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오다.
아파트 옆 철로를 달리는 기차의 울림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던 비는 그치고 6월 한낮의 열기가 커튼이 드리워진 방안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왔다.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데도
계절을 느끼지 못하며 10여 년이 지난 탓인지 아직도 반팔티가 어색해 소매가 긴 티를 꺼내 갈아입었다.
미니 선풍기를 다시 사야 하나. 힘이 든 지 연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쉬게 해 달라 애원한다.
이따금 창옆 나뭇가지에 앉아 숨을 고르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시끄럽게 울뿐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 간섭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휴대폰 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누구야 도대체. 안 받음 끊어야지 참. 질기네'
혼잣말을 한채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자 차가움 때문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거실로 나왔다.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정민이었다.
"아직도 자는 거니?"
"아니. 샤워하고 방금 나왔어."
"그래서 전화 못 받은 거구나. 윤설! 나와라. 오늘 남자애들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머릿수가 부족한데 세상구경도 할겸 너 나와라."
"됐어. 귀찮게 하지 말고 있는 사람들끼리 해봐."
"그러지 말고 이 언니 한 번만 살려주라. 내가 머릿수 확실하게 채운다고 큰소리쳤거든."
"정민아! 나는 됐으니 다른 데서 알아보고 그만 전화 끊자. 엉!"
"계집애도. 야 윤설! 생각 바뀌면 오후 2시에 역 앞에 있는 소브루로 나와. 끊는다."
정민이 전화를 끊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민은 언제나 일을 만들어 나를 집밖으로 끌어내려 무던하게 애를 쓴다. 고맙기도 귀찮기도 하지만 한 번씩 집밖으로 나가고픈 생각도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벽에 걸려있는 시계 쪽으로 시선이 간다.
'에라 모르겠다. 집 밖으로 한번 나가 보는 거지 뭐.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윤설은 청바지에 티를 걸치고 집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렬하게 도로위를 달구고 있는 햇볕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정민이 말한 소브루 앞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20여분 가까이 지난 뒤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정민이 일어나며 불렀다.
"윤설! 여기야."
정민이와 나란히 앉자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시선을 두기가 어색해 이곳저곳을 쳐다보다 창가 쪽에서 우리처럼 미팅을 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한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저 애도 나처럼 오고 싶지 않았나? 아니면 맘에 드는 상대가 없는 건가!'
일어나자 정민이 나의 팔을 잡으며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정민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화장실 갔다 올게."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자 나와 눈에 마주쳤던 남자애가 화장실 입구에 서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애써 누르며 그의 앞을 지나치려 하자 팔을 잡으며 쪽지를 내밀었다.
"그쪽도 맘에 드는 상대가 없는 거지? 나는 네가 맘에 드는데. 이거 내 휴대폰 번호야. 전화해 줘."
그리고 빠르게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쪽지를 가방에 밀어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정민이 눈을 흘기며 한마디 했다.
"화장실 가서 안오는줄 알았어. 속이 안 좋아?"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됐고. 오늘은 그만 헤어지고 맘에 드는 사람 나한테 말해주면 주선자끼리 연락해서 휴대폰 번호 받는 거로 했어. 괜찮지?"
"음. 괜찮아."
윤설은 창가 쪽을 봤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자리로 돌아와 자기네 일행과 얘기 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자 그가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