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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고싶은 코난 Apr 07. 2019

신문 기사의 가치

신문구독료의 소득공제?

4월 7일. 오늘은 '신문의 날'이라고 알려준 news of the day.


[사설]신문은 공공·문화 콘텐츠, 구독료도 소득공제 검토해야            


내용인 즉, 가짜뉴스, 허위정보 등 뉴스 컨텐츠의 질이 낮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문 구독료를 소득공제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 도서 구입비나 문화공연비 역시 소득공제를 해주는 등 세제혜택을 주는 것처럼 신문 컨텐츠의 질적 성장을 위한 방안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신문 구독료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월터리프먼(Walter Lippmann)의 여론(Public Opinion)을 읽다 기사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월터리프먼에 따르면 독자는 진리를 제공할 것을 기대하고 신문은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진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서비스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진리의 대가로 신문의 구독료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신문은 정기적으로 원가 이하로 팔리는 독특한 사업구조를 갖고 있다. 더불어 독자들은 신문에 높은 윤리성을 기대한다.

1920년대 쓰인 책인데, 그때 역시 신문의 비즈니스 모델이 원가 이하였다는 것이 좀 놀라웠다.


거의 100여 년이 지난 현재 역시 신문 산업은 유사하게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종이 신문을 구독하지 않지만, 여전히 신문 기사를 모바일을 통해 접하고 있다. 무료로! 그럼 그 많은 언론사와 기자들은 뭘 먹고살지? 어렵지 않게 '광고'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르게 된다. 월터리프먼은 발행부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신문이 광고주에게 팔릴 수 있을 경우에만 발행부수가 자산이 되기에, 독자들을 화나게 하는 신문은 광고주의 입장에서 나쁜 매체라고 언급을 한다. 즉, 신문의 지속가능성(재무적인)은 독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의 사설로 돌아가자면, 구독료를 소득공제혜택을 주면 독자들이 신문을 더 많이 선택할 것인가? '수준 높은'기사만이 독자들에게 선택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자본주의 산업논리에 맞춰 '옐로 저널리즘(오락적 뉴스를 더 추구하는)이 더 성장했다고 하니 현재의 뉴스 콘텐츠 소비와 생산은 소비자인 독자의 취향과 생산자의 산업적 논리가 만들어 낸 양상일 것이다. 이 사설의 댓글에는 '뒷돈이나 받고, 정치권, 기업들 눈치나 보는 언론이 무슨 소득공제냐!..' 등의 댓글이 달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스템이 된 것은 우리 독자들의 그런 성향과 취향이 만들어낸 결과이고, 신문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태생적 비즈니스 모델은 신문을 더더욱 '정파적-고정적 독자의 유치' -> '친 기업적-고정적 독자층을 기반으로 높은 exposure를 얻고 이를 기반으로 한 광고주의 획득'의 순환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입장에서 '소득공제'는 독자가 뉴스를 선택할 시 '경제적'논리로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큰 베네핏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듯 하니, 이를 통한 언론사의 수입원이 커지는 것은 큰 경제적 혜택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4월 7일 신문의 날, 신문 기사의 가치를 생각해본 오늘의 뉴스.


#소득공제 #오늘의기사 #뉴스의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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