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드림

남편은 지금이 그 ‘나중’인 것 같다고 했다.

by 노란새

결국 나는 휴직을 마음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육아휴직 4개월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1년 중 4개월을 휴직한다는 것은 그 해 고과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조차도 가벼운 결정은 아니었다. 휴직이 퇴사로 이어질지 아닐지는 그때 가서 결정해도 되는 거고, 일단 휴직하기로 결정하고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던 참이었다. 일과 아이 사이에서 지지부진 치열하게 고민하던 내가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리자 점점 과감한 삶을 꿈꾸게 되었다. 2살 아이와 함께 하는 주택살이에 대해 관심이 갔다. 마침 남편의 회사는 경기도권에 위치하고 있었고, 회사와 멀지 않은 곳에 타운홈 단지들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전세를 주고, 아이가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타운홈에 살면 행복할 것 같았다. 남편은 2시간 출퇴근 시간이 30분으로 줄어들 것이고, 아이도 아빠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못해 타운홈 단지를 함께 보러 간 남편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본인의 출퇴근 시간이 1시간 반 줄어든다면, 그중에 1시간 20분은 일에 쓰게 될 거라고. 회사 근처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이건 그다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했다.


얼마지 않아 남편이 외국에 있는 회사로 이직을 하고 싶다 했다. 남편이 늦기 전에 본인도 이직을 해야겠다고, 이왕이면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결혼 3년 차쯤이었나. 남편이 다니던 외국계 기업이 M&A로 서울의 연구소를 닫은 바 있다. 당시 감사하게도 선택할 수 있는 몇 가지 옵션 중에 ‘미국행’이 있었다. 나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전개였지만, 짧고 진지하게 고민한 후 결론은 가도 ‘나중’에 가자 였다. 당시 한창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더 이상 내 커리어를 3년 이하 단위로 끊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도 그만의 이유로 그 기회는 거절하기로 결론 내렸었다. 당시에는 누가 누구를 설득할 필요가 없이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남편은 지금이 그 ‘나중’인 것 같다고 했다. 본인도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며, 좀 더 본인 전문 분야의 일을 오래 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반도체 엔지니어다. 한국 대기업에서 일하는 제법 연차가 있는 회사원들은 본인 본연의(?) 업무보다는 유관 부서들과의 회의에 불려 다니기 일쑤이다. 남편은 점점 개발 일은 다른 직원들에게 맡기게 되고, 회의와 보고, 후배들 양성에 시간을 쏟게 되는 것이 본인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사내 정치에 참여해야 점도 부담스럽다 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남편은 특히 누군가 꼭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손해 내가 보겠소 하는 사람이다. 타고난 머리와 본인만의 전문 분야가 없었다면 굶어 죽기 딱 좋은 스타일. 그런 그가 실리콘밸리에 가면 머리가 새하얀 60 넘은 할아버지 엔지니어들이 매니저가 아닌 담당자로 일한다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다. 5년을 넘겨 실리콘밸리에 살아본 바로는 당시의 환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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