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은 아날로그 감성이다.
우체국에서는 우편업무와 금융업무를 한다.
우편창구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고객이 이용한다.
하지만 금융창구를 이용하는 주고객은 60대 이상이다.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할머니도 60대 이상의 단골 중 한 분이다.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은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봉지가 들려있다.
할머니는 입구에서부터 "아이고, 국장님 안녕하십니까." 하는 경쾌한 인사를 시작으로 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말을 하시는 분이시다.
우선 봉지를 나에게 건네신다. 그리고 옆으로 맨 가방에서 통장과 도장을 주섬주섬 꺼내신다.
나에게는 통장정리를 부탁하며 국장님과는 집안 이야기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쭉 펼치신다.
내가 잔고의 금액을 알려드리면 찾고자 하는 금액과 성함을 쓰신다. 원래는 이름옆에 도장도 직접 찍고, 계좌번호와 날짜도 정확하게 기입해야 한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반드시 본인이 직접 써야 하는 금액과 성함만 쓰시게 그냥 두는 것이 여러 가지로 효율적이라는 것을 한 달만 근무해 보면 알게 된다. 나머지는 내가 보완한다.
다 써달라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손이 떨려도 치매가 와도 금액과 성함은 본인이 써야 한다.
돈거래는 십원이라도 중요하기에 어쩔 수 없음에도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까다롭게 느껴지시는 모양이다.
할머니는 머나먼 우주 세상 이야기까지 할 기세로 목청 높여 이야기하시더니 비밀번호를 누르시고 돈을 받아 가신다. 그리고 돈을 챙겨 넣으시고 뭔가 아쉬운 듯한 감사인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나가신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육체와 달리 입심은 강해지는 것이 나는 여전히 신기하기만 하다.
하지만 언젠가 나도 자연히 알게 될 나이가 올 것이다.
이것저것 손이 많이 가는 어르신들을 응대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피곤할 때가 많다.
그래도 늘 고맙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시는 할머니. 그러면 귀찮아하던 내 마음은 부끄러워지곤 한다.
이 작은 우체국에서 근무한 6개월의 기간 내내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할머니는 나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언제나 그렇듯 평범하고 반복되는 어쩌면 지루할지도 모를 일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현실을 깨워주는 일은 오고야 만다.
유난히 따듯한 바람을 몰고 오던 어느 봄날이었다. 요구르트 아줌마가 우체국 앞에 카트를 세우셨다.
아줌마는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을 챙겨 할머니의 심부름을 오신 것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거동이 많이 불편하셔서 본인이 대신 왔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할머니를 뵙지 못했다.
나는 시끄러운 공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또 나는 사람들에게 무심상하다.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부터가 나에게는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것에도 서툴렀다.
특히 직장이나 업무 처리하는 관계에서는 관련된 일 그 이상의 모든 것들은 비효율적이라 생각한다.
필요한 서비스만 주고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의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은 부담스러운 마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일상에 변화가 오니 할머니가 그립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우체국에서 오가는 대화는 소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기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스타벅스 딸기 딜라이트 요구르트 블렌디드를 더 좋아하는 내가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이 먹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는 건 그만큼 할머니가 나에게 스며들었다는 게 아닐까 한다.
나는 이제 다른 곳에서 근무한다.
할머니는 다시 일어나셔서 여전히 일상을 풍부하게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이야기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우리는 아날로그 보다 디지털로 채워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체국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화 중이다.
우체국은 아직 거래 시에 종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모니터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하도록 바꿔가며 종이는 줄여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이처럼 아날로그가 존재하는 세상의 크기는 줄어도 그 밀도만큼은 진하게 남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이지만 아날로그를 품고 있는 우체국을 통해 변화 중이다.
언젠가 창구에 사람마저 사라지고 키오스크로 바뀌는 세상이 올 것이다.
나 또한 분명 효율성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정으로 마무리할 줄 아는 아날로그형 MZ의 끝물 정도로는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만약 나에게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제는 할머니께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저지방'으로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 이런 나의 변화는 짬밥으로 만들어진 두꺼워진 낯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