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클라쓰 - 인간은 존엄성이 짓밟히면, 차원이 다른 도약을 꿈꾼다
직장 내에서의 '갑'은 무엇일까? 보통 '갑질'이라는 단어는 광고업계에서 계약의 갑을 관계에 다라 기인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각하면, 분명히 회사에 근무하기로 계약한 나도 회사 내에서 갑을 관계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를 고용한 사람이 갑이고, 나는 을이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고, 모든 직급의 사람들은 그 직급에 맞는 책임과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직급이든 그들 또한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갑을관계를 경험할 것이다. 특히 신입사원은 아무런 사회경험이 없어 주변의 수많은 신입사원 지망자들과 동등한 시작점에서 쉬운 대안책으로 고려되는 만큼, 흔들리는 멘탈을 경험할 수 있다.
<이태원 클라쓰>는 진정으로 나의 흔들리는 멘탈을 잡아주던 드라마였다!
'N포 세대'라는 말을 흔히 하지 않던가. 요즘 취업을 하고자 하는 청년들은 남들과 비슷한 루트를 따라서 경험을 쌓아가고, 경험이 비슷하다는 이웃으로 회사에서 아웃당한다.'차별성'이 없기 때문인데, 결국 그 차별성이라는 것은 남들과 비슷한 경험을 부지런히 쌓아가면서 동시에 남달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는 정말 냉정하게도 그것을 후천적인 배경에서도 보지만, 선천적인 배경에서도 본다. 외모, 스타일, 집안 환경 등과 같은 많은 선천적인 배경과 같은 환경들은 사회에 뛰어든 수많은 신입사원들을 해석하는 부차적인 요인들이 된다.
청년들은 열심히 노력해도 내가 넘어갈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경험한다. 나와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한번 책을 보는 것으로도 모든 것을 암기해버리는 친구 앞에서 '이것이 진정 타고난 학업을 위한 남다른 뇌구나' 느끼기도 하고, 나와 같은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글을 술술 써 내려가는 친구 앞에서는 '이것이 진정 타고난 글쟁이를 위한 남다른 뇌구나' 느끼기도 한다. '이것이 타고난 남다른 부자라는 거구나', '이것이 남다른 정신적 여유로움, 이것이 진짜 사랑받고 자랐다는 느낌인 거구나' 등 다양한 벽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벽을 수없이 경험하고 냉정한 숫자로 수치화되어 높아지는 벽 앞을 마주하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평범한 보통의 우리들은 수많은 선택지를 마주하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대학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출을 막기 위해 연애와 같이 관계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출산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퇴근 후의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사회 안에서 나의 위치가 너무 고스란히 보였다. 짧은 사회경험이었지만 몇 백명의 사람들을 스쳐지나가고 때론 깊이 대면하면서, 갑 또는 을의 입장을 함께 경험하는 그들을 나와 같은 선상에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환경은 물론 다를 수 있고 알지 못한 수많은 배경이 있을 것이지만, 나들 또한 나의 배경을 모두 이야기하지 않듯 그냥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버린 적 많았다.
내가 경험한 냉정한 판단은, '효용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스스로가 사회 경험도, 업무능력도, 사회생활을 통해 모아둔 돈도, 그렇다고 엄청난 배경을 가진 것 같이 느껴지졌고, 아직 효용가치가 없는 것은 신입사원의 당연한 이유와 명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느꼈다. 직장 내 갑을 관계를 규정하는 고용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스스로에 대한 판단, 그리고 외부로부터 받는 평가가 거듭되며 내가 정말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시기가 있었다.
“원하는 것만 하며 살 수 있냐?”, “혼자 사는 세상이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타인의 말에 길들여져
자신의 가치관을 ‘현실’이라는 ‘장벽’에 맞춰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정해진 틀 안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어른스럽고,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여겨지고 있는 현시대이기에.
없는 자의 소신은 이득 없이 고집이고 객기가 되는 세상.
하지만 그렇게 타인과 세상에 맞춰가는 삶이 정말 잘 사는 삶일까?
누구를 위한 삶인가?
삶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의 삶에 당신은 있는가?
여기 고집, 객기로 똘똘 뭉친 사회 부적응자 한 놈이 있다.
박새로이.
...(중략)
그는 머리가 똑똑하지도, 특출한 재능이 있지도 않다.
그저 단단할 뿐.
- 출처 : <JTBC '이태원 클라쓰' 홈페이지> 프로그램 정보
'이태원 클라쓰'는 굉장히 유명한 원작 웹툰이 드라마화된 콘텐츠다.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박새로이(박서준) 는 고등학교 내에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행동을 했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과자가 되었다. '장가'라는 대기업의 갑질로 끝없이 그의 사회적 위치는 점점 더 낮아진다. 자유의 분위기를 가진 이태원의 거리를 걷던 그는, 그곳에서 뜻이 맞는 동료들과 창업을 시작하며 도약을 위한 플랜을 세우고 실행을 시작한다.
“소신에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성공을 위해 몇 년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한 번도 더 빠른 길을 조급하게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쉽게 타협하지 않았으며 소신에 따라 꿇지 않았던 무릎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소중히 대한다.
그가 복수를 꿈꾸면서, 동시에 소신에 따라 성장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엄청난 속 시원함을 준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복수극을 실제로 흔히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현실을 언급하며 또 한 번 타협을 하려는 내게 박새로이는 한번 더 도약을 위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이태원 클라쓰'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경험했던 벽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고,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일도 '타이밍이 있는 일'이 되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박새로이의 복수에도 성장을 토양으로 한 적절한 때가 있듯이, 더 좋은 일들이 많이 펼쳐질 것 같은 희망이 생긴다. 미래는 수치화된 벽이 아니라, 개선의 여지가 남은 때가 된다.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짓밟혔을 때, 인간으로서 최소한 지켜지고 싶었던 선을 넘겨서 공격당했을 때, 상대는 공격을 꿈꾼다고 한다.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가 남다른 결과를 이뤄낸 것에는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바닥침이 주는 자극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해야 좋은 결과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스스로가 나락을 경험하는 것 같을 때 '이태원 클라쓰'의 자극점을 경험해보는 것이 어떨까.
'나는 진짜 쓸모없는 존재인 걸까. 마이너스인 존재인 걸까', 라는 아픈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이태원 클라쓰'를 정주행 했다. 어떠한 갑을 관계도 보통의 존재의 자존감, 소신을, 위치를 건드릴 순 없다. 갑을 관계는 관계를 나오는 순간 힘을 잃으며 조금은 무의미 해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나의 소신은 내가 먼저 존중해야 하며, 도약은 나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쌓여간다.
'이태원 클라쓰' 속 장가를 이겨낼 힘은 없을지라도,
나 스스로 사회에서 지켜낼 수 있는 소신의 힘은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