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고, 아니면 말지
입시를 1년 반 앞두고 갑작스럽게 예체능의 세계에 발을 들여 그림을 그리게 된 나는 화실에서 제법 유명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너무 잘해서. 그러나 화실 전체 학생들의 그림이 벽에 걸리고, 선생님들이 한 작품 한 작품 신랄하게 비판하는 품평회 날이면 나는 작아지곤 했다. 내 유명세가 민망하도록 내 그림은 그 안에서 평범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학교 미술 시간에 A+를 받고, 교내 전시회에 작품을 내고 상을 받는 정도로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렇게 모자란 그림 실력을 성적으로 메우고, 목표했던 대학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4학년 여름 방학, 200:1의 경쟁을 뚫고 C사에 들어가 인턴을 해보니 확실해졌다. 나는 제품 디자인.을 직접 하면서 살기는 싫구나. 자신 없구나. 마지막 면담 때 사수에게 나는 아무래도 디자인보다는 마케팅 쪽에 관심이 간다고 말해버렸다. 입사를 전재로 어렵게 선발된 50명 남짓의 인턴들 중에서 입사가 되지 않은 것은 나를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바보. 일단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했어야 했는데, 그땐 그게 미련 한건 줄 몰랐다. 이때부터 내 이력 꼬이기 시작.
첫 직장은 가구 회사인 H사였다. H사에서는 Order-made Fabric Designer로 일했는데, 쉽게 얘기하면 각 집에 어울리는 천으로 커튼과 쿠션, 소파 등을 디자인해주는 일이다. 2년을 채우지 못하고 H사에서 퇴사한 이유는 거창하게도 ‘인테리어 산업의 비전’이 약하다는 이유였다. 그로부터 15년 후, 모두가 그림 같이 집을 꾸미고 인스타그램에 자기 집 사진을 올리며 살게 될 줄 진짜 몰랐음. 그리고 몇 달의 방황과 경제적 어려움을 거쳐 M컴퍼니라는 작은 회사에 취직을 한다. 20명 남짓의 작은 회사에 다니며 나는 자연스럽게 기획자로 살았던 것 같다. A-Z까지 다 각자 해야 했으니까. 다행히 사장님의 인정을 받아 신세계 백화점에 라이프스타일 매장 오픈하는 일을 온전히 담당해 진행했다. 물론 내가 한눈에 반했던 압구정의 매장과 인프라가 있었지만, 백화점 쪽으로는 백지와 같았던 상태의 브랜드를 완성형으로 만들어 보았던 경험은 내 20대 후반의 성공 스토리였다. 지금은 브랜드 망했음. 혹시라도 누가 기억하고 있을까요? t.odo(티오도)라고.
아무튼 오래 다닐 수도 있었는데, 2년 정도 다니자 회사가 이사를 갔다. 여의도에서 일산으로. 우리 집 송파구였는데. 왕복 4시간씩 출퇴근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지, 회사가 이사 가고 4달을 버텼나. 부모님께 디자인 매니지먼트 대학원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반대하셨다. 적당한 회사로 옮겨 다니면서 시집가라고. 뭐 결국은 부모님이 1학기 등록금만 대 주시는 조건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나는 천천히 대학원과 병행할 직장 알아보기로 하고. 스물여덟. 적지 않은 나이였고, 참 예쁜 나이였다. 방황하는 이력과는 별도로 스물여덟의 내 연애사도 파란만장했더랬다. 매주 소개팅과 선의 쳇바퀴를 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장 관리(?)를 하며 살게 되었고, 이 쳇바퀴의 종착역은 과연 어디일까 본인 스스로가 가장 궁금했었다. 더 해도 재미있었을 텐데, 그해 여름 끄트머리에 남편이 나타났다.
당시 무직에 대학원 합격증 하나 달랑 가지고 있던 내가 좋은 결혼 상대는 아니었을 텐데, 남편. 나 많이 사랑했구나. 차곡차곡 결혼을 준비하며, 대학원과 병행할 직장을 찾고야 말았다. 정수기와 공기 청정기 등을 만드는 W사의 소비자 감성 리서치 팀. 심리학 박사님들이 주축이 되어 리서치를 설계하고, 시제품에 대한 사용자의 느낌이나 불편함을 조사해 신제품 개발에 반영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나는 처음에는 알바생으로 들어가서 몇 달 만에 계약직 제안을 받고, 남편 표현에 의하면 ‘알바짱’이 되었다. 스물아홉. 낮에는 회사 일, 저녁에는 대학원, 저녁과 주말에는 숙제도 하면서 결혼 준비도 하는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그 해 여름 기말고사 끝내고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난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생활을 반년쯤 했을 때, 후배에게 사람 좀 소개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후배가 나에게 회사 내부 사정에 대해서 속속들이 이야기해주지는 않았지만, 대학원 마치기 전에는 디자인 필드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제법 매력적인 곳이었다. “내가 가도 돼?” “어???! 언니가.. 와도 좋지...” 어쩐지 끝을 흐리더라니. 서류-면접-면접 통과. 카메라를 만드는 S사. 지금은 없어진 회사다. 회장님 숙원 사업인 이미징 사업을 잘해보려고, S1에서 1/3, S전자에서 1/3, 나 같은 새로운 사람들 1/3로 꾸려진 회사의 탄생(내 입사 날이 회사 탄신일이라 할 수 있음.)과 소멸을 모두 겪었다. 사실 후배는 어차피 S전자에 흡수할 목적으로 만든 회사라며 나를 꼬셨지만, 그 말은 회사 안이 권력의 전쟁터라는 말이었다. 솔직히 S전자가 나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나는 디자인 필드에 돌아가겠다는 의지 때문에 S 계열사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양가 부모님이 무척 좋아하셨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아닌가. 싶은 순간들이 수도 없이 찾아왔지만, 내가 다녀본 중 가장 큰 회사인 S사의 장점은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잊을만하면 이뤄지는 조직개편이 나의 어떤 이직 보다도 버라이어티 했다. 후배의 예언대로 S사는 머지않아 S전자가 되었고, 변화무쌍 7년 재직 중 사업부장님들만 4명을 모셨으니 말 다했지 뭐. 그래서 오래 다녔네.
늘 그랬다. 해보자. 해보고 아니면 다시 하지 뭐. 나는 아닌 것도 지나치게 빨리 판단했고, 그에 따른 행동도 빨랐다. ‘해보고, 아니면’이라는 전제는 결정의 무게를 덜어준다. 나라고 다시 하면, 그 간에 했던 것이 삽질이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해보고 아니면 다시 하는 것이 0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그 과정에서 얻는 것들이 나를 또 다른 방향으로 성장시켜 주는 거라는 것을 믿었을 뿐. 이건 정말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우물 파신 분들, 제가 많이 존경합니다. 지나고 보니, 젊어서 가능했던 것도 있고. 게다가 그 다시 한 모든 날들이 나는 좋았었다. 이런 Gray zone에 사는 인간 따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