리, 무궁화, 장미, 해바라기 등과 더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을 알고 구별하는 몇 안 되는 꽃입니다. 아마도 독특한 꽃의 모양을 직관적으로 가리키는 이름 덕분이겠죠.
나팔꽃은 인도로부터 히말라야에 이르는 지역이 원산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세기 말에 간행된 의학서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등 고문헌들이 ‘견우(牽牛)’라는 이름으로 나팔꽃을 기록한 것을 미뤄볼 때, 나팔꽃은 이 땅에 귀화한 지 상당히 오래된 식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언어는 현상의 뒤를 따르기 마련이니, 나팔꽃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시기는 기록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덩굴식물인 나팔꽃은 왼쪽으로 물체를 휘감으며 자라나고, 주로 7~8월께 꽃을 피웁니다. 꽃의 색깔은 푸른색을 띤 자주색, 흰색, 붉은색 등 다채로운 편이죠. 나팔꽃이 사람들에게 아련한 정서를 각인시킨 이유는 꽃의 짧은 수명 때문일 것입니다. 새벽에 봉오리를 터트리는 나팔꽃은 아침에 활짝 꽃을 피운 뒤 오후에 시들어 꽃잎을 떨어뜨립니다. 나팔꽃의 수명은 고작 2~3일에 불과하죠. 여기에 가수 임주리의 히트곡 ‘립스틱 짙게 바르고’의 가사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는 아련한 정서에 슬픔까지 더했죠. 이 때문인지 나팔꽃의 꽃말 중 하나는 ‘덧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나팔꽃의 짧은 생은 결코 아련하고 슬프게만 느껴지진 않습니다. 나팔꽃은 앞서 피어난 꽃들이 시들기 무섭게 또 다른 꽃을 피우기 때문이죠. 나팔꽃은 그야말로 하루를 1년 같이 숨 가쁘게 살아갑니다. 따라서 나팔꽃은 매일 새롭습니다. 나팔꽃을 뜻하는 영어 단어 ‘모닝 글로리(Morning Glory)’는 ‘아침의 영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시 세상에 머물다가 가는 여정이지만, 나팔꽃은 ‘아침의 영광’을 위해 여름이면 매일 밤 치열하게 새로운 꽃봉오리를 준비하느라 한 눈을 팔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영부영 보낸 1년이 그런 나팔꽃의 짧은 하루보다 우월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나팔꽃의 또 다른 꽃말은 ‘기쁜 소식’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치열하게 보낸 시간의 무게는 그렇지 않은 시간의 무게보다 결코 가볍지 않을 겁니다. ‘덧없는 사랑’과 ‘기쁜 소식’. 여러분은 내년 이맘 때 나팔꽃의 어떤 꽃말로 한 해의 마지막이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나팔꽃과 만나는 방법 : 나팔꽃은 보통 7~8월부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늦가을에도 꽃을 피운 개체가 눈에 띕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아는 흔한 꽃인 만큼, 바깥으로 나와 걸으면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